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독식자 (2)
[이곳은 26층, ‘통곡의 벽’의 관입니다.]
연우는 환한 빛무리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조금씩 빛무리가 가시는 순간, 갑자기 뼛속까지 에일 것 같은 추위가 확 하고 몰려왔다.
그리고 불어닥치는 눈보라.
연우는 마력회로를 돌려 추위를 쫓아냈다. 동시에 마장을 로브로 변화시켜 후드를 머리에 푹 뒤집어썼다. 이렇게 하니 따가운 바람이 덜 방해되었다.
주변 세상은 온통 새하얬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설원뿐이었고, 하늘에서는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눈송이가 쉴 새 없이 펑펑 쏟아졌다. 풍속도 얼마나 센지 웬만해선 서 있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시야 확보도 힘들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연우가 있는 곳은 거대한 성곽 위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곳곳에 높다란 깃발이 꽂혀 강풍에 나부끼고, 성벽 아래는 높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그만큼 성벽이 아주 높게 서 있단 뜻이었고, 주변은 온통 크고 작은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26번째 스테이지였다.
‘많이 귀찮겠어.’
물론, 층계 공략이 귀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 층 한 층을 오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얻어 가는 연우로서는 공략이 귀찮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작 그가 거슬리는 것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이었다. 경계심을 넘어선 적개심이 느껴졌다.
“저 사람……?”
“어. 독식자야.”
“여름여왕 시해 때 이후로 종적을 감췄다고 들었었는데. 다시 뛰기 시작하는 건가?”
“제길! 이래서야 이번 회차는 실패나 마찬가지잖아.”
이미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들 사이에는 ‘독식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파리 하나 남아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니 적개심을 띠는 것도 당연했다.
「흐흐. 우리 주인님, 인기가 많으신데요, 아주?」
「어중이떠중이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으십니다.」
연우를 따라 폐관 수련에서 나온 샤논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고, 한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평상시라면 연우도 그냥 무시하고 넘겼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스테이지는 타인의 경계가 있으면 피곤해진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때.
휘이이!
매서운 한파가 다시 휘몰아치면서 새로운 전체 메시지가 떠올랐다.
[26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나하트마 설산에 세워진 ‘벽’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북쪽의 대지 끝에서부터 내려오는 서리 괴물들을 막아 내는 절대적인 상징으로 군림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수많은 인명이 이 ‘벽’ 앞에 스러졌기에, 통곡의 벽이라는 별칭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잠잠했던 서리 괴물들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될 거란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그 규모는 통곡의 벽이 세워진 이래 단 한 번도 관측할 수 없었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이며, 괴물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도 영체 급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한 달 동안, 서리 괴물들의 대규모 공습으로부터 통곡의 벽 안쪽에 있는 ‘라의 눈물’을 사수하세요.]
연우는 메시지 내용을 살피면서 미간을 살짝 좁혔다.
‘라의 눈물을 지키려면 다른 플레이어들의 협조가 필요한데.’
통곡의 벽은 쉽게 말해서 디펜스 게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루에 단 한 번, 달이 하늘 정중앙에 걸리는 자정이 되면 설산 너머에서는 괴물들이 대거 쏟아졌다.
평범한 몬스터는 절대 아니었다. 하나같이 냉기에 특화된 괴물들이었고, 육체가 떨어져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오히려 피 냄새를 맡으면 더 좋다고 달려드는 것들이니.
그런 괴물이 수만, 수십만…… 아니, 수백만씩이나 몰려온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것들로부터 성벽을 보호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물론,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혼자서 열 손을 감당할 수 없으니. 다른 플레이어들과의 긴밀한 협조가 가장 중요했다.
첫 주나 둘째 주까지는 어떻게든 공급을 막아 낼 수 있다. 아무리 몬스터의 숫자가 많아도, 플레이어들의 숫자도 꽤 많은 데다가, 성벽 안에 장치된 수성용 병기들도 많았다.
문제는 셋째 주부터였다.
이때부터는 보관된 식량과 식수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수성용 병기도 훼손되기 시작한다.
특히 이때부터 등장하는 10미터 크기의 서리 괴물들은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 단단한 성벽도 무너질 정도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다 보니 플레이어들 사이에도 분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한정된 자원을 나눈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더십이 있는 자가 나타나서 공평하게 일을 분배한다던가, 민주적인 절차와 합의에 의해서 의무를 분담하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이 되기 십상이었다.
