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독식자 (5)
[이곳은 27층, ‘망자의 강’의 관입니다.]
[대기실에 도착했습니다.]
연우는 푸른색 포탈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스테이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샤논의 잔소리가 머릿속으로 쏟아졌다.
「이 망할 주인 같으니!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연우는 샤논과의 연결 고리를 잠시 해제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더 큰 잔소리로 돌아올 것 같아 꾹 참았다.
「그리고 그렇다고 그런 불구덩이 속에다 날 던져 넣어? 젠장!」
“안 다쳤으면 되었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연우는 길길이 날뛰는 샤논을 뒤로 하고, 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둥근 막에 감싸인 아포피스의 독니가 나타났다.
실망감과 함께 전력을 다해 불의 파도를 터뜨렸을 때. 연우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았다. 그냥 빨리 치우고 올라가자는 생각에 무심코 검을 휘둘렀다가, 아포피스의 독니를 깜빡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자칫 히든 피스를 날릴 수 있어, 연우는 어쩔 수 없이 폭발 속에 샤논을 강제로 떠밀어 넣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발로 걷어차서 넣었다.
다행히 아포피스의 허물은 생명력이 끈질긴 편이었고, 연쇄 폭발 속에서 한참 사경을 헤매고 있던 중에 샤논이 명줄을 마저 끊고 독니를 수거해 올 수 있었다.
독니를 건진 것은 다행이지만, 멀뚱히 서 있다가 강제로 떠밀렸던 샤논으로서는 뿔따구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주종 관계 시스템상, 연우가 일으킨 폭발에 큰 피해는 입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샤논이 따지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연우는 다치지 않았으면 되었다는 말로 샤논의 항의를 무시하고, 아포피스의 독니를 확인했다.
[아포피스의 독니]
분류: 잡화
등급: ???
설명: 26층의 히든 보스, 아포피스의 허물에게서 채취한 이빨. 이빨 안쪽에 독샘이 숨겨져 있어, 이것으로 아티팩트를 제작할 경우 독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다른 별도의 기능이 숨겨져 있지만, 확인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조건을 충족하십시오.
**외부의 충격에 의해 크게 훼손된 상태입니다. 재료군에 속하므로 복구를 위해서는 뛰어난 대장장이의 솜씨를 필요로 합니다.
이번에는 왼손을 펼쳐 이미 수거해 놨던 다른 히든 피스를 꺼냈다.
붉은색으로 된 작은 구슬.
[라의 눈물]
분류: 잡화
등급: ???
설명: 26층의 성벽 중심부에 보관된 보물. 태양신 라가 아포피스의 서리 괴물들로부터 성을 지키기 위해 특별히 내린 신물이다. 현재는 너무 잦은 사용으로 신물로서의 기능을 거의 잃은 상태이다.
연우는 두 히든 피스에다 마력을 한껏 불어 넣었다. 쩌어엉. 맑은 소리를 내면서 환하게 빛을 내다가, 허용치를 벗어나자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래도 연우는 마력 부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두 히든 피스의 표면을 따라 균열이 조금씩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잘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 숨겨져 있던 본체가 드러났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구슬. 라의 눈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붉은 구슬이, 아포피스의 독니가 없어진 자리에는 푸른 구슬이 남았다.
[‘라의 눈물샘’을 획득했습니다.]
[‘아포피스의 독샘’을 획득했습니다.]
태양신 라는 마차를 몰면서 마물 아포피스의 꼬리를 쫓고, 아포피스는 라를 삼키기 위해 마차를 잡고자 한다. 때문에 낮과 밤이 차례로 생긴다는 신화는 히든 피스에도 그대로 묻어났다.
라의 눈물샘과 아포피스의 독샘은 서로 맞물리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 합쳐지면 신력을 품은 영약이 탄생했다.
찰칵-
일기장에 나와 있던 대로, 두 구슬에 작게 나 있는 홈을 따라 끼우자 무한대(∞) 모양의 구슬이 되었다.
