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독식자 (14)
해적단이자 클랜, ‘방랑하는 해골’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희희낙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저곳에 포식어가 다량으로 나타났었다, 이 말이지? 지금은 전부 물러났고?”
“예. 레이더에도 포식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우린 가서 회수만 하면 됩니다.”
“으흐흐. 포식어가 수십 마리나 등장했다고 했을 때는 뭔 일이라도 터지는 게 아닌가 싶었었는데. 이런 호재로 돌아올 줄이야.”
해적들은 배를 몰면서 하나같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개 포식어가 출몰하는 이유는 먹이가 다량으로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꽤 많은 인원을 수용한 배나, 대규모 선단이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그때였다.
그런데 수십 마리나 되는 포식 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단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선단이 지났다는 뜻.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난리가 크게 났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내쫓는다고 해도, 선단이 받은 피해도 아주 컸을 터. 갖가지 보물들이 둥둥 떠다니거나 강 아래로 가라앉았을 게 분명했다.
방랑하는 해골은 주인 잃은 보물들을 수거하는 걸 주업으로 삼는 편이었다. 아니면 해왕류를 만나 빈사 상태에 빠진 선단의 뒤통수를 쳐서 약탈을 하거나.
지금도 마찬가지.
그들은 간만에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포식어들을 내쫓느라 피해가 큰 선단을 지금 기습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근 몇 년 중에서 가장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한창 기쁨에 들떠 있었는데.
재앙은 한순간 날벼락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쾅!
갑자기 갑판 중앙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큰 충격파와 함께 배가 위아래로 크게 들썩이면서 해적들은 저마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무, 뭐야 이거?”
해적들은 놀란 얼굴이 되어 난간을 붙잡으며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전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어어어?”
“배, 배가 부서진다아아!”
어느새 배의 중앙 부분이 무너지면서 반으로 접혀 버린 것이다. 선두와 선미 부분이 위로 올라가면서 물이 갑판 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해적들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발버둥 쳤지만.
이번에는 불길이 가장자리 부분부터 일어나면서 삽시간에 돛과 갑판을 집어삼켰다.
몇몇은 불길에 휩싸여 휘적대거나, 아니면 갑판에서 그대로 미끄러져 강물에 풍덩풍덩 빠지고 말았다. 비명과 절규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나마 기둥이나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신의 손길은 그들의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위는 불길, 아래는 강물. 타 죽느냐, 아니면 산성액에 몸이 녹아 죽느냐의 차이일 뿐.
그들의 안색은 시시각각 잿빛으로 변해 갔다.
그때. 선두 부분에서 연우가 나타나 아래를 굽어다 봤다.
“살고 싶나?”
해적들은 연우가 쓴 가면을 본 순간, 자신들이 스스로 무덤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단 사실을 깨달았다.
독식자의 가면은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여름여왕의 마지막 명줄을 끊었다는 루키가 아닌가.
“사, 살고 싶습니다!”
“시키는 건 무엇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마, 말씀만 하십시오!”
연우는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인성 하고는. 주인이 무왕을 욕할 처지가 아니란 건 알고 있지?」
샤논의 한 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에도 못 들은 척하면서 해적들에게 말했다.
“수정궁의 위치, 알고 있나?”
“수, 수정궁이라고 하시면…… ‘푸른 장미’를 말씀하시는……?”
푸른 장미. 라나가 이끌던 해적단의 이름이었다.
“맞아.”
“푸, 푸른 장미가 모습을 감춘 지는 벌써 몇 년이 되어서 저희도 모를……!”
쾅!
연우는 왼발을 세게 굴렀다. 그러자 선체가 와르르 떨리면서 곳곳에 균열이 퍼졌다. 이대로 툭 치면 수수깡처럼 우수수 부서질 것 같은 모습. 물이 차오르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해적들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하, 하, 하지만 위, 위, 위치를 알만한 노, 노, 놈들은 알고 있습니, 니…… 아아악!”
결국 배가 완전히 부서지면서 해적들도 고스란히 강물 속에 빠지려는 순간. 갑자기 수면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게 쭉 늘어나더니 그들의 뒷덜미를 잡아 허공에다 매달았다.
열매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채. 해적들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발아래에 기포가 끓는 강물이 넘실대는 것을 봐야만 했다.
“방금 그 말, 사실이겠지?”
“그, 그렇습니다!”
