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트리톤 (5)
‘합쳐져?’
연우는 자신의 왼쪽 발목을 감은 족쇄와 쇠사슬을 보고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 그도 도무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머릿속이 단단히 굳고 말았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제우스의 아스트라페. 겨우 얻은 신물이 눈앞에서 망가져서 허탈했지만, 그래도 검은 팔찌의 사용법을 깨달아 가면서 아스트라페에 못지않은 물건이란 걸 알게 되었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냥 단순히 신물을 흡수하는 특성을 지닌 신물이라면 모를까. 검은 팔찌는 그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먹는 신물은 특징이 있었다.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아주 유명한 형제 신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이 검은 팔찌의 주인과 무슨 관계인 걸까.
‘칠흑왕. 그자가 누구기에……?’
[칠흑왕의 비탄]
분류: 발목 방어구
등급: ???
설명: ???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인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타인으로의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현재 아무런 정보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야만 권한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티팩트가 어떤 특징을 지녔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이름이 ‘비탄’이라는 것뿐.
연우는 아티팩트를 확인하는 와중에도 얼떨떨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리고.
놀라는 건 연우뿐만 아니라, 98층도 마찬가지였다.
[아테나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습니다. 돌발 상황에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헤르메스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습니다.]
[헤르메스가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아즈라엘이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즈라엘이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경악에 잠깁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헤르메스를 찾아갑니다. 헤르메스가 무관심으로 응대합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침묵을 지킵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탄식을 내뱉습니다. 다가올 뭔가가 있다며 천기를 읽기 시작합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기뻐합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올림포스를 보면서 비웃습니다.]
[아가레스가 크게 좋아합니다.]
[아가레스가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포세이돈이 비명을 지릅니다!]
[포세이돈이 옥좌를 박차고 일어나 뭐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헤르메스와 아테나에게 항의합니다.]
[헤르메스가 무시합니다.]
[아테나가 코웃음을 칩니다.]
[포세이돈이 무언가를 다짐합니다.]
[포세이돈이 휘하의 제신(諸神)들을 불러 뭔가를 의논합니다.]
[포세이돈이 분노 어린 시선으로 당신을 노려봅니다. 대응책을 준비합니다.]
메시지는 쉴 새 없이 쏟아져 연우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특히 그중에는 못 보던 것이 있었다.
[도착한 메시지가 3개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메시지?’
각각 헤르메스, 아즈라엘, 아가레스가 보낸 메시지들.
사도가 아닌 플레이어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건 상당한 패널티를 각오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플레이어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니. 인과율을 부담하거나, 상당한 양의 신력과 마기를 소모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셋이서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일이 그들에게 큰 충격을 줬단 뜻이겠지.
연우가 어떻게 조작하기도 전에 메시지 내용이 활짝 열렸다.
[헤르메스의 메시지: 별일 아니니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
[아즈라엘의 메시지: 역시 너로구나! 네가 바로 그분의……!]
[아가레스의 메시지: 날 받아들여라! 날!]
헤르메스는 언제나 그렇듯이 당황하지 말고 너의 길을 가라며 응원을 해 주고 있었고, 아가레스는 또 무엇에 자극을 받았는지 미쳐서 날뛰는 중이었다.
다만, 아즈라엘의 메시지가 조금 이상했다.
‘그분? 혹시 칠흑왕을 말하는 건가?’
혹시 아즈라엘이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그의 반응이 뭔가 수상쩍었다.
마음 같아서는 연우도 아즈라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고. 칠흑왕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큰 건 그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여태껏 수수께끼에만 둘러싸여 있던 칠흑왕에 대한 비밀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칠흑왕은 단순한 신화 속의 옛 영웅이나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최소한 신격에 오른 자였다.
‘이를테면, 미후왕과 같은.’
칠흑왕의 절망과 비탄. 연우로서는 공으로 신물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전혀 나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반면에.
벤티케는 전혀 달랐다.
“이게 무슨……!”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을 강심장을 지닌 그였지만. 지금은 충격이 너무 컸던지 손가락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두 눈에 핏대가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가 노성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닥치시오!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어떻게 내 탓인가! 신이 되어 이깟 일도 예지하지 못한 당신 탓이지! 책망을 하려거든 정신 사나운 당신의 예지나 책망해! 아니면 미리 언질을 주지 못했던 아폴론을 찾아가서 따지던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대기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대체 누구에게 소리를 치는 것일까.
벤티케의 말에 화가 난 듯 하늘이 아주 잠깐 우르르 떨리긴 했지만, 벤티케는 코웃음을 치면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깊은 눈매로 돌아왔다. 손을 앞으로 쭉 내뻗자, 강물이 위로 길쭉하게 올라오면서 창을 만들어 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성질만 더러운 우리 신 때문에. 조금 못난 모습을 보였군. 다시 시작하지.”
역시 방금 전에 소리를 쳤던 대상은 포세이돈인 걸까.
연우는 보면 볼수록 벤티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인상을 받았다. 자신이 모시는 신에게 도리어 역정을 내는 사도라니. 특히 신으로서의 위엄을 가장 따진다는 포세이돈이 자신의 사도에게 이런 모욕을 받고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벤티케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는 이 싸움에만 집중하려는 것 같았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하자고. 모처럼 달아올랐던 흥이 깨져서 조금 짜증 나긴 하지만. 그런 거야 다시 두어 번 칼질하다 보면 돌아오지 않겠나?”
