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독식자 (9)
하지만 샤논은 녀석들이 딱히 불쌍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강화된 감각은 섬에 있는 수많은 정보들을 가져다주기 마련이었다.
그중에는 망자의 강에서 연우를 어떻게 해보겠다면서 92단이 작당 모의를 하는 내용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굳이 녀석들을 응징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차피 녀석들이 날뛰어 봤자 손바닥 위였으니까. 어쩌면 식인왕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었는지도 몰랐다.
뭐가 어찌 되었건 간에 녀석들이 무사히 섬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샤논은 녀석들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보다 연우가 기대한다는 식인왕이 어떤 실력을 지니고 있을지. 그게 궁금했다.
* * *
“카론이 보이지 않습니다.”
“젠장. 평소에는 그렇게 돌아다니더니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오란트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92연대의 조장을 맡고 있는 그는 몇 시간째 섬에 모습을 비치지 않는 카론 때문에 속이 끓을 지경이었다.
필요한 재료도 모두 모았으니 배를 건조해야 하는데. 그걸 맡아 줄 관리자가 코빼기도 비추지 않으니 짜증이 단단히 난 것이다.
게다가 수하들이 확인하기로, 독식자는 지금 한창 재료를 수급하는 데 박차를 가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녀석이 배를 의뢰하기 전 카론에게 먼저 접근을 해야 하건만. 아니, 가능하다면 독식자의 배는 최대한 뒤로 미룰 수 있도록 손을 써야만 했다.
수전노라고 불릴 정도로 돈을 밝히는 카론이니 충분히 뇌물로 구워삶을 수 있을 거란 계산도 있었다. 이미 뇌물에 필요한 공적치는 휘하의 플레이어들을 강제로 쥐어짜서 확보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것도 뇌물을 먹일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 정작 당사자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귀찮게 사람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더니. 정작 이쪽이 필요할 때에는 귀신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더구나 오란트로서는 이 일을 말끔하게 처리해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헥토르가 죽은 마당에, 이브라모비치가 연대장이 될 건 뻔하니. 공석이 될 부대장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조장들 간의 경쟁에서 가장 먼저 우위를 확보해 두고 싶었다.
“카론이 이따금 섬 반대쪽에 있는 호수에서 낚시를 즐긴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혹시 거기로 간 건 아닐까요?”
“낚시?”
오란트는 갑작스러운 수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방금 전에 수하 녀석이 어떤 플레이어에게서 들었답니다. 주로 이 시간에 그쪽으로 가는 걸 봤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그딴 건 미리 말해야 할 거 아냐! 괜히 너 때문에 헛걸음만 했잖아!”
오란트는 화가 단단히 난 나머지 수하의 정강이를 강하게 후려 찼다. 수하는 무릎을 땅에 찍을 정도로 크게 휘청거렸지만, 이를 악물었다. 이럴 때는 오란트의 화가 풀릴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훨씬 나았다.
오란트는 가만히 서서 겨우 분을 삭이며 물었다.
“그래서? 그 호수가 어딘데?”
“숲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혹시 식인괴인의 영역은 아니지?”
“맞는 듯…… 합니다.”
“젠장. 또 저곳을 들어가라고?”
오란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섬에서 배의 재료를 수급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식인괴인이었다. 사냥을 하면 골치만 아파지는 존재. 그렇다고 그냥 피해 다니기에는 너무 집요해서 상대하지 않을 수도 없는 놈들이었다.
상부에서도 누누이 말했었다. 27층을 가장 쉽게 돌파하는 방법은 제사장을 자극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식인괴인을 최소한으로 제거하며 배의 재료를 수급하는 것이라고.
페이스 조절만 잘한다면, 힘겹게 수성을 해야 했던 26층에 비해 훨씬 쉽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 뒤는.
‘연대에서 책임져 줄 거라고 했었지.’
섬은 무작위로 선택되기 때문에 환상연대에서 도와주지 못한다. 하지만 섬을 떠나 망자의 강을 건너는 28층부터는 달랐다. 환상 연대에서 얼마든지 개입을 할 수 있었다.
환상연대는 여러 클랜들이 수평적으로 합쳐진 곳인 만큼, 상위 층계에 있는 클랜들이 하위 클랜들의 손을 잡아끌어 주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수많은 배들이 돌아다니는 망자의 강은 넓은 만큼 여러 클랜들이 쉽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브라모비치도 이 사실을 알기에 망자의 강에서라면 얼마든지 독식자를 겁박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고.