[라의 눈물샘과 아포피스의 독샘이 합쳐져 ‘신과 악마의 샘’이 완성되었습니다.]
[신력과 마기, 두 속성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속성은 한 가지만 취사선택이 가능했다. 신력을 선택하면 라가 아포피스를 사냥했다는 뜻이었고, 마기를 선택하면 반대로 아포피스가 라를 삼켰다는 상징성이 있었다.
신력 혹은 마기를 생성하는 마력 기관. 비록 한계치는 있지만, 그래도 신관이나 계약자, 사도들로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용의 인자만 보유 중이었던 나로서는 선택하는데 상당한 애로 사항이 있었다.
동생과 아르티야는 26층을 열심히 수비하던 중에 우연히 어떤 히든 퀘스트를 받게 되었다. 이대로는 수성에 성공할 가망이 없으니, 원정대를 꾸려 서리 괴물의 원인을 레이드하자는 퀘스트.
이 와중에 라의 눈물샘과 아포피스의 독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신과 악마의 샘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때 동생은 섣불리 선택을 하지 못했다.
신력을 선택하자니 용의 인자만 보유하고 있는 그로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마기를 선택하려니 칼라투스가 으름장을 놓아서 도저히 그러질 못했던 것이다.
결국 동생은 당시에 가장 힘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아이테르에게 소유권을 넘겨 주고 말았다. 아이테르는 신력을 선택하고 섭취했으니. 이때부터 아이테르는 조금씩 아르티야의 틀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신력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네 실수였다.’
연우는 사람 좋기만 한 동생을 떠올리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다가, 신과 악마의 샘을 꽉 쥐었다.
어차피 그는 미리 정해 둔 것이 있었다.
“신력.”
[신력을 선택하였습니다.]
[‘신과 악마의 샘’이 ‘신의 샘’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아가레스가 당신의 선택에 불만을 품습니다.]
[헤르메스가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테나가 당신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냅니다.]
[아즈라엘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묘한 눈빛을 핍니다.]
이미 여러 신과 악마들의 반응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연우는 신의 샘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혀에 닿자마자 신의 샘이 사르르 녹으면서 목젖을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몸 안쪽에서부터 따뜻한 무언가가 일어났다. 피부 위로 새하얀 광채가 살짝 떠올랐다.
[잠들어 있던 신의 인자가 깨어났습니다.]
[인자 보유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더 많은 인자를 확보하여, 잠재된 신력을 깨워야 합니다.]
오래전, 브라함을 흡수하면서 일부 체내에 남았던 신의 인자가 처음으로 깨어나서 신력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미 마룡체를 구성하고 있는 용의 인자나 마의 인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 신의 인자는 별다른 특징을 드러내지 못하고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보유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균형치를 맞출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층계를 오르면서 꾸준히 신의 인자가 담긴 히든 피스를 삼키면 되는 것이니.
‘자, 그럼 이건 이만하면 되었고.’
연우는 몸을 가볍게 풀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26층에서 쌓였던 피로는 다 풀린 상태였다.
그가 있는 곳은 10평 남짓한 크기의 작은 방이었다.
침대와 작은 탁상, 의자, 그리고 벽에 단순한 액자가 하나 걸린 게 전부인 조촐한 방.
보통 스테이지에 처음 입장하면 스타트존이 등장하는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대기실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따로 떴다.
이곳이 바로 그 대기실이었다.
27층만 유독 다른 층계들과 시작이 다른 이유.
그건 지금부터 시작될 시련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보통 한 개의 시련, 한 개의 세상으로 구성된 저층 구간의 층계들과 다르게.
중층 구간부터는 커다란 하나의 시련과 세상을 두고, 작은 여러 시련을 따라 구획을 나누는 곳들이 있었다. 이런 작은 구획은 하나하나씩 층계를 이루면서 커다란 시련을 떠받치는 서브 퀘스트 역할을 맡았다.
