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독식자 (11)
키엑! 키에엑!
늙은 식인괴인들은 덜덜 떨고만 있었다. 전사들은 모두 전멸하고 믿었던 식인왕마저 죽은 상황. 힘이 없는 그들로서는 어떻게 저항 할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들은 덜덜 떨면서도 창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뒤에 있는 여인과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무리 왕이 죽었어도, 자손은 살리고 싶은 게 그들의 마음이었다.
연우는 그들을 보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불쌍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닌가. 이들은 좀 전까지만 해도 플레이어를 잡아다 먹던 놈들이었다.
천적 관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이들이 개과천선을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힘이 없는 놈들이니 배를 만들게 하고, 그 뒤에는 잡일꾼으로 쓸 생각이었다.
연우는 녀석들에게 가볍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 위로 식인왕을 죽이고 난 뒤에 얻은 보상이 나타나 빛을 뿌렸다.
[식인왕의 증표]
분류: 신물
등급: A- (*27층 한정)
제한: 식인왕 처치. 식인괴인 부족 공포 수치 30 이상. 식인괴인 부족 전사대 및 사냥꾼 전멸.
설명: 식인괴인 부족을 이끄는 제사장이 왕이 된 이후에 남기는 증표. 종족 스킬인 ‘혈연’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면 연결된 식인괴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단, 종속의 맹세를 이끌어 내야만 한다.
식인왕의 증표는 보라색으로 빛나는 구슬이었다. 여기에는 식인 괴인들을 하나로 이어 주는 종족 스킬이 탑재되어 있어서 이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게 가능했다.
‘정우도 이것으로 배를 건조했었지. 우연찮게 얻은 거였지만, 아주 쓸 만했었어. 튼튼하고.’
식인괴인은 몬스터보다 지능이 높은 네이티브. 보통 플레이어들은 단순하게 이 사실을 잊고 넘어가기 마련이지만, 동생은 그러지 않았다.
식인괴인이 부족을 이루고 문명 생활도 일구는 것을 보고, 혹시 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빙고.’
식인괴인이라고 해서 무작정 플레이어만 잡아먹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플레이어는 별미에 가까웠다. 플레이어가 나타나지 않는 평소에는 경작을 하거나, 강으로 나가서 어부 노릇도 했다.
그러니 배를 건조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딱히 숨겨진 히든 피스는 아니었지만, 발상을 전환하지 않으면 절대 찾을 수 없을 히든 피스이기도 했다.
화아아-
식인왕의 증표가 시린 빛을 토하자, 늙은 식인괴인들은 어떻게든 종속을 거부하기 위해서 머리를 강제로 털었다.
창칼을 쥐고 있는 손길이 저항심으로 부르르 떨렸지만.
“받지 않으면 뒤에 있는 애들부터 죽여 주지.”
연우가 그들의 언어로 싸늘하게 내뱉은 말이 늙은 식인괴인들을 흔들고 말았다. 파르르. 아이들부터 죽이겠다. 이 말은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그때. 비교적 이성이 맑아 보이는 식인괴인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섰다.
“그, 그럼 여자와 아이들을 살려 준다고 약속한다면, 종속의 맹세를……!”
“안 돼.”
연우는 그들이 내걸려는 조건을 단칼에 거절했다.
“조건이나 협상은 없다. 너희와 아이들 전부, 증표를 받아라. 안 그러면 전부 죽는다.”
늙은 식인괴인은 다른 괴인들을 돌아봤다. 노인들은 물론 여자들도 덜덜 떨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가 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훨씬 중요했다.
결국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소.”
띠링-
[종속의 맹세를 이끌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칭호 ‘식인괴인의 인솔자’를 획득했습니다.]
[2,311번째 식인섬을 영역으로 삼는 데 성공했습니다. 원할 시, 영토로 선언하여 근거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식인괴인의 섬이 가지는 또 다른 히든 피스. 그건 이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터전을 영토로도 삼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27층을 설계한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참 악취미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49일 만에 탈출해야 하는 스테이지에서 영토라니. 이건 가지란 건지, 말란 건지. 하지만 잘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비밀 보급소로도 사용할 수 있어서 용이하기는 했다.
그래서일까. 이미 토벌이 끝난 몇몇 섬 같은 경우에는 ‘해적’들의 본거지로 쓰이기도 했다.
