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독식자 (3)
비그리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빛을 토해 내고 있었다. 칼날의 끝부분에서부터 손잡이까지. 주변의 설원보다도 더 순백색으로 빛났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마치 길쭉한 막대기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우웅, 웅-
[비그리드- ???]
분류: 한 손 장검
등급: ???
설명: 지금은 잊힌 머나먼 은의 시대, 위대했던 영웅이라면 누구나 탐내던 성검이 있었다. 하지만 성검은 여러 영웅들의 손을 전전한 나머지 피를 너무 많이 머금게 되었고, 끝내 주인을 해친다는 악명과 함께 마검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느 이름 모를 주인은 신력(神力)과 용혈(龍血)로 저주의 근원을 씻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성검이 여태 숨겨 뒀던 빛을 드러내면서 잃어버렸던 이름을 되찾는 순간, 위대한 영웅들은 찬탄과 질투를 할 것이며, 악랄한 적들은 공포와 경악에 잠기게 될 것이다.
* 검의 승화
비그리드에는 뭇 영웅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과 추억이 단단히 새겨져 있다. 이러한 사념들은 전장에서 가장 크게 빛을 드러내어 새로운 후임자에게 강한 의지를 실어 줄 것이다.
마주한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의 살의를 일부 흡수하여 시전자의 능력을 강화시킨다. 반대로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투기(鬪氣)가 비례해서 증폭한다.
* 축복 전도
적에게 마지막 타격을 입힐 시, 가까운 주변에 있는 모든 적에게 동시에 저주를 내린다. 저주를 받은 대상자들은 ‘감염’ 상태가 되어 방어력과 이동 속도가 대폭 하락하고, 그에 비례해 시전자에게 강한 축복을 내린다.
* 영웅-불굴(不屈)
시전자의 투지와 증오가 일정 수치를 넘었을 시, 상당한 양의 마력을 대가로 성검에 잠들어 있던 영웅들의 사념을 깨울 수 있다. 이때, 공격 속도는 최대 50%, 공격력은 2,000%까지 증가하며, 극대화 피해도 40~50%만큼 증폭한다. 대신에 방어력과 속성력이 최대 70%만큼 저하된다.
* 악역-구축(驅逐)
비그리드에는 영웅의 사념만큼이나 그들이 쓰러뜨린 마물들의 원한도 단단히 응어리져 있었다. 원래는 이런 원한이 성검을 마검으로 타락시킨 주요 원인이었지만, 근원이 씻긴 지금은 마를 마로써 응징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과 축귀구마(逐鬼驅魔)의 중심이 되었다.
스킬 발동 시, 적수로 지정된 자에 대한 타격 실패율이 현저히 낮아지며, 일정 확률로 극대화 성공률이 대폭 증가하게 된다.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인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타인으로의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현재 99%까지 저주를 해제하였습니다. 모든 기능을 오픈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진짜’ 이름을 찾지 못했습니다. 숨겨진 진짜 이름을 찾아야만 마지막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연우는 여름여왕을 잡고 난 뒤에 용의 피를 따로 빼어다 비그리드에 먹이면 어떻게 될까 고민을 했었다.
용의 피는 현세에 존재하는 모든 영약 중에서 최상위에 해당하는 보물이었으니. 그 속에 섞인 수많은 인자들은 특성마저 개화시키기 때문에, 연우는 용체를 각성할 수 있었고, 여름여왕은 휘하에 용생구자와 81개의 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 은의 시대에 영웅들이 사용했다는 성검이 용의 피를 머금게 된다면. 과연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궁금했던 것이다.
신화에서 용은 보통 영웅들이 쓰러뜨리는 악역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자칫 겨우 씻어 낸 저주를 다시 키울 위험도 있었지만. 이미 비그리드는 성검으로서의 기능을 되찾아 스스로 신력도 풀어내고 있어서, 자체적인 정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여름여왕의 사체에서 뽑아낸 혈청에다가 비그리드를 담가 놓았다. 이외에 별다른 조처는 하지 않았다. 다만, 부를 통해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변화를 체크했다.
그리고.
이런 연우의 시도는 크게 성공했다.
비그리드에는 영웅들의 사념만이 어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악역들의 원한도 묻혀 있었다. 영웅의 사념은 신력에 반응하면서 성검의 특성을 부각시키지만, 악역의 원한은 용혈에 반응하면서 마검의 특징을 드러냈다. 여태 씻길 기미를 보이지 않던 저주의 근원이 용혈에 반응했다.
결국 저주의 근원은 천천히 성질을 변화시키면서 신력과 섞였다.
성검과 마검의 특징을 겸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여태 잠겨 있던 마지막 옵션을 해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게 바로 지금의 비그리드였다.
