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화. 트리톤 (1)
‘벤티케가 여기로?’
연우는 자신이 혹시 잘못 확인했나 싶어 다시 해수 부적을 체크했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맞았다. 벤티케가 휘하의 트리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포세이돈이 먼저 선수를 친 거로군.’
[포세이돈이 당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포세이돈은 호시탐탐 그에게 어떤 벌을 가할 것이라고 의중을 내비쳤었다.
그러던 참에 연우가 다시 층계를 오르기 시작하자 사도인 벤티케를 움직인 모양이었다.
[아테나가 아무 말 없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헤르메스가 포세이돈에게 항의를 합니다.]
[포세이돈이 무시합니다.]
[포세이돈이 당신에게 신벌을 내릴 것이라 엄포를 놓습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당신에 대한 의견 충돌에 부딪쳤습니다.]
[여러 신의 사회가 당신을 주목합니다.]
[여러 악마의 사회가 현 사건에 호기심을 가집니다.]
[아가레스가 필요하면 언제든 자신을 쓰면 된다고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합니다.]
[혼돈이 아무 의견도 내놓지 않습니다.]
[아즈라엘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앞으로 더 많이 벌어질 죽음을 기원합니다. 권능, ‘제3천의 영’에 축복을 내렸습니다.]
[계속된 축복의 누적으로 ‘제3천의 영’의 권능 등급이 한 단계 이상 상승하였습니다.]
연우는 벤티케를 자각하고 난 뒤로, 자신에게 달라붙는 시선이 훨씬 많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워낙에 98층에서도 많이 이슈가 되다 보니, 신이 내리려는 벌을 어떻게 타개할지가 궁금했겠지.
‘이들은 하계의 플레이어들을 보면서 뭐라고 생각할까. 게임처럼 여기나?’
연우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상에서 흔히 쓰는 아바타(Avatar)라는 단어는 ‘화신’을 뜻하는 아바타르라는 말에서 나왔다. 신과 악마는 화신을 이용해서 하계에 개입한다. 그렇다면 화신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일종의 놀잇감, NPC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하계라는 곳은 98층에 억류된 신과 악마들이 즐기는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평소에는 관심을 끄고 있다가, 이따금 심심하면 개입하는 곳. 포세이돈도 화를 낸다고 하지만, 사실상 재미를 위해 자신을 ‘벌’한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여러 신들이 당신의 생각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던집니다.]
[여러 악마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언제 포세이돈과 부딪칠 거냐며 타박을 합니다.]
[아가레스가 침묵을 지킵니다.]
[아즈라엘이 묘한 미소를 띱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연우는 해수 부적의 시야에서 벗어나 불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다시 망령을 몸 주변에 크게 둘렀다.
다른 존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부딪치면 깨면 그만일 뿐.’
연우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 지면을 세게 박찼다.
쾅!
* * *
그 시각.
수면 위는 한창 혼란 상태에 잠기고 있었다.
“대, 대규모 선단이 이곳으로 몰려옵니다!”
돛의 끄트머리에서 혹시 해수류나 해왕류가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 망원경으로 외곽을 관찰하고 있던 플레이어가 외친 목소리에.
연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선원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향했다.
선원들을 지휘하던 하이디와 트리니티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재빨리 난간으로 달려가 정령을 불렀다.
화아아-
바람의 정령이 일어나면서 저 먼 곳까지 시야를 잡아당겼다. 관찰자의 말대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십 척에 달하는 배. 돛에 그려진 삼지창이 눈에 밟혔다.
하이디는 그 문장이 어느 클랜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선원들이 얼마나 동요할 것인지도. 그래서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먼저 소리를 치려 했지만.
“트리톤! 트리톤입니다!”
관찰자가 토하듯이 내뱉은 말은 선원들을 잔뜩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 뭐?”
“트리톤?”
“포세이돈의 클랜이 여기는 왜!”
해적이라고 해서 다 같은 해적이 아니었다.
쓰러진 푸른 장미의 자리를 거머쥐면서 급부상한 트리톤은 단순한 28층의 패자가 아니었다.
