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70화 (270/862)

20화. 독식자 (10)

‘뭐야, 저거……?’

괴이를 본 순간. 하이디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검은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양초 그림자가 살랑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존재.

저절로 떠진 요정안에는 똑똑하게 보였다. 그건 산 자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처음에는 언데드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딱 잘라 규정하기는 어려웠다.

언데드는 말 그대로 언데드(Undead), 죽지 않는 존재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저주를 받아 죽을 수 없게 된 이들. 혹은, 아예 처음부터 다르게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달랐다.

언데드도 결국 법칙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저 그림자 형태를 띤 괴물은 아니었다.

마치 혼자 세상에서 유리된 것 같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혀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법칙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요정안으로 엿보이는 법칙을 절대 진리로 믿고 살았던 하이디로서는. 너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크르르-

식인마물의 뇌수를 파먹고 있던 괴이가 누군가의 시선을 읽고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하이디는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저 그림자 괴물이 당장에라도 자신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하이디!”

“대장!”

그때, 식인마물 등의 기습에서 살아남았던 멤버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뛰어왔다. 뒤쪽에서 델란과 쥰 등도 달려오고 있었다.

하이디는 위험하다며 동료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쉭!

괴이는 플레이어들이 접근하기 전에 어딘가를 보더니 훌쩍 뛰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헉! 헉! 하이디, 괜찮아?”

델란은 하이디를 붙잡으면서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하지만 하이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요정안을 부릅 뜬 채로 괴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 *

“이, 이거 대체 뭐야?”

“아아악!”

괴이의 등장으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하이디 일행 쪽과 다르게.

이브라모비치가 있던 92단의 본진은 갑작스레 폭탄을 껴안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광기에 취해 마구잡이로 날뛰는 식인괴인과 식인마인, 식인마물의 준동은 어떻게 막을 수 있는 수준의 재앙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은 식인괴인에게 줄줄이 죽어 나갔고, 제법 실력이 좋았던 자들은 식인마인에게 물어 뜯겨 삽시간에 걸레 쪼가리가 되고 말았다.

식인마물은 그냥 걷기만 했다.

쿵.

쿵.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축이 크게 요동쳤다. 녀석은 붉은 눈을 번들거리면서 뭔가를 찾아 숲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녀석의 앞을 가로막던 풀숲은 그대로 짓눌리고, 나무는 부러져서 옆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이브라모비치는 식인마물에게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늘이 잔뜩 진 바위 아래. 그는 혹시 식인마물이 무슨 소리라도 들을까 싶어 숨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으스러지다시피한 오른팔이 욱신거렸지만, 등골을 타고 흐르는 공포감이 고통을 마비시키는 중이었다.

‘독식자……! 독식자!’

이브라모비치는 이딴 사태를 만들어 낸 연우를 떠올리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난이도가 상승했다는 전체 메시지와 함께 등장한 식인마물과 식인마인은 그가 하려던 모든 계획을 삽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92단을 이루던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벌레처럼 줄줄이 죽어 나갔다. 짓밟혀 죽고, 휘두르는 주먹에 날아가 죽고, 심심풀이 장난감으로 갖고 놀려지다가 죽었다.

어떻게든 막아 보고 싶어서 달려들었지만. 식인마물은 한쪽 손가락만 부러졌을 뿐, 그에 반해 이브라모비치는 오른팔이 통째로 박살나야만 했다.

어찌어찌 몸을 빼내 숨긴 했지만 식인마물은 화가 단단히 났는지, 주변을 샅샅이 뒤지면서 이브라모비치를 찾아 대는 중이었다.

코를 예민하게 킁킁대는 것으로 봐서는 냄새를 맡아 다가오려는 것 같았다. 즉시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냄새를 지우긴 했지만, 그래도 모든 기척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점차 간격이 좁혀지고 있으니. 아마 이곳도 녀석의 눈에 띌 게 분명했다.

그 전에 어떻게든 섬을 빠져나 가야만 했다.

‘배! 배를 타야 해!’