여하튼 그렇기에 식인괴인이 득실대는 숲 안쪽으로 가는 것은 영 꺼림칙하기만 했다. 목재를 한창 수급할 때에도 녀석들이 나타날까 싶어서 수시로 경계를 서게 했었는데. 또 그 짓을 해야 하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결국 오란트는 이를 바득 갈면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수하에게 턱짓을 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공략대를 꾸려라. 숲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타 클랜에게도 협조하라고 해.”
그제야 살짝 꺼멓게 죽었던 수하의 안색도 다시 밝아졌다.
“예!”
* * *
‘협조’라는 표현과 다르게. 타 클랜의 플레이어들은 공략대에 참여하라는 92연대의 통보에 가까운 요청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또……!”
팀 트리니티의 수장, 하이디는 이를 악물었다. 감정 표현이 언제나 저조하다는 엘프답지 않게 그녀는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튜토리얼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팀을 이끌었던 델란과 쥰도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똑같았다.
“이건 완전히 우리더러 알아서 묏자리로 걸어가라는 소리와 뭐가 달라.”
“제기랄. 차라리 확 뒤집어 버릴까?”
소심한 성격인 델란이 분을 삭이고, 차분한 편인 쥰도 표정이 좋지 않을 정도로. 섬에 들어온 뒤 계속 이어지는 통보는 그들의 속을 썩게 만들었다.
현재 섬에는 500명이나 되는 인원이 몰려 있는 만큼, 소속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 92단이나 팀 트리니티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92단은 환상연대를 등에 업으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머릿수도 200명으로 섬에 있는 인원의 절반에 가깝기 때문에 타 클랜들을 억누를 수 있었고, 필요할 때마다 강제로 동원하기도 했다.
특히 식인괴인이 주로 출몰하는 지역에는 협조라는 명분으로, 그들을 대신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그 때문에 다른 소수 클랜들이 받은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궤멸된 팀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제 겨우겨우 재료를 다 모아서 쉴 수 있나 했더니. 또 식인괴인 지역으로 들어선다고 한다. 복장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하이디는 차라리 다른 클랜과 팀에 접촉해서 확 뒤엎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카론만 찾으면 된다고 하니 수색도 금방 끝날 테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빈번하게 동원되는데, 앞으로 배의 노잡이나 조타수 같은 잡일에 누가 이용될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주도권을 되찾아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엘프 출신인 그녀로서는 쉽게 하기 힘든 공격적인 판단이었지만. 탑에 오르면서 겪은 여러 우여곡절은 그녀의 천성도 바뀌게 만들기 충분했다.
델란과 쥰도 혹한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계속 당하기만 할 테니. 먼저 선수를 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차라리 독식자에게 부탁하면……!’
하이디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먼발치에서 어렴풋이 봤던 가면인. 독식자. 저쪽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자신은 그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래도 그걸 두고 사정을 한다면 작게나마 도움을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아닙니다, 대장.”
“괜히 저희 때문에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팀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든 끝까지 해 보겠다는 또렷한 의지가 눈동자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이디는 그들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10명 내외의 인원들. 델란과 쥰처럼 이들도 이제 그녀에게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11층에서 벌어졌던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 당시. 외부 용병을 뽑는다는 소식에 하이디 등은 용돈이나 벌어 보잔 생각에 외인부대에 자원했고, 2조에 소속 되었다. 독식자는 당시에 2조의 조장이 되었었다.
지금 팀원들도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전쟁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났고, 조장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뭘 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해체될 것 같아 전전긍긍하던 차에, 마침 마음이 맞았던 이들끼리 나와서 따로 팀을 일구게 되었다.
그리고 팀의 수장은 알게 모르게 팀을 이끌고 있던 하이디가 자연스레 맡게 되었다.
하이디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그래도 한 번 맡고 난 뒤에는 곧잘 팀을 이끌었다.
특히 힘겨웠던 26층의 시련에서 벌인 사투는 흐트러지던 팀원들을 다시 단단히 결속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하이디도 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태 꾹 참고 있던 그녀가 반란을 생각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미 희생된 팀원만 셋. 더 이상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그런 하이디의 생각을 알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괜히 분란을 일으켰다가는 공략에 실패만 겪는다. 조금만 더 참자는 게 그들의 중론이었다.
결국 하이디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팀원들의 말도 일리는 있었으니까. 여기서 92연대와 싸워서 어떻게 이긴다고 해도, 앞으로 환상연대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요원한 일이었다.
“……차라리 독식자에게 접촉을 해 보는 건 어떨까?”
델란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손을 번쩍 들면서 의견을 내 놓았지만. 옆에 있던 쥰이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힘들 거다. 여태 봤으니 알고 있잖아? 그 사람은 자기 이익에 집중할 뿐, 타인의 일에는 철저히 무관심해. 오히려 귀찮다면서 우리를 묶어다 92연대에다 넘기지 않으면 다행이지.”