28층을 기반으로 세력을 나날이 불려 나가면서. 오늘날 혼란의 시대에 잠긴 탑에서도 손꼽히는 신흥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그들의 수장, 벤티케는 포세이돈의 사도로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온 하이 랭커이기도 했다.
푸른 장미의 이인자일 때에는 적으로 만나는 모든 자들을 죽이는 포악성으로, 트리톤을 이끄는 수장인 지금은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흉악성으로.
그런 트리톤이 이곳으로 달려온다는 소식은 선원들을 잔뜩 겁먹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왜 여기로 오는 것일까? 단순한 노략질을 위해서? 그렇다면 한두 척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왜 딱 보기에도 총전력으로 보이는 자들을 전부 데리고 나온 거지? 우리가 밉보인 게 있었나? 아니면 독식자와 벤티케 사이에 어떤 원한 관계가……?
혼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커졌다.
공포는 침묵 속에서 눈덩이처럼 자꾸 크게 불어나는 법.
하이디는 정말 이대로 있다가는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바람의 정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실프!’
정령이 바람이 되어 흩어지면서 하이디의 목소리를 모든 선원들의 귓가에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전부 정신 차려!”
“……!”
“……!”
공포에 잔뜩 질려 있던 선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면서 허겁지겁 하이디를 돌아봤다.
“트리톤이 뭘 노리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쪽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전부 위치로 이동해!”
“위치로!”
“각자 위치로!”
선원들은 그제야 일사불란하게 각자가 맡은 위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우가 따로 지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하이디는 이미 선원들에게 각자 담당할 파트를 배정해 준 상태였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매뉴얼을 정리해 뒀었는데. 그게 위급 시에 통한 것이다. 매뉴얼에는 적이나 해왕류를 만났을 때에 대한 대처법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선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면서도 여전히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연우가 있다면 모를까. 그가 부재중인 상황에서 이런 일이 닥치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니, 그가 있다고 해도 과연 트리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싶었으니. 떨리는 시선으로 트리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이디는 마력을 전부 소진해서 여러 정령들을 선박 주변에다 둘렀다.
힐러 역할을 맡고 있는 그녀는 정령술이 비교적 약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엘프 출신답게 보통 플레이어들보다는 많은 정령들을 다룰 수가 있었다.
그렇게 긴장감으로 가득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곧 수십 척에 달하는 트리톤의 함대가 나타났다.
한 척 한 척이 전부 연우의 유령선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거선들은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하면서 다가왔다.
그리고 유령선을 가운데에 놓고서 거대한 원을 그렸다. 몇 겹이나 되는 원진(圓陣)이 촘촘하게 놓이고, 뱃머리가 일제히 유령선 쪽으로 향했다.
포문이 열리면서 드러난 수백 개의 포구는 금방이라도 불꽃을 뿜어낼 것 같은 시커먼 무저갱처럼 보였다.
유령선은 그때까지도 꿈쩍하지 않았다. 선원들이 동요할 때마다, 하이디는 괜찮다면서 그들을 독려했다. 그러면서도 트리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만약 트리톤이 적의를 갖고 등장한 것이라면. 이렇게 포위망을 구축할 필요도 없이, 그보다 앞서 공세를 퍼부었을 게 분명했다.
그랬다면 이깟 유령선쯤은 어떻게 손도 쓰지 못하고 초토화되어, 지금쯤 해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을 테니.
그런데도 여태 포문만 열어 놓고서 공포 사격도 하지 않는다는 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표시였다.
하이디는 거기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이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빨리 연우가 위험을 알아채고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도 섞여 있었다.
그때. 배 한 척이 유령선 쪽으로 다가왔다.
트리톤을 상징하는 삼지창과 해일이 자랑스럽게 그려진 깃발 아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비쩍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는 마력을 한껏 담아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독식자! 독식자 있는가!”
선원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결국 하이디가 앞으로 나섰다.
“독식자는 지금 잠시 부재중이십니다.”
남자는 갑자기 엘프가 나타나자 탐탁지 않은 듯, 인상을 구기면서 하이디를 위아래로 살폈다.
“너는 누구지?”