사실 이브라모비치는 수하들 몰래 재료를 빼돌려서 꿍쳐 둔 배가 있었다. 비록 조막만 한 나룻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카론이 만들어 준 덕분에 한 몸을 싣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이브라모비치는 아예 섬을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식인마물이 등장한 이상, 섬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최대한 빨리 탈출해, 연대를 만나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미 상부와 연락은 끝났다. 좌표를 찾아서 가기만 하면 돼!’

이브라모비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희생되고 있는 수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결국 누구 하나는 섬을 탈출해서 구조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니, 책임자인 자신이 그렇게 조금이라도 빨리 구조대를 데리고 오는 게 수하들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나룻배를 꿍쳐 둔 창고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가시넝쿨로 잘 가려 놨기 때문에 외관상으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제발, 제발.’

이브라모비치는 감각을 잔뜩 세워 주변을 살폈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진다 싶더니 사라졌다. 지나친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그는 어느새 혼자서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떻게 판단을 내리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었다.

쐐애액-

〈속질풍(速疾風)〉. 이럴 때를 위해서 비싼 값을 주고 구매한 스킬이었다. 한순간 폭발적인 가속도를 일으켜서 위험한 자리를 탈출하는 데 요긴하게 쓰일 수 있었다.

다량의 마력을 너무 한꺼번에 소진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목표점으로 삼은 곳에 다다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식인괴인들이 다급하게 뒤쫓아오는 게 느껴졌지만, 금세 따돌릴 수 있었다.

‘됐다!’

이브라모비치는 자신의 성공을 확신했다. 식인괴인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그들의 영역을 벗어나면 행동이 굼뜰 수밖에 없었다. 식인마물은 식인마인들을 대동하고 완전히 사라져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 멀리,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식인괴인의 영역과 아닌 곳을 구분하기 위해서 임의로 표시해 놨던 곳. 나룻배가 숨겨진 넝쿨은 여기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나오는 또 다른 바위 지대에 있었다.

‘살았……!’

이브라모비치가 기쁨에 겨워 바위에 다다르려는 순간.

쾅!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커다란 그림자가 덮쳐 온다 싶더니 바위를 가볍게 부쉈다.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돌 조각 사이로 우악스러운 손길이 뻗쳐 나와 이브라모비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식인마물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브라모비치는 그런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러다 식인마물의 왼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핏덩이를 볼 수 있었다.

피떡이 되어서 쉽게 알아볼 수 없지만, 분명히 항상 자신의 옆을 지키던 수하가 분명했다.

“대…… 장…… 미안…… 합…… 니!”

말꼬리가 흐트러졌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 몰래 파악하고 있었던 나룻배의 위치를 말한 건지, 아니면 경계선을 말한 건지는 몰랐지만. 녀석이 자신의 행적을 노출시킨 게 분명했다.

그리고.

“찾았다, 쥐새끼.”

식인마물이 내뱉은 말은 이브라모비치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공포심이 무럭무럭 자랐다.

‘마, 말을 한다고?’

쾅!

“컥!”

식인마물은 이브라모비치가 놀라건 말건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멱살을 잡은 그대로 바닥에다 패대기쳤다.

이브라모비치는 전신이 박살 나는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갖가지 스킬을 전개해서 쏟아부었지만.

퍼퍼펑-

‘빌어먹을…… 항마력.’

대부분의 스킬은 식인마물에게 닿기도 전에 투명한 보호막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식인마물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거였다. 우악스러운 완력만큼이나 뛰어난 체력과 방어력, 그리고 항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웬만한 플레이어 따윈 가볍게 찜 쪄 먹을 수 있었다.

쾅, 쾅, 쾅-

“으히히! 으히!”

식인마물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이브라모비치를 바닥에다 몇 번씩이나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이브라모비치는 팔다리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파열 되었다. 두개골이 부서지면서 시야가 흔들렸다. 피로 얼룩져 앞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 걸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브라모비치는 그런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버티고 싶었지만. 이미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은 아무것도 잡히질 않았다.

