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트리톤 (4)
쾅!
“흡!”
벤티케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트라이아나를 위로 재빠르게 끌어 올렸다. 그러자 어느새 비그리드가 목젖 부근까지 다다라 가로막혀 있었다. 연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등골을 따라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대체 언제 이렇게 다가온 거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기에 벤티케는 더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역시.”
입가를 따라 미소가 잔뜩 번졌다.
“재미있어!”
벤티케는 짐승을 닮은 눈빛을 띠면서 연우를 바라봤다. 바로 눈 앞까지 다가온 가면은 악마의 얼굴을 연상케 해서 끔찍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지금 연우의 살벌한 기운과 너무 잘 어울렸다.
“너, 나와 비슷한 과구나.”
벤티케는 연우의 눈을 직시한 순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녀석도 맹수라고.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알파 수컷으로서 무리를 짓기를 좋아하는 데 반해, 연우는 고독하게 홀로 돌아다니는 녀석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건 전부 똑같았다.
살벌하고, 흉폭하고.
겉으로는 냉정한 척 굴고 있어도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을 물어뜯고 집어삼켜야 직성이 풀리는 맹수가 숨어 있었다. 가면 속 눈동자가 그랬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연우는 그런 벤티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16층에서. 우르드가 말했었다. 그는 괴물이라고. 그것도 길들여 지지 않은 맹수와도 같은 괴물.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그는 누구보다 포악하다고 했다. 다른 누군가가 앞에 있는 것을 싫어하며, 자신의 것을 앗아가는 자에게는 어떻게든 철저하게 응징한다는 말도 했다.
고독한 척, 슬픔에 잠긴 척, 후회와 비탄에 잠긴 척하는 것은 그런 맹수와 마주하기 싫어서 보이는 심리적인 방어 기제일 뿐이라고.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철창 속에 갇힌 맹수를 자유롭게 풀어 주라고. 그런다면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며, 원하는 모든 것을 독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하지만 연우는 그 말을 부정했다.
우르드에게 휘둘리기 싫었고, 동생에게 부끄러운 형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말 어느 곳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복수로 시작했던 모든 일들에서. 한시라도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에서 연우는 언제부턴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발톱을 기르고, 이빨을 뾰족하게 세우고, 몸이 단단해질수록. 날개를 높이 세우며 먹이 사슬의 가장자리를 보게 될수록.
연우는 강한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아포피스의 허물과 식인왕을 상대하면서 확실해졌다.
원래대로라면. 히든 보스를 처치해서 얻을 공적치와 히든 피스에만 관심을 가졌을 테지만. 이제는 녀석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하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었다.
강해진 힘을 마음껏 풀어보고 싶은 것이다.
다 자란 맹수가 어떻게든 제힘을 맘껏 뽐내고 싶어 하듯이. 그렇게 해서 더 높은 서열로 올라가려 하듯이.
연우의 마음 한편에 숨어 있던 맹수도 그러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어느덧 철창이 조금씩 엷어지기 시작하면서, 맹수는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우는 그것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맹수?
그런 게 있다면 어떤가.
연우가 여태 두려워했던 것은 맹수가 울타리를 빠져나와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었을 뿐. 하지만 거기다 고삐를 제대로 채울 수 있다면. 외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끼기기기-
연우가 비그리드를 더 세게 밀어붙였다. 검신을 따라 검은 오러가 피어오르면서 뜨거운 열풍을 발산했다.
“그래. 그럼 더 재미있어지겠군. 네 목에 차고 있는 목걸이에 대한 건…… 그래. 일단 널 때려잡고 나서 생각하는 게 훨씬 편하겠어. 그렇지?”
벤티케는 열풍에 맞서 냉풍을 토해 냈다. 트라이아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비그리드를 밀어내고, 창끝을 연우에게로 연거푸 찔러 넣었다.
쉬시식-
마치 포탄이 연달아 터지듯이. 트라이아나는 강렬한 파공성을 내면서 연우의 가슴팍과 머리를 노렸다. 발아래 깔려 있던 망자의 강이 딸려 오면서 강렬한 수압을 터뜨렸다.
퍼퍼펑!
연우는 정면에서 공세에 부딪쳤다. 치고, 흘리고, 찌르고. 칼끝에서도 폭발이 일어나면서 수압을 밀어내니. 쇳소리는 폭발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쉽게 열리질 않는데.’