“독식자를 대신해 잠시 배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곧 돌아오실 테니 무슨 용무인지 말씀해 주시면…….”
“보아하니 독식자와 함께 다닌다는 외뿔부족의 여식도 아닌 것 같고. 그가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
남자는 하이디의 말을 무시하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하이디는 모멸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독식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하니 차라리 잘 되었군. 여기에 있는 자들, 모두 들어라!”
대기가 떨렸다. 강물이 들썩였다. 남자의 목소리는 그만큼 컸다.
유령선의 선원들은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생김새만 봐서는 트리톤의 간부, 울프가 틀림없었다. 그가 하는 말은 곧 벤티케의 뜻과 같았다.
“내가 모시는 바다의 왕, 벤티케께서 말씀하셨다. 신의 뜻에 따라 지금부터 독식자를 벌할 것이라고.”
“……!”
“……!”
선원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했던 하이디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덧붙여서 또한 말씀하셨다. 독식자를 벌하기에 앞서, 그의 주변에 있다가 억울하게 휘말리는 희생양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니 지금부터 딱 1분을 주겠다. 그 안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는 살려 줄 것이되, 그렇지 않은 자는 독식자와 함께 해왕류의 간식거리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 말이 주는 여파는 컸다.
1분.
그 안에 어떻게든 살아날 길을 찾아야만 했다.
“멈……!”
하이디가 어떻게 그들을 뜯어말릴 새도 없었다. 동요해서는 안 된다고. 저 말은 우리를 동요케 해서 지리멸렬하게 만들 속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비, 비켜!”
“아악!”
“배! 배는 없어? 없냐고!”
선원들은 하이디의 의견 따위는 듣지 않은 채, 구명정을 찾아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갑판 위는 금세 혼란스러워졌다.
“59, 58……! 으하핫!”
울프가 착실하게 숫자를 헤아릴 때마다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늙은 식인괴인들을 죽여서 구명정을 빼앗거나, 그렇지 못한 자들은 거침없이 강물 위로 몸을 던졌다.
짙은 산성과 독기 때문에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지만. 잠시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트리톤의 배로 넘어가면 괜찮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이디는 어떻게든 그들을 말려 보고자 애썼다. 정령을 동원하고, 스킬만 제때제때 보강된다면 공세를 막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조금만 버틴다면 연우가 돌아와 구해 줄 거란 믿음도 있었다.
더구나 투항한다고 해도 저들이 순순히 받아 줄 거란 보장도 없었다.
‘트리톤은 독식자가 돌아오더라도 손을 쓸 수 없게 이 배를 부수는 게 목적이야! 이 배, 보기보다 훨씬 단단한 게 틀림없어!’
카론이 아닌 식인괴인이 만든 배. 그녀로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히든 피스이기 때문에, 어쩌면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도 몰랐다. 트리톤도 무작정 부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무언가가.
하지만 아무도 그런 하이디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중에는 트리니티의 멤버도 있을 정도였다.
“미안합니다, 대장. 저는 살고 싶어요!”
“하눌!”
결국 몇 분 전만 해도 그렇게 북적대던 유령선은 삽시간에 한산해지고 말았다.
하이디 외에 델란과 쥰, 트리니티의 몇 남지 않은 멤버와 늙은 식인괴인들만 덜덜 떨고 있을 뿐.
하이디는 정신이 멍했다. 자신이 쌓은 성이 이렇게 쉽게 허물어질 것이었나. 애당초 해적들이야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연우에게 강제로 끌려 온 것이니까.
하지만 트리니티의 다른 멤버들은 달랐다. 11층의 격한 싸움터에서부터 함께해 왔고, 평생 서로에게 등을 맞대자고 의기투합하던 동료들이었다.
그래서 소중했고, 그래서 더 각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목숨의 위기 앞에서는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지난날의 의기나 우정 따위는 없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지.
그러다 문득, 하이디는 연우가 스쳐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 떠올 랐다.
그때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되리란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그녀가 굳게 믿던 것들이 사실은 모래성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이디.”
