11화. 독식자 (1)
연우는 체내를 타고 흐르는 불의 기운을 느끼면서 묘한 기분에 잠겼다.
‘그래. 이거야.’
삼화취정. 심·기·체가 한계점에 몰리면서 하나로 통일되는 경지. 대장로가 한눈에 알아봤듯이, 연우는 명인 급에 한 발자국을 들이고 나서부터 이렇다 할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영혼적으로도 성장의 한계에 부딪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모든 잠재력이 소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이상의 발전을 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다른 시도를 여러 가지 해 보기도 했다.
마법을 단련한다든가, 의념을 형성한다든가. 혹은 원하던 대로 불의 파도를 오러 속에 담아 본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하지만 이런 자잘한 시도들도 곧 명백한 한계를 겪어야만 했다.
정신과 육체가 한 치의 어그러 짐도 없이 너무 완전하게 맞물린 까닭에,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해결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것을 깨려면 4차 각성을 이루든가, 더 많은 용과 마의 인자를 흡수하면 되겠지만. 그래서는 균형점이 흐트러질 수 있으니까.’
이 이상 각성을 시도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직 기반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추가적인 용과 마의 인자 보충도 마찬가지. 한계에 부딪친 육체가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
다른 방법으로는 깨달음을 통한 정신적 성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게 원한다고 해서 당장 이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이대로 둔다면. 새로운 단초를 찾을 때까지 꽤 긴 정체기를 겪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 연우에게는 인위적으로 격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남들은 절대 사용하지 못할 방법이.
‘여름여왕.’
그동안 필요할 때를 위해 던전 안에 묶어서 가둬 두기만 했던 녀석을, 삼키기만 하면 되었다.
반편이에 불과한 용인이 위대한 용을 잡아먹는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잠재력이 대폭 확장되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흡수를 시도한 지금.
연우는 체내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뭔가가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안팎으로 따스한 기운이 몰려 오고 있었다.
여름여왕의 종(種)은 레드. 모든 용종이 다양한 원소를 잘 다루지만, 그래도 종들은 체질마다 각자 맡고 있는 분야가 달랐다.
레드 드래곤은 그중에서도 특히 불을 잘 다뤘다. 달리 불의 왕이라고도 불릴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여름여왕의 영혼을 이루고 있던 원소들도 불이었다.
마치 추운 방 안에서 두꺼운 이불로 몸을 돌돌 만 것 같은 따듯 함. 마력회로와 현자의 돌이 감응하면서 천천히 기운을 인도해 체내로 끌어당겼다.
살갗에서 근육으로, 근육에서 핏줄로, 마력회로로, 코어로, 뼈마디로. 세포 속에 불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리고, 인자와 뒤섞였다. 특히 용의 인자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환호를 하면서 더 깊숙하게 끌어당겼다.
불의 기운은 그렇게 육체 깊숙이 내려앉았다. 깊숙하게, 더 깊숙하게. 그러다 아주 깊숙한 곳, 의식 세계에도 천천히 문을 두들겼다.
아마 이대로 둔다면 불의 기운은 의식 세계를 지나, 영력을 타고, 무의식의 세계를 통과해서 영혼에까지 다다를 것이다.
다만, 연우는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육체와 다르게, 조금 불안한 마음을 가졌다.
‘이것은 어떻게든 통제하에 둬야만 해.’
여름여왕은 애초 태생이 용이었으니 본능적으로 힘을 다룰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달랐다. 인간인 그로서는 마룡체에 익숙해질 때 계속 상당한 수고를 들여야 했다. 그런데 진짜 용의 힘이라면.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할 터였다.
그렇다면 완전히 몸에 자리를 잡기 전에 제어권을 확실히 잡아 놔야만 했다.
하지만.
‘뭐지?’
여름여왕의 영혼을 흡수하면서 얻은 기운들은 연우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의념을 불어넣어 어떻게든 끌어 올리려 했지만, 불의 기운은 마치 완전히 별도로 분리된 기관처럼 움직였다. 현자의 돌까지 동원했지만, 따로 움직이는 건 여전했다.
