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독식자 (7)
“헥토르!”
이브라모비치가 깜짝 놀라 헥토르에게 달려갔다. 마구잡이로 뜯긴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쉴 새 없이 벌컥벌컥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급히 포션을 꺼내 헥토르의 상처에 부었다. 하지만 상처는 좀처럼 낫질 않았다.
“이런 미친 새끼가아!”
헥토르는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연우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의 걸음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어느새 뾰족한 검 끝이 그의 미간에 놓여 있었다.
“허락 없이 타인의 신체에 접촉해선 안 된다는 건, 탑에서 당연한 상식일 텐데? 연대의 장이나 되면서 그런 것도 모르나?”
“너 이 새……!”
촤악-
연우는 가차 없이 마장대검을 휘둘렀다. 헥토르의 머리는 화가 난 얼굴 그대로 어깨에서 분리되어 땅바닥을 굴렀다.
졸지에 이브라모비치는 피를 홀라당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는 전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연우를 두려움에 젖은 눈길로 바라봤다.
그리고 독식자가 왜 독식자라고 불렸는지 떠올렸다. 단순히 히든 피스와 공적치를 혼자서 독차지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덤빈 자들까지 전부 먹어 치우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왜? 더 할 말 있나?”
“어, 없습니다.”
연우는 마장대검에 묻은 핏물을 가볍게 털어 내고, 허리춤에 꽂으면서 숲 쪽으로 걸어갔다.
이브라모비치는 공포심에 젖어 몸을 덜덜 떨었다. 죽은 헥토르의 시체에서 쏟아지는 핏물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 * *
날씨는 너무 텁텁하고 꿉꿉했다. 살갖은 따끔거렸고, 산소 농도도 너무 옅어서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마치 물속에 갇힌 듯한 기분. 피로도 금세 찾아왔다.
게다가 공기 중에는 알게 모르게 독성도 일부 섞여 있었다. 망자의 강이 증발하면서 대기에 영향을 끼친 건지. 섬에 오래 있으면 정말 육체가 망가지기 십상이었다.
‘제한 시간을 49일로 두는 것도 이해는 가. 이런 곳에서 계속 머물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27층에서 30층 사이에 계속 떠도는 플레이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제한 시간이 끝나거나 자격을 박탈당해 스테이지에 억류된 낙오자들은 어느 층계에나 다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망자의 강을 떠도는 무리들 중에 정상인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룡체로도 이렇게 독성에 영향을 받는데 일반 플레이어들은 오죽할까.
연우는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히 이쯤에 뭐 하나라도 있을 텐데?’
연우는 용마안을 활짝 열면서 찾고자 하는 것을 수색했다. 섬의 태반을 덮고 있는 숲은 열대 우림처럼 나무가 끝도 없이 크고, 빽빽하며, 바닥은 늪처럼 질퍽질퍽했다. 코브라나 독충 같은 것들도 우글거렸다.
‘찾았다.’
그러다 연우는 찾던 것을 발견하고 바람길을 밟으며 천천히 그 앞에 섰다.
주변에 있는 일반 나무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나무.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개의 줄기가 연리지처럼 서로 엮이면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우가 찾던 배의 첫 번째 재료였다.
‘망혼목.’
망자의 섬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하나같이 탄탄한 결을 자랑한다. 그래서 아주 튼튼한 목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배의 재료로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었지만.
보통 사람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망자의 강은 그마저도 녹일 정도로 지독한 산성을 띠고 있다는 것. 자칫 배를 띄웠다가 도중에 침몰하는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처음 타고 나간 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침몰한 덕분에, 다시 섬으로 돌아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잔머리를 계속 굴린 끝에 한 가지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망자의 강물에 목재가 녹는다면, 녹지 않는 목재를 찾으면 되는 거였지.’
정확하게는 망자의 강물에 대한 내성을 갖고 있는 나무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연우가 찾은 망혼목이 바로 그것이었다.
섬에도 아주 작은 강이나 지하수가 흐르기 마련. 하지만 이 중 일부만 섬 안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다른 일부는 망자의 강과 통해 있기 때문에 성질이 똑같았다. 연우가 찾는 건 망자의 강물을 흡수하는 나무들, 망혼목이었다.
망혼목은 겉보기로는 전혀 분간할 수 없다. 하지만 나무 주변으로 으스스한 음기가 언제나 맴돌았다. 원혼이 섞인 강물을 먹고 자란 탓에 저절로 원기(怨氣)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돌연변이를 일으키기도 했으니.