연우는 연격(連擊)을 쉴 새 없이 퍼부어 댔다. 의념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그는 어느새 명인 급의 경지에 올랐고, 그만큼 팔극검도 더 큰 발전을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매섭고, 강렬하다. 단천, 쇄연, 사일, 벽뢰. 파공, 궤월, 관악, 철토로 이어지는 8대 비기는 이제 물 흐르듯이 자유로워서 초식의 구분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이만한 실력이라면. 외뿔부족에서도 상급 전사 이상이 아니고서야 절대 쉽게 막아 낼 수 없을 거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일반 플레이어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벤티케는 용케 연우의 연격을 잘 막아 냈다. 아니, 오히려 허점을 노리고 찔러 드는 등, 반격까지 선보였다.
그 역시 연우에 못지않은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단 뜻이었다.
콰콰쾅-
[시차 괴리]
연우는 한껏 느려진 세계 속에서 녀석의 허점을 찾아 깊게 파고들었다.
결은 두 곳을 점지하고 있었다.
왼쪽 발목, 아킬레스건과 오른쪽 허리.
[바람길]
여기에 용마안을 활짝 열면서 새로운 스킬을 가동시키자, 아킬레스건과 우측 허리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이 보였다.
연우는 그중에서 우측 허리로 이어지는 길을 밟았다. 삭풍이 일어났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사막의 바람이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 비그리드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여기에 비그리드가 가지고 있던 옵션도 더해졌으니.
[검의 승화]
[영웅 - 불굴]
적수로 지정된 벤티케의 능력치와 연우의 투지가 섞이면서 전투력을 대폭 상승시켰다.
설명은 하나같이 길었지만, 찰나에 벌어진 계산이었고, 공격이었다. 연우는 이번에야말로 벤티케의 허리춤과 가슴팍에다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쾅!
어느새 트라이아나가 허리춤을 가로막고 있었다. 비그리드는 다시 도중에 가로막혀 옴짝달싹 못했고, 그사이 벤티케가 왼손을 풀어 앞으로 쭉 내밀었다. 손바닥에서 장풍이 일어났다.
〈해일장(海溢掌)〉. 거대 해일의 힘이 잔뜩 응축된 장풍이 폭발하면서 연우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큽!”
연우는 망치로 심장을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실 끊어진 연처럼 몸뚱이가 단번에 뒤로 튕겨 났고, 벤티케는 허공을 강하게 박차면서 수면 위를 그대로 미끄러졌다. 창날을 앞으로 내밀자, 바람이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날아들었다.
〈볼텍스(Vortex)〉. 벤티케가 포세이돈의 사도가 되기 직전, 창의 달인으로서 명성이 자자할 때 그를 상징했다던 시그니처 스킬이 터졌다.
창대를 쥐고 원을 크게 그려 와륜(過輪)을 만들고, 이 속에다 오러를 섞어 날리는 스킬. 단거리와 원거리를 모두 요격할 수 있어서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포세이돈의 권능까지 담겼으니. 게다가 망자의 강물이 섞이면서 강렬한 수압까지 더해져 바위에도 말끔한 구멍을 낼 정도로 강한 관통력을 자랑했다.
그런 볼텍스가 수십 개. 마치 길쭉한 가시가 소낙비처럼 떨어지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연우는 오러를 넓게 펼쳐 수십 개에 달하는 볼텍스를 모두 막아 냈다. 외뿔부족에서 검막(劍幕)이라고 부르는 기예였다.
콰콰쾅-
화려한 폭발이 다시금 허공을 요란하게 수놓고.
그 아래로 벤티케가 바짝 쫓아와 어느새 연우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그는 마치 도망치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흉폭하게 웃으면서 트라이아나를 횡으로 휘둘렀다. 창날 아랫부분에 박혀 있던 사파이어가 환한 빛무리를 터뜨렸다. 권능, 폭풍우가 일어나 연우를 덮쳤다.
연우는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불의 날개와 용의 날개를 한껏 퍼덕이면서 허공에서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고, 폭풍우가 닥치기 직전에 왼손으로 수면을 강하게 내리쳤다.
두웅-
마치 범종을 두들기는 듯한 맑은 소리와 함께 수면을 따라 기다란 파문이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목에 걸고 있던 케토의 신물, 해수 부적이 환한 빛을 뿌렸다.
신물 속에 내재되어 있던 신력이 다시 대량으로 소모되었다.
대신에 저 아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해왕류 수십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벤티케를 집어삼켰다.
“이 귀찮은 것들이!”
벤티케는 머리를 덮쳐 오는 거대한 그림자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폭풍우의 권역을 안 쪽으로 잡아당겼다.
벤티케를 중심으로 용오름이 높게 치솟았다. 녀석을 노리던 해왕류들은 용오름에 휩쓸리면서 죄다 갈려 나가고 말았다. 마치 믹서기에 넣어진 바나나처럼.