우리도 그 때문에 상당히 고생해야만 했다. 4주차에 들었을 때에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골칫거리였다.
한 달이라는 기간은 절대 짧지 않다. 하물며 적의 공세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어나기만 한다.
피로면 피로, 빈약한 자원이면 자원. 모든 게 플레이어들을 궁지로 몰아넣기 쉬웠다.
그래서 연우는 스테이지를 시작할 때 사람들을 시켜 라의 눈물을 지키도록 하려 했지만.
‘글렀군.’
저렇게 적개심 가득한 눈빛이라면 뒷일은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협조를 요청한다고 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힘을 사용해 강제로 굴복시킬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조금 귀찮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어딜 가더라도 저런 시선에서 벗어나기 힘들 테니, 이 참에 독식자라는 인상을 확실하게 박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 그렇게 되면 인재를 찾기 힘들려나.’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되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어차피 눈에 띌 존재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띈다. 송곳은 주머니를 뚫는 법이니.
츠츠츠-
연우는 생각을 정리하고 칠흑왕의 절망을 통해 괴이들을 움직였다.
그림자가 길게 쭉 늘어나면서 성곽 안쪽 기지로 들어가는 철문에다가 가시덤불을 형성했다.
마침 성벽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기지로 들어가려던 플레이어들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단순히 그림자만 일어난 것이라면 무시를 했을 테지만. 그림자 사이사이로 눈들이 촘촘하게 나타나 활짝 열렸다. 수십 개의 눈동자와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등골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먹이를 갈구하는 들짐승과도 같은 것들이 그들을 집어 삼키기 위해 눈을 빛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독식자!”
플레이어들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연우를 노려봤다. 그들은 그림자를 걷어 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 있는 괴물들은 분명 그들쯤은 쉽게 찢어서 삼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들이 노려보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만 던졌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은 수성에만 신경 써. 필요한 물자는 그때그때마다 꺼내 줄 테니. 라의 눈물은 이쪽이 보관하고 있지.”
“무슨 말을……!”
연우는 플레이어들이 뭐라고 따지건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성벽 위로 가볍게 올라섰다.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하는 동요 어린 시선도 가득했다. 이곳의 성벽은 아주 높다. 거기다 한파도 매섭다. 아무리 마법을 부린다고 해도, 여기서 뛰어내렸다가는 강풍에 휩쓸려서 피떡이 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어떻게 지상에 내려선다고 해도, 설산 주변에는 온통 서리 괴물들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 상당수가 이 스테이지를 몇 번씩 재도전하는 중이었기에, 서리 괴물들이 얼마나 지독하고 악랄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괴물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 급 인사들은. 웬만한 플레이어쯤은 손쉽게 씹어 삼킬 정도였다. 괜히 ‘적을 궤멸시켜라’가 아닌, ‘성을 보호하라’가 미션인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어? 어어!”
“미쳤……!”
연우는 플레이어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눈보라가 가득 섞인 바람을 타고 그대로 아래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눈송이가 시야를 가렸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초감각에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강화된 의념과 세밀해진 영력 덕분에. 육체를 움직이는 게 훨씬 쉬웠다.
탁!
연우는 성벽에서 가장 가까운 설산 중턱에 내려앉았다. 무릎 높이 이상으로 발이 빠질 만큼 눈이 잔뜩 쌓여 있었지만. 열풍을 뿜어내니 삽시간에 주변의 눈들이 다 녹으면서 길을 열었다.
[바람길]
한 발을 앞으로 내딛자, 갑자기 매섭게 몰아치던 강풍이 연우를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활짝 열린 용마안을 따라, 잔뜩 뭉친 결들이 여러 갈래로 흐르는 것이 보였다.
옵션, 길찾기.
미풍, 삭풍, 돌풍 등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연우는 자신에게 특화된 길을 찾아 그대로 밟았다.
돌풍.
쾅!
쐐애액-
연우는 매서운 바람을 한껏 일으키면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부는 돌풍 속에는 매서운 열풍도 섞여 있었다. 새롭게 얻은 칭호인 불의 지배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이었다.
[불의 지배자]
설명: 스킬과 권능에 불꽃의 성질이 강하게 묻어난다. 또한, 화 속성에 지배력을 자랑한다.