그러다 이브라모비치는 정신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 자신이 튕겨 나가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는 어느새 땅바닥을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그러다 한참 뒤 겨우 눈을 떴을 때. 그는 식인마물이 형체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어떤 검은 그림자 같은 것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 식인마물은.

“괴물! 괴물! 사라져라! 사라져어! 사라지라고! 괴물! 아아악!”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우악스러운 주먹을 이리저리 휘둘러 댔지만, 검은 그림자는 이리저리 피하면서 식인마물을 삽시간에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식인마물을 보호하던 식인마인들은 죄다 으스러진 채로 죽은 상태였다.

항거 불가한 적을 만난 것처럼. 마치 자신이 식인마물과 마주쳤을 때처럼. 식인마물은 검은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저건 대체 뭘까? 이브라모비치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 숨을 내뱉기 전에 볼 수 있었던 건.

공포에 잔뜩 질린 식인마물의 머리통이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장면이었다.

* * *

[식인괴인의 마을을 발견하였습니다.]

[적대 행위가 시작됩니다.]

꺄아악!

쿠르륵, 쿠륵-

숲에서 시작된 검은 불길이 어느새 마을을 덮쳤다. 간만에 플레이어 몇 명을 붙잡아 다 같이 만찬을 즐기려던 식인괴인들은 갑작스런 날벼락에 놀라고 말았다.

다들 허겁지겁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 와 뿌려 댔지만, 검은 불길은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반발하듯이 더 크게 일어나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들이 1년 한 해 동안 정성스럽게 경작한 농작물이나 과수원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었고, 그들이 편하게 지내던 가옥은 장작 더미가 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끼리 춤과 노래를 즐기던 마당이며 놀이 창고 등도 탐욕스러운 검은 불길의 먹이로 전락했다.

어디서 출현했는지 모를 불길은 식인괴인들을 한순간에 혼란 상태로 몰아넣었다. 가뜩이나 동료가 여럿 죽으면서 시작된 광기는 조금 부채질을 해 준 것만으로도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그들에게 재앙은 따로 있었다.

팟-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치솟는 검은 불길 사이로. 돌풍이 불어닥쳤다. 연우였다.

촤촤촥-

연우는 빠르게 이동하면서 걸리적대는 식인괴인들을 무참히 베어 나갔다.

비그리드를 뽑거나, 검은 오러를 날릴 필요도 없었다. 마장대검만 가볍게 휘둘러 대면서 부딪치는 녀석들의 명줄을 끊어 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워낙에 경황이 없다 보니, 녀석들은 어떻게 미처 방어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해야만 했다.

[난이도가 상승합니다.]

[난이도가 상승합니다.]

[식인마물의 출몰 빈도가 더 잦아집니다!]

“인간! 죽인다, 인간!”

결국 계속된 학살에, 몇몇 식인 괴인들이 식인마물로 탈피를 마치고 와락 달려들었다.

하지만 녀석들도 연우에게 가볍긴 마찬가지였다.

칼을 한 번 휘두르자 녀석의 주먹이 수수깡처럼 잘려 나갔고, 두 번 휘둘렀을 때는 심장과 목젖이 함께 갈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브라모비치를 가볍게 찢어 죽이면서 섬을 공포로 몰아넣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한 최후.

‘약해. 너무.’

연우는 녀석의 사체를 발로 짓밟으면서 다시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핏물이 번졌다가 열기에 증발해 금세 사라졌다.

그 뒤로도 식인마물과 식인마인들이 줄지어 나타났지만, 연우를 제대로 대적하지 못했다.

약했다. 전부.

연우는 그 사실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식인마물이 자신의 기대를 채워 주지 못할 거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몇 수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도 식인마물의 집요한 방해에 짜증을 많이 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연우에게 녀석들은 그런 방해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아직 권능은 깨우지도 않았건만. 아포피스의 허물 때와 똑같았다.

[제사장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당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하위 신관들을 죽여 제물로 삼으면서 새로운 축원문을 빌기 시작하였습니다.]

[식인왕의 출현이 다가옵니다.]