방랑하는 해골의 수장은 빠릿빠릿한 자세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젠장! 다른 해적들도 계속 털다 보면 뭐 하나라도 나오겠지! 우리만 죽을 수는 없다고오!’
* * *
그때부터 해적 사냥(?)이 시작되었다.
연우는 방랑하는 해골의 수장이 말해 주는 대로 여러 해적단들의 본단을 급습, 선박들을 모조리 초토화시키고 물에 빠지기 일보 직전인 그들을 구해 주면서 수정궁의 행방을 찾아 나갔다.
해적들 사이에는 자신들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연대 의식이 퍼져 나갔고, 그들은 여태껏 몰래 파악하고 있던 다른 해적들의 본거지를 줄줄이 토해 냈다.
덕분에 하룻밤 사이에 연우는 해적단 십여 곳을 터는 쾌거를 선보였다.
사흘쯤 되었을 때에는 어느새 해적들 사이에 한 가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유령선이 나타나면 해적들이 잡아먹힌다’는 해괴한 소문이.
그리고 실제로 여러 해적단들이 줄줄이 자취를 감추자, 여태껏 기승을 부리던 해적들의 행동이 굼떠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적 사냥이 끝나는 건 아니었지만.
* * *
“노를 저어라아!”
“바람이 세다! 돛을 펼쳐라! 이번에는 ‘침묵하는 꽃’이 있는 곳이다!”
갑판 위. 수백 명도 넘는 선원들이 돛을 조절하고, 망원경으로 밖을 관찰하는 등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단 사흘 만에 연우의 유령선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포로로 잡힌 해적들은 선원을 자처하면서 배를 모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망자의 강에서 터를 잡고 사는 녀석들이다 보니, 배를 다루는 솜씨는 트리니티나 식인괴인보다 훨씬 나았다.
덕분에 트리니티는 잡무에서 손을 떼고 비교적 편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따금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이거 정말 이대로 둬도 괜찮은 걸까, 하이디?”
델란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하이디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우에게 지독하게 당할 대로 당한 해적들은 트리니티가 그들보다 먼저 연우 밑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선배(?)라고 부르면서 깍듯이 모시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냐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녀석들도 있을 정 도였다. 그러면서 그들도 뒤에 잡혀 온 자들을 후배로 치부하면서 부려먹기 시작하니.
어느새 연우의 배 안에서는 그럴듯한 서열 관계가 정리되어 있었다. 트리니티는 정신을 차려보니 그중 정점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유령선 내에서 하이디는 2인자가 되어 있었다. 트리니티며 식인괴인, 해적들까지. 전부 연우에게 직접 다가가기 어려우니 그녀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중이었다.
델란은 자꾸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인력을 보면서 이렇게 둬도 될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배가 워낙에 커서 그들을 수용하고도 아직 여유 공간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스테이지에 잔류 중인 해적들과 다르게 트리니티는 한창 공략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해적들과 한 패거리가 되는 것도 문제지만, 이대로 발이 묶이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도 들었던 것이다.
“어쩌겠어. 그래도 하라는 대로 해야지.”
하지만 하이디는 쓰게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 지 못했다.
조건은 여전히 유효했다. 토를 달지 말 것. 반발한다면 금방 배 밖으로 내쫓길 게 분명했다.
“그래도 독식자도 우리와 똑같이 28층을 건너야 하는 입장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후! 그건 그렇지만…….”
하이디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델란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연우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우는 선두에 앉아 고요한 얼굴로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중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그를 둘러싼 시간만 정지한 것처럼. 그는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저 사람은 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그녀의 눈에 연우는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
이렇게 많은 해적들을 수집품처럼 모아 뒀다가 대체 어디에다가 쓸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해적들에게 어떤 정보를 얻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쓸모가 다하면 그냥 버려도 될 텐데. 그는 그들을 버리지 않고 굳이 배에다 태우고 있었다.
이대로 풀어 두면 녀석들이 죽을 게 뻔하니 구해 주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것일까.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아닌 타인의 일에는 무감각해지려 하는 편이었지만. 하이디는 계속 연우에게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꼭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그러던 그때.
갑자기 연우가 손을 높이 들었다. 정지하라는 신호. 해적들이 허겁지겁 다급하게 움직이면서 돛을 풀고, 바다에 닻을 내리기 시작했다.
『배, 잘 지키고 있도록.』
연우는 하이디에게 그런 어기전성을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디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그를 부르려 했지만.