다만, 아직까지도 마지막 남은 1%의 조건을 달성하지 못해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지만.
비그리드는 온통 새하얀 광채로 뒤덮인 독특한 형태가 되어 연우의 손에 착 감겼다. 불길과 한데 어우러지면서 빛나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여겨질 정도였다.
연우는 신력과 용혈을 머금고, 영웅과 악역의 사념이 잔뜩 어린 성검을 거세게 휘둘렀다. 빛은 불꽃을 토해 냈고, 불꽃은 파도가 되어 설산을 가로질렀다.
정말 ‘번쩍’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불길은 귀가 이대로 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굉음과 열기를 동반하면서. 한 곳에 사열해 있던 서리 괴물들 상당수를 깡그리 밀어 버렸다. 녀석들이 내지르는 비명이나 경악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콰콰콰-
한 번 밀려난 자리로 튀어 오른 불씨들은 다시금 더 멀리 퍼져 나가면서 연쇄 폭발을 차례로 일으키고, 밖으로 거세게 밀려난 후 폭풍은 곳곳에서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열풍을 연거푸 토해 냈다.
설원을 이룰 정도로 수북하게 쌓였던 눈은 단번에 증발하면서 하늘을 가득 물들일 정도로 뿌연 안개를 이루고,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 있던 땅은 금세 사막화가 이뤄져서 갈라진 바닥을 훤히 드러내고 말았다.
휘이이!
그러다 밀려났던 바람이 안쪽으로 몰려오면서 사방으로 퍼졌던 불길을 안쪽으로 잡아당기니. 지옥이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연우는 눈을 반짝였다.
‘비그리드로 펼쳐 내니 위력은 확실해. 그럼 여기서 강도를 좀 더 높여서.’
폭발로 한창 흐트러졌던 전장이 드러났다. 서리 괴물들은 부서진 몸을 부여잡으면서 악다구니를 써 대다가, 원흉인 연우를 발견하자마자 와락 달려들었다.
좀 전까지 잘 잡혀 있던 질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런 참상을 만들어 내고, 자신들을 얕본 인간에 대한 분노만 가득했다. 이런 미친 짓거리를 저질렀으니, 이만한 힘이 더 이상은 없을 거란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비그리드를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돌렸다. 쩌어엉. 마력을 한계까지 밀어 넣자, 비그리드가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예전 같았으면 고통스럽다면서 비명을 질러 댔겠지만. 성검으로 완전한 각성을 이룬 비그리드는 아주 손쉽게 마력을 수용했다.
그리고 다시 터지는 불의 파도는 이전보다 더 큰 범위로 확산되었다. 고열과 열풍이 몇 번씩이나 대기를 찢고 또 찢었다. 이제는 이명만 난무했다.
불길이 잔뜩 이글거리는 곳에다 다시 한 번 더 커다란 폭탄을 던졌으니. 폭발은 배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연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비그리드를 연거푸 휘둘러 댔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러다 열 번째쯤에 다다랐을 때, 흉한 몰골이 되었던 설산은 허리가 완전히 날아가고 말았다. 배로 누적 되던 폭발은 이제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 속에서도.
연우는 불어오는 열풍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나부끼기만 할 뿐.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간만에 마력을 잔뜩 풀어내서 속이 시원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처음 불의 파도를 만들어 냈을 당시, 적아를 가리지 않고 불사르는 무지막지한 파괴력 때문에 제대로 전개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현상이었다.
불의 파도의 모티브가 되었던 빛의 파도를 정우가 풀어낼 때, 감당하지 못할 만큼 곳곳으로 퍼지는 힘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드높은 상공으로 떠오르지 않았던가. 연우도 똑같이 겪은 불편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의념을 수련하면서 해결책을 떠올릴 수 있었다.
동생은 21층 이후에 마나 제어를 통해 자신에게 피해가 퍼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빛의 파도를 조절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위력을 어느 정도 조절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연우도 여름여왕의 영혼을 흡수하면서 이제는 그 정도의 위력 조절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그는 불의 파도를 온전히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아니, 불의 파도가 가진 최고 위력을 드러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해결책은. 생각보다 훨씬 간단했다.
속성 동화.
의념으로 신체를 통제하면서, 자체 속성을 화 속성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또한, 불의 파도에도 의념을 일부 섞으면서 같은 속성으로 일체화시켰다.
불과 열이 그의 몸을 장애물로 생각하지 않고 고스란히 통과할 수 있도록. 그대로 스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불길 속에서, 연우는 불이었고, 불도 연우였다. 연우는 아주 자유로웠다.
이렇게 되니, 여태껏 불의 파도를 전개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방어 기제로 위력을 제어하느라 두었던 한계선까지 사라지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불의 파도를 마구 펼쳐 낼 수 있었다.