드넓은 망자의 강에 섬은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시련을 통과하지 못해 스테이지에 잔류한 이들의 경우, 이곳에 머물면서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가 잦았다. 통행인들을 약탈하거나, 시련을 방해하는 자들.
튜토리얼에서 활약하던 스캐빈저처럼, 이곳에서는 그런 녀석들을 ‘해적’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베이럭의 생산 기지도 있지 않았었나?’
특히 망자의 강과 식인섬의 생태계에 관심이 많은 베이럭 녀석이 여기를 유독 눈독 들였다.
독에 관심이 많은 베이럭이었으니. 당연히 27층은 녀석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동생은 어차피 쓸데도 없는 섬의 좌표를 녀석에게 넘겨 버렸다.
그 뒤로 베이럭은 섬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동생이 이따금 생각나 물어보면, 지나가듯이 잘 있다고 대답만 할 뿐.
연우는 녀석이 그곳을 아직도 잘 이용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침입해서 부숴 놓고 싶었지만.
‘좌표를 모르면 말짱 도루묵이니.’
이미 베이럭은 섬의 좌표를 바꾼 지 오래였다. 49일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어 망망대해를 뒤질 수도 없는 일인 데다가, 어떻게 뒤진다고 해도 여러 방비 시설을 해 뒀을 테니 찾기란 요원했다.
‘나중에 따로 찾을 방법이 생기겠지. 아니면 이들을 잘 이용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고.’
연우는 결국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식인괴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종속이 끝났는지, 녀석들은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왕을 만난 신하들을 보는 듯한 모습. 괴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증표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연우는 그들을 보면서 인트레니안을 활짝 열었다. 배를 건조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시작해야 했다.
* * *
식인괴인들은 연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선박 제조에 들어갔다.
식인왕의 증표는 단순한 왕의 표식이 아니었다. 그들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권한이었다. 아니, 그보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늙은 몸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려니 힘겨웠다. 몇몇은 연우가 가져온 망혼목의 목재도 제대로 들지 못해 끙끙댔지만. 그래도 연우는 그들을 보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고생하는 건 녀석들의 몫이었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동정심을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만, 힘을 쓰는 일에는 괴이들을 시켜서 따로 돕도록 했다. 괜히 일꾼들이 망가졌다가는 건조 시간만 쓸데없이 늘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녀석들의 마을 창고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플레이어들도 찾을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으흑흑. 정말 감사합니다.”
납치되어서 죽는 줄로만 알았던 플레이어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연우에게 감사하단 말만 자꾸 해 댔다.
연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식인괴인들이 주로 타고 다니던 나룻배를 내어주면서 큰 섬으로 가도록 했다.
몇몇은 연우가 더 도와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연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과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괜히 짐짝들을 맡을 필요는 없으니까.’
자신은 그들을 구해 준 것만 해도 할 일을 다 해 준 셈이었다.
연우는 나룻배에 타 큰 섬으로 가는 플레이어들을 뒤로한 채, 다시 배의 건조 현장으로 돌아갔다. 건조하는 데 대략 닷새면 된다고 했으니 그보다 더 시일을 바짝 당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사람을 가득 태운 나룻배는 망자의 강을 둥둥 떠다니다 겨우 큰 섬에 도착했다.
플레이어들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와 함께 걱정이 가득했다.
“이제…… 어떡하지?”
식인괴인들로부터 살아나 기뻤던 것도 잠시.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던 것이다.
갖고 있던 물건들은 전부 빼앗겨 사라졌고, 남은 건 달랑 몸뚱이 하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갇혀 있었던 시간이 제법 오래되어 제한 시간도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어떻게 수를 쓰기가 어려웠다.
남은 방법은 하나. 어떻게든 구명줄을 잡아 같이 딸려 가는 수밖에는 없었지만.
“…….”
“…….”
그들은 서로 눈치 보기만 바쁠 뿐. 누구 하나 뭐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하려면 연우에게 빌붙어야 했지만, 총대를 메고 나설 사람이 없었다. 괜히 그랬다가 다칠지도 몰랐다. ‘패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식자에 대한 인상이 너무 무서웠다.
결국 그들은 나룻배가 강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토록 울창했던 숲이 대부분 전소되었단 사실도 그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았다.
그때.
샤락-
풀이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의 시선이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사람?”