[현재 조건 확률: 81%]

그러다 연우는 새롭게 떠오르는 메시지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식인왕의 출현. 녀석은 강할까. 아포피스의 허물보다는 낫기를 바랐다.

그렇게 조건이 100%에 다다랐을 때.

[축원문이 가납되었습니다. 제사장이 변이를 시작합니다.]

[식인왕이 출몰하였습니다.]

연우는 저 멀리, 아주 작게 보이는 외딴섬을 찾을 수 있었다. 제사장이 머무는 본거지라고 말했던 곳. 그는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망자의 강 위로 몸을 날렸다.

팟-

바람길과 블링크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강물 위를 그대로 미끄러져 순식간에 목적지에 다다랐다.

우드득. 우득.

거기엔 아포피스의 허물만큼이나 큰 덩치를 자랑하는 유인원이 뭔가를 잔뜩 먹어 치우고 있었다.

녀석은 연우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빨간 눈이 흉포하게 일그러졌다.

“너로구나. 나의 아이들을 다치게 만든 것이.”

연우는 마장대검을 수납하고, 비그리드를 뽑았다. 검은 오러를 두르면서 생각했다. 녀석은 강할까? 아니면 약할까? 동생은 일기장에 분명히 강하다고 했다. 자신도 승부를 보는 데 힘들었다고. 동료들이 도움을 줘서 겨우 해치울 수 있었다고.

그렇다면 나는? 당시의 동생보다 강한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녀석이 어느 정도 상대는 되어 주기를 바랐다.

“겁화를 쓰는가? 우스운 노릇이로군. 망자들의 세계에서, 망자의 왕에게 지옥의 불길을 들이대는 꼴이라니. 본인은 망자의 강의 축복을 받은 몸. 겁화는 겁수를 이기지 못한다. 불이 물에 꺼지듯, 그대도 꺼지게 될 것이다.”

식인왕의 기세에 따라 일대 공기가 다시 눅눅해졌다. 습기가 강해졌다. 안개가 뿌옇게 내려앉고,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산성이 잔뜩 섞인 안개. 겁수(劫水)를 다룬다는 녀석의 특성이었다.

그것을 보고.

“쫑알쫑알, 말이 너무 많군.”

연우는 짜증을 내면서 땅을 세게 박찼다.

* * *

“어, 째서……!”

믿을 수 없다는 말투.

연우는 거기다 대고 코웃음을 쳤다.

“말이 너무 많아.”

퍽-

연우는 발에 잔뜩 힘을 주며 식인왕의 머리통을 부쉈다. 핏물이 튀었지만, 열기에 녹아 사라졌다.

‘결국 이놈도 똑같았어.’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포피스의 허물에 이어 식인왕까지. 결국 검은 오러 앞에서는 어떻게 버티지 못하고 무참하게 썰려 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명색이 한 스테이지를 책임지는 히든 보스들인데. 이렇게 약할 줄이야.

쉬워도 이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그만큼 자신이 강해졌단 뜻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정도가 심했다.

‘결국 최대한 빨리 고층 구간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지.’

어쩌면 이런 건 자신의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가진 게 많아진 이상, 저층 구간에서 뭔가를 바란다는 게 사실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안 되겠어. 라나만 만나고 빨리 지나치든가 해야지, 원.’

결국 연우는 우선순위를 바꾸기로 했다. 처음에는 할 수 있는 건 전부 하면서 천천히 층계를 오르려 했지만. 더 이상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필요한 것만 빨리 찾고 다음 층계로 넘어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연우는 외딴섬의 한쪽 구석에 위치한 또 다른 마을을 찾았다. 제사장이 머물던 진짜 본거지. 그곳에는 늙거나 어린 식인괴인들이 덜덜 떨면서 모여 있었다.

연우가 그중에서 관심을 둔 건 늙은 식인괴인들이었다.

식인괴인은 타고난 전사이면서도 조선공이자, 또한 뱃사공이기도 하다. 특히 망자의 강을 건너는 배는 그중에서도 노인들에게만 전해지는 비법.

이들만 잘 이용한다면 30층까지 무난하게 건너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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