전개하는 스킬과 권능은 물론, 동작 하나하나에도 화 속성이 묻어난다는 패시브 스킬. 원래는 여름여왕이 갖고 있던 것을, 흡수를 하면서 강탈한 것이었다. 마력 소모도 크지 않기 때문에, 연우에게 아주 유용했다.
연우는 돌풍이 만들어 내는 길을 따라 산자락을 크게 돌면서, 초감각의 영역을 인근 설산까지 최대한으로 확장시켰다.
곳곳에 감지되는 것들이 있었다. 설산 너머에, 족히 수십만은 될 것 같은 대군이 단단히 무장한 채로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달리면서 연우는 손을 활짝 펼쳤다. 그림자가 올라오면서 손바닥 사이로 둥근 구슬이 나타났다.
루비를 깎아 만든 것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 스테이지 미션으로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밝혔던 라의 눈물이었다.
‘일단 이 스테이지에서 얻어야 할 건 두 개. 라의 눈물과 아포피스의 독니.’
26층의 스테이지는 태양신 라와 밤의 마물 아포피스의 계속되는 전쟁이 모티브였다.
아포피스의 위장에서 태어난 서리 괴물들은 아포피스의 가호가 가장 강해지는 자정을 즈음해서 공략을 시도한다. 이때, 시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설명대로 한 달을 버티든가.
아니면 서리 괴물들의 중심에 있는 ‘아포피스의 독니’를 강탈하든가.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면 꽤 좋은 물건을 얻을 수가 있었다. 단번에 성장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물건이.
삼화취정으로 성장이 그친 연우였다면 탐낼 필요가 없을 테지만. 잠력이 깊어진 지금, 갖가지 기연은 연우에게 아주 절실했다. 이미 새롭게 짠 계획들도 이런 기연들을 독식하는 데 중점을 뒀다.
물론, 아포피스의 독니를 강탈하는 것은 라의 눈물을 사수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수백만은 넘는 서리 괴물들부터. 중심부로 갈수록 랭커들도 쉽게 상대하지 못할 괴물들이 득실대는 곳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든다는 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샤논. 한령.’
연우에게는 충실한 수족들이 있었다. 그림자가 쭉 늘어나면서 옆으로 데스 로드와 데스 나이트가 나타났다. 푹 뒤집어쓴 투구 아래로 인페르노 사이트가 이글거렸다.
샤논과 한령은 여태껏 꽁꽁 눌러두고 있던 마기를 한꺼번에 발산시켰다.
……!
소리 없는 기백이 산자락을 크게 뒤흔들었다. 우르르. 저 높은 산꼭대기에서부터 눈사태가 거칠게 일어났다. 새하얀 분진을 휘날리면서 설산 곳곳이 요란한 소동에 잠겼다. 연우와 마찬가지로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던 샤논과 한령은 더 이상 힘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연우도 힘을 한껏 개방했다. 열기가 돌풍에 섞여 눈보라를 지우고, 곳곳에 사막화 현상을 만들어 냈다. 증기가 잔뜩 뭉치면서 안개가 되어 설산 일대를 가득 메웠다.
바로 그때.
연우는 괴물의 군단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족히 수만 마리는 될 것 같은 괴물들이 마치 인간의 군대처럼 오와 열을 맞춘 채로 사열해 있었다. 다만, 생김새는 저마다 달랐다.
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사자나, 코끼리의 얼굴에 인간의 몸을 한 키메라부터. 코뿔소를 닮은 짐승 위에 올라탄 삐쩍 마른 좀비들까지.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 그들 주위에 부는 살얼음 섞인 칼바람도 너무 날카로웠다.
밤의 마물, 아포피스가 쏟아 낸다는 괴물들.
녀석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속성을 자랑하는 연우 등을 발견하고 뭐라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곳곳에서 일어나는 눈사태에 묻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물론, 연우는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목적은 녀석들을 쓸어 내는 것밖에는 없었으니까. 소수가 이 많은 녀석들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까 싶을지도 몰랐지만. 때마침 연우에게는 괜찮은 광역기가 하나 있었다.
‘불의 파도.’
연우는 아공간에서 비그리드를 꺼내 거칠게 휘둘렀다.
눈사태가 만들어 내는 굉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눈을 멀게 만드는 빛과 열이 설산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