형체를 잃어버린 살점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망자의 강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러다 용오름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을 때.
별안간 연우가 벤티케의 후방에서 나타났다. 벤티케가 아차 싶어 몸을 반대로 꺾으려 했지만.
퍽!
비그리드는 어느새 오른쪽 가슴팍을 뚫고 지나갔다.
“하! 하하!”
벤티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건 분노를 드러낸 얼굴이 아니었다. 희열. 기쁨. 너무 즐거운 나머지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 이거지! 이런 싸움. 이런 게 필요했어. 너도 그렇지 않나?”
연우는 녀석의 말에 아주 잠깐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단 사실을 잊고 얼굴을 만질 뻔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은. 웃고 있을까? 아니면 평소처럼 무표정할까? 거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네 눈도 웃고 있어. 그 속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하지만 그런 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
이렇게 모처럼 잡은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우는 비그리드에다 왼손을 얹었다. 그리고 더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가면을 벗겨 주지.”
그때. 트라이아나에 박힌 보석이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보석 안쪽으로 남색 물감이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개방되는 신력.
벤티케는 비그리드가 자신의 몸뚱이에 박히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몸을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 말한 대로 연우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서 왼손을 쭉 내밀었다.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잔뜩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완력에서 밀린 연우는 벤티케와 함께 그대로 수직으로 떨어졌다. 수면이 갈라지면서 두 사람은 순식간에 해저 바닥에 다다르고 말았다.
찍어 누르는 벤티케와 위로 밀 어내는 연우. 둘의 팽팽한 힘겨루기에서 파생된 기세가 충돌을 거듭했다.
권능과 권능이 부딪쳤다. 폭풍우로 망자의 강이 요란하게 흔들리면서 해류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해왕류와 해수류가 휘말려 서로 충돌하고, 몸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피 보라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아즈라엘, 아가레스, 아테나 등, 손꼽히는 신과 악마들이 던져 준 권능들이 사방으로 발산되면서 망자의 강물을 그대로 떠밀었다. 망자의 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시간이 갈수록. 벤티케의 힘은 차츰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계속 커졌다. 트라이아나에 박힌 보석이 남색으로 물들수록, 신력이 더 많이 투입되면서 생긴 결과였다.
그러다 보석이 완전히 짙은 남색으로 꽉 찼을 때. 트라이아나에 남은 신력도 마저 개방되었다. 그 순간, 벤티케의 격은 몇 단계나 급상승했다.
〈해신 강림〉. 포세이돈과 같은 대신을 모신다는 것은 사도로서 일반 사도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격을 터득한다는 것과 같았다. 또한, 대신은 채널링을 통해 막대한 힘을 내릴 수가 있었다.
현재 벤티케가 그랬다. 게다가 그는 여태껏 수하들에게도 나눠 줬던 포세이돈의 가호를 모두 거둬들여 자신에게만 부여했고, 그렇게 집중된 가호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 파괴력을 몇 배나 부풀렸다.
반면에 연우는 여러 대신과 대악마의 권능을 지니고 있어도, 사도가 아닌 이상 채널링으로 받을 수 있는 가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벤티케의 힘이 압도적인 기세로 연우를 보호하던 권능을 모조리 부쉈다.
그의 왼손이 연우의 가면을 짚었다. 우지끈. 우악스러운 악력이 가해질수록, 가면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아테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릅니다.]
[아테나가 다급히 달아날 것을 종용합니다!]
[아테나가 가호를 내립니다.]
[불발됩니다.]
[아즈라엘이 눈을 크게 뜹니다.]
[아가레스가 다급하게 사도직을 다시 한 번 더 제안합니다.]
[헤르메스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포세이돈이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 소속의 신들이 모두 당신을 지켜봅니다.]
[케토가 물끄러미 당신을 지켜봅니다.]
그렇게 연우의 망막을 따라, 메시지가 요란하게 올라갔다. 따라 붙은 시선 속에 섞인 감정들이 더 강렬해졌다.
‘시끄러워.’
연우는 위기 상황에 잠겼는데도 불구하고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면서.
해수 부적에 남아 있던 신력을 뽑아 비그리드에다 불어 넣었다. 검은 오러가 폭발했다. 화산이 폭발하듯이, 해저에서부터 높은 불기둥이 솟구쳐 수면을 뚫고 하늘에 다다랐다.
그 속으로. 벤티케가 휩쓸렸다.
* * *
“후우…… 후우…….”
천지가 개벽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란했던 재해가 몇 번이고 불어닥치다, 겨우 잠잠해 질 때쯤.