키아악!
망혼목은 연우가 마장대검을 뽑고 접근하자, 갑자기 몸을 크게 흔들더니 줄기 한가운데를 갈라 열면서 쭉 찢어진 이목구비를 드러냈다.
촤라락-
나뭇가지가 출렁거리면서 수십 개의 넝쿨이 채찍처럼 날아왔다. 표면에 가시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고, 원기를 따라 독기가 잔뜩 뿜어져 나왔다.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바위쯤은 쉽게 으스러뜨릴 것 같았지만.
화르륵-
녀석에게는 안타깝게도, 연우와는 상극이었다. 성화가 도깨비불처럼 피어오르면서 내리꽂혔다. 독기가 단번에 타오르면서 나뭇가지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키에엑!
망혼목은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연우는 마장대검을 비스듬히 세우면서 앞으로 휘둘렀다.
스걱-
* * *
“부장!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환상연대의 제92단, 과거에는 트리 이미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클랜은 모두 충격에 잠기고 말았다.
처음 클랜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환상연대에 가입하기까지. 헥토르는 강압적인 성격이긴 해도, 클랜원들에게는 충실한 우산이 되어 줬던 사람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환상연대 내에서 제1단의 자리도 차지하자는 포부도 함께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머리가 잘린 채로 돌아왔다. 이브라모비치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부장!”
클랜원들이 한참 동안 부른 뒤에야, 이브라모비치는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퀭하게 내려앉은 눈 밑의 다크서클이 더 짙어졌다.
그런데 여태껏 유약해 보이던 인상과 다르게,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소름 끼치는 형상을 떴다.
“……나도 들리니까 소리 지르지 마.”
“죄, 죄송합니다.”
클랜원들은 주춤거리면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언제나 겁을 잘 먹는 부장이었지만. 한 번 불이 붙으면 헥토르도 어떻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포악했다. 이중인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92단이 다른 클랜들에 비해 비교적 작은 전력을 가지고도 연대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부장의 그런 면모 덕분이었다.
투 페이스. ‘두 개의 얼굴’이란 뜻을 가진 별칭으로, 한때 암흑가에서 이름을 떨쳤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헥토르를 이렇게 만든 놈은 독식자다.”
“……제길.”
“그놈이, 또.”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장? 아무리 녀석이라고 해도 재료를 모으기 위해 정신이 팔린 지금이라면……!”
“아니. 일단은 때를 기다린다.”
이브라모비치는 수하들의 재촉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녀석은 강해. 놈이 26층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벌써 잊어 먹은 건 아니겠지?”
“…….”
“…….”
환상연대는 어느 층계에나 눈을 두고 있다. 여러 클랜이 가입했기 때문에 인력도 그만큼 많아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정보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연대원들 사이에 공유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렇기에 연우가 26층에서 벌인 활약도 전해졌다. 서리 괴물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뛰어들고, 결국 설산을 넘어 히든 보스였던 아포피스의 허물까지 잡았다는 내용. 시련도 단 이틀 만에 끝났다고 했다.
헥토르는 이것을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치부했지만, 이브라모비치는 달랐다.
서리 괴물은 강했고, 그들을 뚫고 지나간다는 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도 이미 26층을 통과해 왔지만, 정말 죽어라 고생을 해야만 했다. 거기서 죽은 클랜원들도 제법 많았다.
“이번에는 헥토르가 실수했어. 병신 같은 놈. 그렇게 기분에 휘둘리고 다니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었는데.”
이브라모비치는 멍청했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였던 녀석의 죽음에 분개했다.
“게다가 ‘위’에서 되도록 독식자를 포섭하라는 명령도 있었어. 그러니 최대한 충돌은…… 피한다.”
클랜원들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확실히 환상연대에서는 이참에 독식자를 포섭하기를 바라니, 그를 발견하면 좋게 대우하고 상부에다 따로 연락하라는 지시 사항을 하달하기도 했다.
헥토르는 평소 하던 대로 하다가 당한 것일 뿐. 원래 92단에서는 연우와 이런 식으로 인연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부장,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멍청하긴. 그럼 설마 내가 정말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위에서 지시했다고 그대로 따르면 너희들에게 나중에 무슨 욕을 먹으라고?”
클랜원들의 눈이 커졌다.
이브라모비치는 차갑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를 써야지. 연대라는 좋은 배경을 뒀으면, 그만큼 배경을 이용해 먹어야지 않겠어? 우린 아직 가입비도 제대로 못 뽑아냈다고. 아, 마침 저기 오는군.”