그곳에 하이디가 일련의 무리들을 이끌고 서 있었다. 그녀도 새로운 사람들의 등장에 놀란 얼굴이었다.
* * *
“그러니까 독식자가 남은 식인 괴인들까지 전부 정리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그렇습니다.”
하이디는 생존자의 말을 듣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해낼 줄이야.
‘그럼 그때 그 그림자 괴물도, 독식자의……?’
증거는 없지만. 아무래도 정황상 맞는 것 같았다. 놀랄 일이었다. 식인마물을 가볍게 찢어 죽이던 그림자 괴물만 해도 놀랄 일인데, 그런 것을 휘하에 두고 혼자서 식인왕까지 잡을 줄이야.
독식자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게 틀림없었다.
오란트와 이브라모비치가 죽은 이후. 하이디는 트리니티의 멤버들과 함께 숲을 뒤지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을 찾았다.
식인괴인들이 너무 마구잡이로 날뛴 탓에 과연 생존자들이 있을까 싶긴 했지만.
그래도 만약에 한 명이라도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해 주는 게 옳았다.
92단처럼 되지는 않는다. 그게 하이디의 생각이었고, 다른 동료인 델란과 쥰의 생각이기도 했다.
더구나 엘프의 덕목은 자애. 아무리 험한 탑의 세계라지만, 그래도 하이디는 지키고 싶은 ‘선’이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곳곳에 생존자들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광기에 취한 식인괴인들은 오로지 쾌락을 위해 사냥에 집중했을 뿐, 막상 다친 사냥감들에게는 눈길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외딴섬으로부터 건너온 생존자 들까지 합쳐서, 트리니티에 합류하게 된 플레이어의 숫자는 이제 총 60여 명.
사실 이 숫자만 해도 절대 부족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힘들었던 26층을 건너온 정예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힘이 크게 빠진 얼굴이었다.
92연대의 핍박이나 식인괴인들의 준동 등등. 단기간에 몇 번씩이나 죽을 위기를 넘어서다가, 간만에 평화를 맞게 되니 정신적 피로가 너무 한꺼번에 쏟아진 탓이었다.
‘무엇보다 공기가 너무 안 좋아. 자꾸 육체를 무겁게 만들고 있어. 쉽게 피로에 젖으니까 정신력도 약해지는 거고.’
하이디는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란과 쥰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움직일 힘은 남아 있어 보였다.
어느 층계에서나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어떻게든 돌파해 내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건 다른 기존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하이디도 어떻게든 망자의 강을 건널 생각이었다. 다행히 92단이 마련한 재료들이 있으니 카론만 찾으면 배를 건조하는 건 쉬웠다.
문제는 다른 생존자들이었다. 이들이 짐짝이 될 것 같다면 그냥 여기다 두고 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녀는 죽어도 그러기 싫었다.
‘아버지처럼 되긴 싫어.’
하이디는 머릿속 한편에 묻어 뒀던 옛 기억을 억지로 누르면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크게 보자면 여기에 있는 60여 명 전부, 자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었다.
불편하다고 해서, 지도자가 되어 이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위선이라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모두 살려서 30층까지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독식자의 도움을 빌려야 해. 하지만 어떻게?’
여태껏 하이디가 봤던 연우는 절대 먼저 나서서 선의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했고,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내치는 냉정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요정안을 갖고 있는 그녀는 연우가 절대 심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냉정하게 일을 처리해서 그렇게 보일 뿐이지, 속은 절대 비뚤어진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설득은 간단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만 확실하게 보여 주면 된다.
결국 중요한 건 하나였다.
대가.
‘거래를 해야 해. 우리가 절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독식자가 만족스러워할 만한 것을 건네야만 해. 우리도 합당한 선까지만 나서야 하고. 하지만 뭐가 있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게?’
연우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힘, 카리스마, 히든 피스. 반면에 그들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루한 몸뚱이.
하지만 이것마저도 연우가 부리는 권속에 비하면 너무 턱없이 부족했다.
‘잠깐, 몸이라고?’
하이디는 계속된 고민 끝에 뭔가를 떠올리고 눈을 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봤다.
연우와 접선을 하기 전에. 먼저 이들부터 나중에 딴소리하지 않도록 설득을 시켜 놔야 했다.
그리고 이런 거래라면. 연우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