불의 기운의 침잠은 계속 이어졌다. 여러 기관을 지나, 끝내 영력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대로라면 의념이 방출되어야 하는 통로이건만. 지금은 반대로 불의 기운이 이곳을 이용하면서 영혼에 다다랐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쭈뼛 세웠다.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영혼은 아직 플레이어 중 어느 누구도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동생도 이론만 세워 뒀을 뿐, 이렇다 할 체계를 성립해두지 못했다.
그런 곳을 침범한다고? 어쩌면 불의 기운에 섞여 영혼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그래서 어떻게든 떼어 놓으려 했지만.
『재미난 것을, 가져왔군.』
심연, 저 깊숙한 곳에서 언제나 연우를 지켜보고 있는 마성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다 할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연우의 불안감을 더 크게 키웠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불의 기운은 여전히 연우의 통제에서 벗어난 채로 영혼을 따라 뱅글뱅글 맴돌면서 영력에 섞이고, 영압에 동화되다가, 천천히 영혼으로 스며들었다.
그 과정에서 연우는 여태껏 어떻게 손을 쓸 생각도 하지 못했던 ‘영혼’이란 게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불의 기운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조금씩 인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쉽게 말해,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였다.
하지만 답답하고, 음습하고, 무거운 철창에 갇혀 어떻게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여름여왕의 망령이 겪던 것처럼.
영혼은 외부로 어떻게든 에너지를 방출하고자 했고, 육체는 그것을 가두는 감옥 역할을 했다.
그런 곳에서. 연우의 영혼은 불의 기운을 한껏 머금으면서 폭발할 것처럼 크게 팽창했다.
격의 상승이었다.
[이스메니오스의 영혼을 찬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용의 인자가 용의 영혼을 받아들입니다.]
[영격(靈格)이 상승합니다.]
[영격이 상승합니다.]
[용종과 관련된 모든 특성, 스킬, 권능이 일제히 한 등급 이상 상승합니다.]
[적룡의 파편을 획득했습니다.]
[화 속성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칭호 ‘불의 지배자’를 획득했습니다.]
연우는 마치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격이 급속도로 상승하면서 생긴 현상. 이대로 있다가는 하늘 위로 튕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연우는 뭔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화아아-
피부를 따라 흐르던 붉은 기운이 점차 가라앉으면서 사라졌다.
「축하. 드립니. 다.」
옆에 있던 부가 턱을 떨그럭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살짝 미간이 좁혀졌다.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육체적인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회로를 돌려 봤지만, 양이 늘어나거나 질이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서 이게 뭔가 싶어 의식 세계로 접속해 보는데.
“……!”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았다.
여태껏 답답하고 좁게만 느껴졌던 의식 세계가 끝도 없이 확장되어 있었다. 안개가 걷힌 것처럼 머릿속이 환했고, 사고의 범주나 습득하는 정보량도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법칙들이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용마안을 전개하자 더 많은 결들이 어우러지는 게 보였고, 초감각을 형성하니 더 많은 것들이 감지되었다.
수많은 물리 법칙이 그를 거미줄처럼 단단히 얽어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에 못지않은 것들이 그를 구속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인과율일까.
그리고 그 너머에.
연우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 땅, 바위, 세상의 이면. 곳곳에 시선들이 있었다.
예전에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는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다 할 느낌은 없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떤 시선은 따뜻했고, 어떤 시선은 냉랭했다. 호기심이 가득하거나, 장난기가 있거나, 혹은 분노로 가득 찬 것도 있었다.
‘불쾌해.’
연우는 자신을 둘러보는 시선을 떼어 낼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당장 자신을 옭아매는 물리 법칙도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너머에 있을 신과 악마들의 시선을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까.
무왕을 비롯한 아홉 왕과 여러 하이 랭커들은 이런 감각을 늘 달고 사는 건지.
연우는 조금이라도 시선들로부터 무뎌지기 위해 감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간간이 허공을 따라 떠다니는 자그마한 불씨들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려 보자, 갑자기 확 튀어 오르면서 커다란 불꽃이 되었다가 사라졌다.
이렇게 보니,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져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갈리어드는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육체를 더 잘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의념.’
의식 세계를 확장시키면서 육체를 하나하나 읽어 나가고, 조금씩 완전한 통제하에 두기 시작했다.
그러다 연우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름여왕의 영혼을 흡수하면서 눈에 띌 만한 육체적인 성장은 이뤄지지 않았다. 격이 상승했어도 여전히 한계가 있어서, 손댈 수 있는 용의 권능이 적었다.