연우가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불의 날개에 의지한 채 겨우 위로 올라온 그는 거칠게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마장과 가면이 많이 망가져 있었다. 신력을 모두 잃은 해수 부적은 이제 빛을 완전히 잃어 신물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일반 목걸이에 불과했다.
벤티케와의 싸움은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전력을 다해 부딪쳐도 승부를 자신할 수 없을 만큼.
하지만 몸은 지쳤어도, 여태껏 아포피스의 허물과 식인왕을 상대하면서 알게 모르게 쌓였던 욕구 불만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더불어 연우는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실력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벤티케가 패왕이라 불릴 정도로 손꼽히는 강자로 통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층 구간에 그에 못지않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태껏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많은 랭커와 하이 랭커를 만났었다지만.
여전히 위에는 아래 층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위로 가려는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벤티케도 그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연우는 감사했다. 잠재력이 깊어진 만큼. 더 강해지고자 하는 열의에 다시 불을 지필 수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고요한 눈빛으로 정면을 직시했다. 망가졌던 가면과 마장이 다시 복구될 때쯤, 저 앞에서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고온으로 펄펄 끓고 있는 망자의 강 위로.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던 증기들이 한데 뒤섞이더니 사람의 형상을 떴다. 그리고 뼈가 생성되고, 그 위로 근육과 살점이 붙으면서 벤티케가 되었다.
녀석은 어느새 검은색으로 물든 트라이아나를 꽉 쥔 채 포악하게 웃고 있었다.
연우는 녀석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괴물 같은 새끼.”
“크할할! 누가 누구더러 괴물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야 포세이돈의 가호를 받았으니, 이렇게 재생이 가능하다지만. 넌 그게 아니지 않으냐?”
망자의 강은 물이다. 포세이돈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곳. 당연히 그의 가호를 받는 벤티케에게 유리한 전장일 수밖에 없고, 이곳에서는 그의 재생력 역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도 지친 기색은 역력했다. 풍기는 기세가 이전과 비교할 게 못 되었다. 트라이아나의 보석이 탁하게 물든 게 그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승부를 내지 못했고, 나는 아직 네가 걸고 있는 그 목걸이에 대해 듣지 못했다. 네가 누군지도. 그러니 계속 이어 나가야 하지 않겠나?”
포세이돈은 트라이아나의 끝을 다시 연우에게로 겨누었다.
연우도 똑같이 비그리드를 들었다. 그러나 좀처럼 힘이 실리지 않았다. 현자의 돌이 과열되면서 활력을 불어넣는 중이었지만, 정신적 피로까지 쫓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연우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희열.
오히려 육체가 지치니, 맹수로서의 본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녀석은 여태 자신을 가두던 울타리를 옆으로 치우고, 천천히 밖으로 나오려 했다.
연우는 어쩌면.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모처럼 만난 적수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부딪칠 수 있다는 사실에.
“넌 신물을 잃었다. 포세이돈의 저주로 권능들도 약화되었고.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 트라이아나에 있는 신력도 모두 소진되었고, 포세이돈의 가호를 받기에도 육체가 엉망이다.”
그리고 그런 기쁨은 트리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다른 도움을 일절 받지 않은 채. 서로가 가진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며 부딪칠 수 있단 뜻이지. 이건 이것대로 재미나지 않겠나?”
“…….”
연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벤티케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 되었다.
“참 말이 없는 친구로군. 하긴 쓸데없이 쫑알쫑알 말이 많은 것보단 그게 낫겠지만.”
이윽고. 두 사람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몸을 앞으로 날리려는 순간.
“……음? 뭐야, 이거?”
벤티케는 수면을 박차려다 말고, 갑자기 우뚝 멈추고 말았다. 손에 쥐고 있던 트라이아나가 거세게 요동쳤다. 신력을 모두 소모해서 당분간 일반 창과 다를 게 없을 텐데?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상 현상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츠츠츠-
트라이아나가 갑자기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잘게 부서지더니, 고운 입자들이 벤티케의 손가락 사이를 통과해 연우에게로 다가갔다.
“……!”
“……!”
벤티케도. 연우도 모두 놀라 두 눈을 부릅뜬 순간.
우웅, 웅-
갑자기 연우가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던 검은 팔찌, 칠흑왕의 팔찌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치 쇳가루들이 자석을 따라 모여드는 것처럼. 트라이아나의 고운 입자들은 돌개바람을 그리면서 칠흑왕의 팔찌 주변을 맴돌다가, 곧 왼쪽 발목에 감겼다.
촤르륵, 촤르륵-
철컹! 철컹!
밤하늘을 퍼 올린 것 같은. 칠흑색으로 빛나는 족쇄가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