그때, 숲에 들어갔던 클랜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독식자는?”
“독식자는 지금 한창 재료를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모으고 있는 것들이…… 좀 이상합니다.”
“어떻길래?”
“나무들 중에 간혹 줄기를 휘두르던 망혼목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들을 주로 베어 내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상한 몬스터들을 주로 사냥 중이어서…….”
“히든 피스일 거다. 1층부터 줄곧 스테이지 랭킹 1위를 밥 먹듯이 하던 인간이었으니, 공적치도 넘쳐 나겠지. 아마 카론에게 의뢰한 배도 가장 급수가 높은 것일 거야.”
뱃사공 카론이 만들 수 있는 배는 모두 30여 개. 이중 92단이 모은 돈으로 의뢰한 배는 중상급이 고작이었다.
물론, 수백 명이나 되는 대인원을 모두 태우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배를 건조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하지만 녀석은 홀몸이니 배도 혼자서 띄울 수밖에 없을 거다. 그때는 어떻게 될까?”
“아.”
“그런 방법이!”
클랜원들은 뒤늦게 이브라모비치의 생각을 깨닫고 무릎을 손으로 탁 치면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망자의 강은 강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넓다. 그런 곳에 배를 띄우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키를 잡을 조타수, 방향을 가능할 항해사, 각종 잡일을 맡을 선원, 때에 따라서는 칼을 쥐어야 하는 칼잡이와 노잡이 등등.
하지만 독식자 혼자 배를 띄워서는 그 많은 역할을 감당하기 힘들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여러 개’의 배에 둘러싸이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싸울 수야 있을 것이다. 녀석의 실력이라면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뒤에는? 독식자의 배도 같이 망가져 버리고 만다면? 그때는 끝장이었다. 섬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에서 그런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더 큰일일 것이다.
이브라모비치는 그때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참아라. 섬에서 한참 떨어진 곳. 도저히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적들에 포위를 당한다면 녀석도 도저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혼자서 열 손을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니. 저쪽은 혼자였고, 이쪽은 오백이나 되었다.
게다가 상부에서는 분명히 말했었다. 독식자를 발견하면 즉각 연락하라고. 그런다면 따로 사람을 보내겠노라고.
그렇다면 연대의 랭커들도 참여할 게 분명했다.
아마 독식자의 배를 둘러쌀 배는 한두 척이 아닐 것이다. 최소 열 척, 많게는 수십 척에 달할 테지.
그리고 그때는.
‘인장을 박아 버리면 된다.’
이브라모비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환상연대에서 머릿수를 부풀리는 법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했다.
플레이어들이 그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강제로 연대에 가입한다는 내용이 담긴 인장을 박는 것이다. 악마에게 맹약하는 인장이라면. 독식자라고 해도 옴짝달싹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이 섬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도, 인장이 박히면서 환상연대에 강제로 가입이 된 상태였다.
‘독식자를 우리 92단에 가입시킨다면…… 당연히 값어치도 상승하겠지. 10단 안에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연대에 가입된 클랜이라고 해서 모두 서열이 동등한 것이 아니다. 낮은 숫자일수록 더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된다.
특히 10단 안의 클랜들은 원래 환상연대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한창 탑을 시끄럽게 울리던 신예들이었다.
그중 하나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0단이 안 되더라도 30단 안에는 들 수 있을 거란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럼 일단 상부에다 연락부터 취해. 너희들은 독식자보다 배가 더 빨리 건조될 수 있게 카론에게 뒷돈이나 찔러 넣고.”
클랜원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쿠쿠쿵!
서른한 번째 망혼목이 힘을 잃고 옆으로 기울어졌다.
연우는 아주 능숙하게 필요 없는 가지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결을 따라 길게 베어 내어 인트레니안에다 던져 뒀다.
「그런데 주인, 대체 무슨 배를 만들려고 그래? 다른 사람도 없이 망자의 강에다 배 띄울 수 있겠어?」
그때, 샤논이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27층을 통과해 본 적이 있던 그로서는 연우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갖은 고생 끝에 겨우 통과했던 곳이 망자의 강이었으니. 한령도 말은 없어도 같은 생각이었다.
연우는 피식 웃었다.
“선원이 없긴 왜 없어?”
「응?」
“내가 만들려는 배의 컨셉이 뭔지 아나?”
「뭔데?」
“유령선.”
샤논은 그제야 연우의 말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잡무는 자신들의 몫인 모양이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