대신에 그는 아주 큰 다른 것을 얻었다.
잠력(潛力).
육체와 영혼에 내재된 한계점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동안 번번이 그를 가로막히게 했던 재능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어쩌면. 이제는 동생과 비교를 해도 뒤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였다.
물론, 이 잠력을 모두 소화하려면 그만한 수고와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할 테지만.
아무렴 어떨까.
드디어 그를 여태껏 답답하게 묶었던 제약을 벗어던지게 만든 것만으로도.
연우는 아주 큰 성과를 달성한 셈이었다.
* * *
“그럼 난 가마. 원하던 대로 바른 시일 내에 좋은 물건들로 만들어 놓을 테니, 발푸르기스의 밤 때처럼 함부로 나대다가 다치지나 말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 쓰긴 누가 써!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돈 떼일까 봐 그런 거지! 네가 다치면 누구한테 그 걸 받아?”
헤노바는 연우의 감사 인사가 낯간지러웠던지 얼굴을 붉히면서 투덜거렸다.
그의 뒤에는 짐이 꽤 많았다. 발골 작업으로 보기 좋게 낱낱이 해체된 여름여왕의 잔해들이었다. 앞으로 이 물건들은 연우의 의뢰에 따라 각종 무구로 변할 예정이었다. 연우가 사용할 물건들도 있었고, 앞으로 만들어질 클랜에 요긴하게 쓰일 물건들도 있었다.
브라함은 포탈을 따라 홱 하고 사라지는 헤노바를 보면서 엷은 미소를 떴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헤노바와 자네의 관계는 참 묘하군.”
“일방적으로 제가 혼나는 관계니까요.”
“하핫.”
브라함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연우의 목소리에서 굳은 신뢰가 느껴지고 있었다. 헤노바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툴툴거려도, 연우를 대할 때의 눈빛은 언제나 따뜻했다. 마치 부모 자식 관계처럼.
브라함은 왜 굳이 헤노바에게는 정체를 따로 밝히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연우와 헤노바 간의 신뢰 관계에 굳이 자신이 낄 필요도 없을뿐더러, 연우도 어떤 생각이 있을 거란 짐작에서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난타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미어졌다. 대체 무엇이 딸을 그렇게나 괴롭히고 있는 걸까.
“그럼 남은 일들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으니 여기는 걱정 말고 일단 공략에만 집중해. 괜찮은 물건이다 싶은 인간들 있으면 주워 오기도 하고.”
“예. 그러겠습니다.”
꼭 길거리에서 새끼 고양이라도 주워 오라는 말투.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던전을 빠져나왔다.
클랜 창설에 필요한 나머지 뒷일은 브라함과 갈리어드에게 모두 일임한 상태였다.
아난타를 병간호하는 것으로도 정신이 없을 테지만. 그래도 브라함은 그동안 외우주를 복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빨리 실험실을 완성시켜서, 옆에 아난타의 치료실도 만든다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수완이 좋은 갈리어드가 나서서 크게 걱정할 게 없었다.
이렇게.
다른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필요한 건 딱 하나, 인재였다.
연우는 한동안 공략에 다시 집중할 생각이었다. 달라진 실력도 확인할 겸, 그간 많이 미뤄뒀던 층계 공략에 집중하면서 괜찮다 싶은 인물들을 포섭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미리 점찍어 둔 인물들도 몇몇 있었다.
‘칸과 도일. 그 친구들이 있으면 좋긴 할 텐데.’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을 해 봐도 도저히 행방을 찾을 수가 없으니. 그게 답답할 노릇이었다.
물론, 그들 말고도 생각해 둔 인물들은 몇 명이 더 있었다. 일기장을 통해 동생이 겪은 군웅은 아주 많았다. 그리고 추가로 층계를 오르면서 유망주들을 발굴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물론, 어중이떠중이를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스카우트를 할 때에는 만전을 기할 생각이었다. 마음을 열었다고 해도, 연우는 여전히 폐쇄적인 성향이었다.
[탑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연우는 메시지를 보면서 탑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환한 빛무리에 가려지는 탑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높은 탑의 꼭대기에서 보이는 하늘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