“서,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델란은 그래도 예전 인연이 있으니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확신하지 못했기에 목소리가 떨렸다.
결국 생각을 끝낸 하이디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정했으면 움직이자. 또 괜히 늦어서 책잡혀서는 안 되니까.”
멤버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창백해져 있었다.
* * *
“오! 우리 사랑하는 하이디. 그새 내가 보고 싶어서 오셨나? 막 여기저기가 으슬으슬하지? 응?”
하이디는 오란트와 마주치자마자 날아오는 성희롱에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달리 내색하지 않으면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인원은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어서 움직이시죠.”
원래 성격이 급했던 그녀가 최근에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감정 표현을 최대한 절제하는 게 아닐까. 그녀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 팀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오란트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혀를 찼다.
“비싼 척 굴기는. 오냐. 언제까지 그렇게 네년이 도도한 척 굴 수 있나 한번 보자.”
오란트의 목표가 있다면 언제나 자신 앞에서 차가운 표정을 짓는 하이디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 거였다.
그녀가 아끼는 동료들 앞에서 능욕을 할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는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30여 명으로 이뤄진 공략대가 숲 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두와 측면은 타 클랜과 팀이, 중앙과 후방은 92연대가 맡는 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뒤에서 92연대가 타 플레이어들을 창칼로 위협하면서 전진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숲 속의 공기는 눅눅하고 텁텁했다. 다만, 알게 모르게 평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추위.
아니, 정확하게는 오한이라고 해야 할까.
오란트는 공략팀에 둘러싸여 비교적 편하게 움직였지만,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인상을 찡그렸다.
“이봐, 길잡이. 여기 맞아?”
“예? 예! 마, 맞습니다.”
“……뭐야, 이거 대체.”
오란트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마구 일그러졌다.
“뭐지? 하루 사이에 공기가 왜 이렇게 달라진 거야?”
오란트는 감지 계통에 있어 뛰어난 특성을 갖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면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코끝에서 느껴지는 냄새가 평소와 달랐다. 습기가 가득 찬 냄새. 그 속에 비릿한 피비린 내가 살짝 섞여 있었다.
‘여기서 전투가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었는데……?’
결국 오란트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불안할 때에는 나서지 않는 게 상책.
공략팀원들의 얼굴에 바짝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뭔가 이상하단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오란트는 옆에 있는 수하에게 턱짓을 했다. 선발대를 앞으로 보내서 조사하라는 의미였다.
“너! 너! 너! 앞에 이상 현상 없는지 확인하고 와.”
지목당한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무사하기 힘들 때가 많았지만. 가지 않는다고 하면 92단의 창칼이 먼저 그들의 목젖을 꿰뚫을 것 같았다.
결국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앞쪽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란트와 공략팀원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뭔가 있다.
“하이디 팀장, 아무래도 가 줘야 할 것 같은데.”
오란트는 하이디를 돌아봤다. 어떻게 손을 대고 싶은 계집인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하이디는 꽤 실력이 있으니 이상 현상이 있으면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거란 믿음도 있었다.
하이디는 이런 경우를 이미 몇 번씩 겪어 봤기에 별다른 말 없이 델란과 쥰, 그리고 발이 날랜 몇 명의 팀원들만 데리고 전방 수색을 시작했다.
오란트만큼 감각이 날카로운 하이디도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세 구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서 수색에 나섰던 플레이어들이었다.
“우에엑!”
“저, 저럴 수가.”
“……하이디.”
사체의 상태가 좋질 않았다. 델란이 인상을 굳히면서 하이디를 돌아보는데.
“잠깐. 기다려.”
하이디는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그를 제지하고, 고양이같이 날렵한 발걸음으로 조용히 시체에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뭔가, 이상해.’
시체들의 상태는 평소 식인괴인들에게 당하던 것과 달랐다. 머리가 반쯤 부서지고, 몸뚱이는 뭔가에 씹혀 너덜너덜해진 나머지 형체를 좀처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식인괴인의 평소 사냥 습관은 절대 이렇지 않았다. 녀석들은 이름처럼 식인 습성이 있었기에, 사냥감으로 여긴 플레이어를 되도록 온전한 형태로 잡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건.
‘꼭 장난감처럼 갖고 논 것 같은…….’
문제는 사체를 이렇게 만들 정도로 과격하게 난리를 쳤는데도 불구하고. 이쪽에서는 전혀 감지하질 못했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식인괴인의 습성이 평소와 달리 크게 변해 있었다.
그 순간.
키에엑!
키에! 키에엑!