27층부터 30층까지 이어지는 4개의 층계가 바로 그런 연계 시련의 첫 시작점이었다……
……10층을 기준으로 플레이어의 기량을 시험하는 탑의 정책에 따라, 30층에서는 27층부터 29층까지 플레이어들이 쌓은 업적을 최종 시험한다.
그러니 27층부터 29층까지 3개의 시련에선 한 치의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아래 층계에서 단추를 잘못 끼웠다가는 다음 층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최종적으로 30층에서 말도 안 되는 난이도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시련들. 이전처럼 완수만 하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으니, 우리로서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보통 플레이어들은 하나의 층계에서 하나의 시련을 완수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음 층계의 시련과 30층까지 이어지는 대시련까지 염두에 둬야 하니, 신경 써야 할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죽어라고 고생하면서 26층을 겨우겨우 통과한 플레이어들로서는 죽을 맛인 장소.
하지만 연우는 생각을 다르게 가졌다.
층계가 구분된다고 말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곳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튜토리얼.’
A구획부터 G구획까지 차례로 이어지던 7개의 스테이지. 이번에는 판이 조금 더 커졌을 뿐이고, 해야 할 일은 어차피 똑같았다.
더 높은 성적으로, 더 많은 것을 쟁취하면 된다.
연우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대기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대기실 바깥은 거대한 섬이었다.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섬. 지구의 열대섬처럼 고운 해변과 큰 야자수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지구에서처럼 산뜻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덥고 습한 건 똑같았지만, 바람은 숨이 막힐 것처럼 텁텁하고 바다는 푸른색이 아닌 잿빛이었다.
[27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모든 생명은 수명이 다하면 죽어 저승으로 건너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죽은 망자들이 그들의 안식처인 저승으로 가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을 홀로 건너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 신화에서 삼도천, 스틱스, 에레버스, 공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망자의 강은 언제나 풍랑이 거칠게 일고, 뜨겁게 끓고 있어 절대 단순한 방법으로는 건널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신은 망자의 몸이 되었습니다. 49일 안에 망자의 강을 무사히 건너세요. 제한 시간 안에 종착 지점에 도착하지 못할 시, 환생자의 자격을 박탈당해 평생 구천을 떠도는 유령 신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선 여러 위협으로부터 무사히 섬을 빠져나오십시오.]
제한 시간 49일.
마지막 종착 지점은 30층을 의미했다. 즉, 두 달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최소 3개 이상의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위해 몇 년씩 소비하는 플레이어들도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문제는 제한 시일이 넘어가면, 자격을 박탈당한다는 것.
즉, 더 이상 스테이지의 도전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20층과 마찬가지로, 30층에서 플레이어들이 대거 떨어져 나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대변하듯, 플레이어들은 망자의 강을 건너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림잡아 이 섬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대략 500여 명. 아마 여기 외에도 드넓은 바다, 아니, 바다 같은 강을 따라 여러 섬에서도 이와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안내가 필요한 것 같은 얼굴이로구만.”
그때,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연우는 몸을 돌렸다.
그곳엔 얼굴에 주름이 잔뜩 진 늙은 오우거 한 마리가 서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관리자를 상징하는 턱시도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다만, 등에 길게 매달고 있는 거대 망치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관리자이자 뱃사공인 카론. 혹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은가, 과객이여? 삶을 조금만 지불할 수 있다면, 아주 편하게 강을 건널 방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네만.”
카론은 제 딴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귓가까지 찢어진 입으로 웃어 봤자 송곳니만 훤히 드러나 무섭기만 할 뿐. 게다가 5미터는 될 것 같은 덩치가 성큼 다가오니 등에 매단 거대 망치가 더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축(丑)의 카론. 20층대를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 관리자들 중에서도 유달리 돈을 밝히는 수전노라고 알려져 있었다.
연우는 싱글벙글 웃는 그를 보면서 말했다.
“아니. 필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