델란은 멍한 눈빛이 된 하이디가 걱정되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그제야 하이디는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짜악.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세게 두들겼다. 배신감은 잠시 접어 둬야 했다. 원망은 살아남은 뒤에 해도 충분했다.
“전부 끝까지 자리를 지켜! 독식자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
하이디의 외침에 따라 갑판에 남은 선원들은 일제히 방어 스킬을 작동시켰다. 정령들이 퍼지면서 둥근 배리어를 형성했다.
그 순간, 원진을 구성하던 트리톤의 포문들이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천둥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물살이 거칠게 요동쳤다.
구명정이 거친 파도에 전복되었다. 헤엄쳐서 트리톤의 배로 건너가려던 플레이어들은 방향을 잃고 가라앉았다. 어떻게 겨우겨우 건너편 배에 도착한 플레이어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구명줄을! 구명줄을 내려 주십시오!”
“구해 주세요! 제발!”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조롱뿐이었다.
“우리가? 왜?”
“그, 그게 무슨……! 투항하면 살려 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살려 준다고 했지, 구해 준다고는 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낄낄낄.”
“그러게. 믿을 게 없어서 해적들의 말을 믿나. 저것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플레이어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악다구니와 비명만 잔뜩 지를 뿐.
쾅!
쾅!
그사이. 트리톤의 배들이 터뜨린 포탄은 시시각각 유령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배리어가 형성되면서 포탄을 허공에서 막아 내고, 정령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잔여 여파를 흩뜨렸다.
그럴 때마다 하이디의 몸이 크게 들썩였지만, 그녀는 악착같이 버텼다. 선원들도 그녀를 도와 스킬을 계속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마력 소비가 훨씬 적다는 점이었다.
‘히든 피스! 이 배, 자체에 그런 기능이 숨겨져 있었던 거야!’
하이디는 왜 그제야 연우가 카론이 아닌 식인괴인을 선택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해왕류들이 나타나 난리를 쳐도 버틸 만큼 단단한 내구도를 자랑하더니, 자체적으로 플레이어들의 마력 소비를 크게 줄여 주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하이디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방어에 임할 수 있었다. 이따금 정령들이 소멸되면서 반발력으로 마력 경로가 꼬이긴 했지만, 그래도 버틸 만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령을 부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원들에게 힐과 버프를 계속 실어 주었다.
“막아! 어떻게든!”
그리고 그런 하이디의 노력에 힘입어. 식인괴인들은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대체 어디서 난 건지, 배 여기저기서 포문이 열리더니 유령선도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한 것이다.
퍼퍼펑-
공방전이 바쁘게 오고 가면서, 강물 위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플레이어들은 급류에 휩쓸려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비명과 절규는 포성에 묻혀 사라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울프는 그런 상황이 영 탐탁지 않았다. 비교적 잘 버티고 있는 유령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식인괴인이 만든 배에 대해서 독식자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반드시 난파를 시켜 놔야만 했다.
“안 되겠다. 우선 강제로 나포라도 해야겠어.”
울프의 지시에 따라 그의 배가 유령선 쪽으로 빠르게 미끄러졌다. 배를 부딪치게 해서 전력을 저쪽으로 옮겨 강제 점거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하이디도 그것을 발견하고 울프의 배를 막으려 했지만. 워낙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탄 때문에 한곳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울프의 배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부딪친다아!”
델란이 기겁해 하면서 충돌에 대비하려던 그때.
콰아앙! 갑자기 수면이 들썩이더니 엄청난 폭발 소리와 함께 물기둥이 높게 치솟았다. 유령선과 울프의 배가 충돌하면서 생긴 물기둥이 아니었다. 울프 측의 선저(船底, 배의 밑바닥) 부분에서 갑자기 일어난 폭발이었다.
물기둥은 하늘 높이 우뚝 섰다가 물보라가 되어 떨어졌다. 대신에 그 자리는 시커먼 불기둥이 대신 차지했으니.
콰르르-
울프의 배는 어떻게 손을 쓰지도 못한 채, 두 동강이 난 채로 강물에 가라앉고 말았다.
울프도, 배에 타고 있던 트리톤의 플레이어들도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불기둥의 위에는. 연우가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