식인괴인들이 사냥을 시작할 때 내는 울음소리가 숲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사냥감을 긴장시키기 위해 내는 습성.
하이디는 그 속에서 다른 뭔가를 추가로 느낄 수 있었다. 흥분. 초조. 긴장. 녀석들은 뭔가에 잔뜩 취해서 날뛰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쐐애액-
“전부 전투 대형 준비!”
하이디는 감지된 식인괴인들이 이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자 마자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성을 잃은 녀석들이 어떤 모습일지는 모른다. 최대한 긴장해야만 했다.
그때. 추가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섬 어딘가에서 다량의 식인괴인들이 죽었습니다.]
[제사장이 이 사실을 깨닫고 원통함에 잠겼습니다. 제사장의 명령에 따라 하위 신관들이 그들의 명복을 비는 축원문을 외기 시작했습니다.]
[시련의 난이도가 상승합니다.]
[‘식인마인’의 출몰 빈도가 더 잦아집니다.]
[‘식인마물’이 출몰합니다!]
……
[‘식인마괴’가 출몰합니다!]
“무, 뭐?”
“미쳤……!”
멤버들은 하나같이 경악했다.
하이디의 표정도 새하얗게 질렸다.
‘이거였어!’
공기가 달라진 이유. 식인괴인이 어디서 다량으로 사살되면서, 다른 식인괴인들의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쿠쿠쿠-
곧 숲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광기에 미쳐 날뛰는 식인괴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녀석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와 나무 사이를 건넜다.
멤버들이 바짝 긴장하면서 반사적으로 위쪽을 향해 스킬을 전개하려는데.
『건드리지 마! 최대한 자세를 낮춰!』
갑자기 하이디가 메시지 마법으로 소리를 질렀다. 멤버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지축이 요동치고, 나무가 부서질 것처럼 크게 흔들렸지만. 그들은 숨소리조차 최대한 죽이면서 식인괴인들의 대이동이 멈추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하이디는 식인괴인들 사이로 지나는 거대한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5미터는 될 것 같은 크기의 유인원. 요동치는 살기가 대기를 휘게 만들 정도였다.
식인마물. 녀석 주변으로 얼굴이 새카만 식인괴인들이 보호하듯이 서 있었다. 식인마인이었다. 그러다 하이디는 고개를 아래쪽으로 돌리던 식인마물과 눈이 마주쳤다.
하이디는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요정안〉. 엘프 특유의 종족 스킬이 발동되면서 녀석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식인마물은 여태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강한 기의 파장을 지니고 있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강했다. 지금 섬에서 제법 강하다며 콧대에 힘을 주고 다니는 오란트나 이브라모비치 따위는 맨손으로 가볍게 찢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히 하이디와 멤버들은 가볍게 짓밟을 수 있을 테지만. 식인마물은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앞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가던 길을 마저 지났다.
그렇게 대이동이 끝난 뒤.
하이디와 멤버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뭐야, 저 괴물은 대체……!”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델란이 숨을 헐떡이며 겨우 내뱉은 말이 정적을 깼다.
그러다 돌연 하이디가 허리를 쭈뼛 세우면서 튕기듯이 일어섰다. 멤버들은 왜 그러냐는 얼굴로 돌아봤다. 하이디의 표정은 딱딱했다.
“식인괴인들이 가고 있는 곳. 공략팀이 있는 방향이야. 멤버들이 위험해!”
“……!”
“……!”
멤버들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공략팀 본진에는 두고 온 멤버들이 있었다. 그들을 구하러 가야만 했다.
특히 하이디는 식인마물의 강렬한 기세를 잊을 수가 없었다. 요정안으로 봤던 식인마물과 식인 마인은 절대 저층 구간에 있어서는 안 될 개체값을 지닌 놈들이었다.
거기 있는 공략팀으로는 절대 사냥할 수 없었다. 여기에 이브라모비치도 껴야 겨우 잡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개체였다.
‘서둘러야 해!’
“하이디!”
하이디는 멤버들의 다급한 부름을 뒤로 하고, 바람의 정령을 불러 먼저 공략팀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곳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처럼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플레이어들과 식인괴인들 간의 전투가 벌어져 곳곳이 파이고 무너지는 등, 폐허가 된 상태였다.
오란트는 이미 상체가 박살 나다시피 하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유독 하이디의 예상에서 빗나가 있었다.
‘뭐야, 저건……?’
모두가 죽어 식인마물이 크게 으르렁거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자리에.
오히려 식인마물은 머리가 부서진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대신에 그 위에 검은 그림자 같은 괴물이 피로 칠갑을 한 채 일렁이고 있었다.
콰득.
콰드득-
괴이가 하늘을 보며 길게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