속이 시원했다.
답답했던 모든 것들을 한 번에 털어 내는 느낌.
‘이만하면 아주 쓸 만해.’
사실 쓸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태껏 공상 속에서만 풀어냈었던 불의 파도는 그가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위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진짜 파괴력은 중첩되었을 때 더 크게 빚어진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기는 뜨겁고, 대지는 끊었다.
그쯤 되자, 연우는 열한 번째 칼질부터는 밖으로 확산시키는 데 몰두했던 불의 파도를, 조금씩 안 쪽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연우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온전한 파괴력만 보는 게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불의 파도를 완전한 통제하에 두는 것.
그래서 불의 파도를 의념으로 제어하고자 했고, 조금씩 한 점으로 압축시키면서 오러 속에 가둬 보고자 했다.
오러로 결집된 불의 파도. 상상만 해도 엄청났다. 이것만 온전히 성공해도, 무왕의 팔괘에 못지않은 무기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연우만의 의념기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칼질이 이어질수록. 불의 파도는 비그리드를 중심으로 계속 안쪽으로 결집되었다. 뜨거운 불길을 압축시키는 만큼 온도는 더 높아졌고, 이제는 주변 일대의 대기가 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풍을 뿜어냈다.
서른한 번, 서른두 번, 서른세 번…….
마흔여덟 번, 마흔아홉 번.
쉰 번째가 넘었을 때, 비그리드는 어느 때보다도 거친 빛을 뿜어냈고.
일흔 번째가 넘었을 때, 막대한 양의 마력을 아주 손쉽게 수용하던 비그리드도 점차 부담이 됐는 지 검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여든을 넘어 아흔 번째가 되었을 때.
연우의 주변으로는 무시무시한 열풍만 불어닥칠 뿐, 불길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순백색에서 적갈색으로 변한 검신 위로 자잘한 불똥이 튀기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런 불똥마저도 땅에 떨어지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것들이었다.
아흔다섯 번째에는 연우를 따라 감돌던 열풍마저도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빛과 열, 바람까지 스킬 전부가 의념에 갇힌 것이다.
그렇게 아흔일곱, 아흔여덟 번째가 되었을 때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오러가 단단해지고.
아흔아홉 번째에는 적갈색의 오러가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색으로 변했다.
검은색으로 이뤄진 강기. 흑염강(黑炎罡)이 탄생했다.
그리고 마지막 백 번째에. 연우는 흑염강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콰직!
수만 마리의 괴물들이 몰살된 자리에, 마지막까지 남아 겨우겨우 연우의 공세를 버텨 내던 군단장의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짙은 혈선이 그어졌다.
“괴, 물……!”
녀석은 스스로가 이미 괴물인 주제에, 괴물을 보는 듯한 끔찍한 얼굴을 하다가, 곰팡이처럼 몸을 타고 번지는 불길에 그대로 휘말려 재가 되어 사라졌다.
[13군단과 군단장 훼이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만큼 획득했습다.]
[추가 공적치를 1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의념의 새로운 사용법을 터득했습니다.]
[강기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불을 오러 속에 가두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화 속성에 대한 지배력과 속성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스킬 ‘불의 파도’를 완성했습니다.]
[불의 파도]
넘버링 002
숙련도: 8.1%
설명: 플레이어 ###가 넘버링 스킬 ‘불벼락’을 중심으로 갖가지 기운을 복잡하게 뒤섞어 극한대로 압축시킨 형태. 압축과 해방을 통해 다양한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파괴력과 폭발력이 대단하다.
* 화뢰(火雷)
소비된 마력에 비례해서 강렬한 폭발을 일으킨다. 때에 따라서는 높은 확률로 방어 결계도 부수며, 사방을 망가뜨려 상대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 지글거리는 불씨
압축된 힘 속에 전격을 가득 실어,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벼락을 퍼뜨린다. 그렇게 퍼져 나간 벼락은 화력을 더 먼 장소로 이동시키고, 연쇄 폭발을 일으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이후에도 쉽게 꺼지지 않는 불씨를 남겨 계속된 피해를 입힌다.
* 흑염강(黑炎罡)
극한으로 압축시켜 오러의 형태를 띠게 한다. 오러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고열로 인한 화상이 크게 남는다. 오러를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양의 마력과 심력을 필요로 하며, 제어가 실패할 시에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이 스킬은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타인에게 전수하는 데 성공할 시에 유니크 항목은 사라지고, 대신에 창조자에게 주어진 부가 혜택 옵션이 제공됩니다.
넘버링 002!
원래 빛의 파도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밀어내면서. 불의 파도가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