화아악!
연우는 등 뒤로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배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저, 저……!”
“미친!”
선원들이 하나같이 경악하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연우는 불의 날개로 몸을 칭칭 감은 채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하이디였다. 배를 잘 지키고 있어라. 그건 곧 돌아오겠다는 뜻. 여태 연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전부 어떤 노림수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짝!
하이디가 크게 박수를 쳤다. 웅성거리던 선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하이디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독식자는 곧 돌아올 겁니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으세요.”
* * *
쿠르르!
연우는 망자의 강 아래로 계속 가라앉는 중이었다.
강물 속을 떠다니던 여러 유령들이며 해수류들이 연우를 발견하고 다가왔지만.
[제3천의 영]
권능을 발현하자, 녀석들은 기겁해 하면서 연우를 비껴 났다.
죽음의 신, 아즈라엘이 내린 권능이니 그들에게는 훨씬 높은 상위 속성인 데다가, 28층에 오면서부터 계속 받은 축복 때문에 권능의 권한도 부쩍 강해진 상태였다.
연우는 컬렉션에 있던 망령들로 배리어를 형성해 가라앉으면서, 탁한 강물 아래로 언뜻 빛나는 성채를 바라봤다.
궁궐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크기의 성.
신화 속에 나오는 용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려했다.
저곳이 바로.
‘수정궁.’
연우는 드디어 발견한 라나의 본거지를 보면서 옅게 웃었다.
짙은 산성과 유령, 그리고 해수류와 해왕류로 넘쳐나는 망자의 강 아래에 저런 궁궐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까.
그래서 흔히 해적들은 수정궁이라고 하면, 라나의 권역이라고만 생각할 뿐. 정확한 정체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수정궁의 정확한 위치는 8대 클랜에서도 찾아내지 못할 정도였지. 라나도 그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었고. 아마 새롭게 세력을 일구고 있다면, 여전히 수정궁을 본거지로 삼고 있겠지.’
연우는 여러 해적들을 털어 가면서 푸른 장미가 주로 출몰하는 지역을 더듬어 나갔고, 일기장에서 봤던 것과 얼핏 비슷한 광경을 찾자마자 망령들을 풀어 수색을 시작했다.
선두에 앉아 며칠 동안 계속 수면만 바라봤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해저 어딘가에 있을 수정궁을 찾기 위해서. 다행히 망령들은 금세 위치를 포착해 냈다.
연우는 블링크를 잇달아 발동시키면서 수정궁에 가까워졌다. 동생을 아끼던 스승을 만난다. 그 사실이 그를 잔뜩 기대케 했다.
‘정우 녀석이 준 목걸이, 아직도 갖고 있을지 모르겠군.’
지구에는 스승의 날이란 게 있어서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줬더니, 얼마나 좋아하던지.
평소에는 그렇게 여왕님 같던 라나가 기뻐하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뭐지?’
수정궁은 일기장에서 보던 것과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야 할 성채는 마치 큰 격전을 치른 듯 곳곳이 부서져 있었고, 내성(內城)에 있는 궁궐도 멀쩡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부분도 강물에 의해 빠르게 부식되고 있는 중이었다.
수정궁을 보호하면서 한때 수천 명에 달하던 푸른 장미를 수용하던 배리어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바람길을 전개, 물살을 거칠게 가로지르면서 수정궁의 중심, 수왕궐로 향했다.
수왕궐은 일기장에 나와 있는 구조 그대로였다. 곳곳이 망가지고, 강물이 가득 차 있다는 것만 다를 뿐. 사람의 기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연우의 눈에 복도 곳곳에 널브러진 해골들이 보였다.
뭔가를 지키려고 했었던 듯.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해골들은 잔뜩 뭉쳐 있는 상태로, 한쪽 무릎만 꿇은 채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모습이었다. 그 앞에는 적으로 보이는 해골들이 아주 많았다.
‘이 뒤에는 분명…….’
연우는 주먹을 꽉 쥐면서 호위 병사들의 해골을 지나 문을 벌컥 열었다.
널따란 홀이 드러나고, 빛을 잃은 보석이며 명화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놓인 옥좌에.
한 해골이 앉아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라나가 즐겨 입던 옷을 입은 채로.
그리고 뼈만 휑하게 드러난 손에는. 동생이 줬다던 목걸이가 꽉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