벤티케가 망자의 강물을 압축시켜 만든 창을 앞으로 내밀면서 웃었다.
아주 잠깐, 연우는 그런 녀석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벤티케는 아무 자세도 취하지 않는 연우를 보며 왜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눈빛을 읽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왜? 내가 좀 이상한가?”
“조금 정도가 아니지.”
“크할할할! 하긴. 내가 많이 이상하긴 하지.”
벤티케는 하늘이 떠나가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말을 마저 이었다.
“모시는 신에게 막말을 퍼붓질 않나, 신물을 잃고도 태연하질 않나. 하긴 나라도 상대가 그딴 태도를 보이면 어디 모자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것 같긴 하단 말이지. 하지만 말이야.”
벤티케는 잠시 말허리를 끊으면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뭐?”
그는 냉소를 짓고 있었다.
“보통 사람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나? 나 역시 궁금한 건 많아. 아니, 지금 난 너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그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이유는 뭔지, 내 신물이 변한 그 족쇄는 뭔지. 하지만 그깟 것들 따위는…… 너를 잡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당장 나에게 중요한 건, 바로 너와의 싸움이다.”
벤티케는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포악한 성정을 자랑하는 맹수가 숙적을 보는 살벌한 눈빛이 동공을 따라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테지?”
“…….”
연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비그리드가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치면서 흥이 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전투의 여흥은 여전히 남아 몸을 뜨겁게 만드는 중이었다.
벤티케의 말마따나. 지금 중요한 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녀석과 싸우는 것. 그리고 싸워서 이기는 것. 희열을 환희로 바꾸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비그리드의 끝을 앞으로 겨누었다. 팔극검의 기수식이 준비되었다. 울타리 밖으로 나왔던 맹수가 길게 포효했다.
콰앙-
둘은 다시 서로에게 몸을 날렸다. 거친 물살이 회오리쳤다.
* * *
연우가 벤티케를 보고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다.
물음표.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소하게는 동생의 스승을 죽인 원수였지만. 인간적으로 본다면 가까이해도 나쁠 게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설사 모시는 신이라고 해도 맞설 줄 알고, 결단력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잔혹하고 포악한 면모가 강하기 때문에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유형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우는 이런 사람들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같은 팀에 있으면 이따금 내분을 일으키기도 하니.
그래도 연우는 벤티케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재미있어.’
마음 놓고 실컷 싸울 수 있는 재미가 뭔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었다.
채채챙-
연우와 벤티케는 서로에게 쉴 새 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칼과 창이 부딪치면서 요란한 쇳소리를 내고, 이따금 쇠가 살을 파고 드는 소리도 났다.
퍼퍼퍽!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의 몸 곳곳에 깊은 상처가 늘어나면서 어느새 강물이 시뻘겋게 물들 정도였지만.
서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다쳤으면 간격을 좁힐 기회라 여기고, 몸을 더 깊숙하게 밀어 넣으면서 상대의 급소를 노렸다.
지금 연우가 그랬다.
창날이 복부를 깊숙하게 관통했다. 척추와 내장이 끊어지는 끔찍한 고통이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수면을 박차면서 더 깊숙하게 몸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콰드득-
[악마술]
[재생]
연우는 현재 다른 권능들보다도 이 두 가지 스킬에 의존하고 있었다.
마의 인자를 바탕으로 마기를 생성해 세포 속에 불어 넣고, 이것을 바탕으로 재생을 계속 벌이면서 상처를 꽉 붙들어 매는 방식이었다.
여태껏 이미 치사량이 훨씬 넘는 피를 흘렸지만 꿈쩍도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그깟 저급한 인자 말고, 내 것을 주지. 어때?]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어차피 내 것도 갖고 있잖아. 그걸 써 봐. 아주 좋을 거야. 응? 한번 써 보라니까? 나쁠 건 전혀 없잖아?]
연우는 계속 귀찮게 구는 아가레스에게 한 소리를 퍼붓고 싶었다.
나쁠 게 없긴 뭐가 없단 말인가. 동생이 아가레스와 계약을 맺고 난 뒤부터 줄곧 귀찮은 일에 휘말렸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그는 전혀 따를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아가레스의 메시지는 몇 번 오다가 그쳤다. 아마 할당된 인과율의 한계가 초과되어서 막힌 것 같았다.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벤티케와 간격을 좁힌 그대로 녀석의 목덜미에다 비그리드를 쑤셔 넣었다.
칼날이 목을 반쯤 밀고 들어갔다. 경동맥이 끊어지면서 피분수가 높게 치솟았지만. 칼날은 더 이상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단단한 뭔가에 가로막혔다.
벤티케는 눈빛을 이글거리며 몸을 측면으로 틀었다. 칼날이 뽑히면서 피가 더 많이 튀었고, 그 아래로 창이 커다란 와륜을 그렸다.
볼텍스. 그의 시그니처 스킬이 터지면서 연우의 몸뚱이에다 여러 개의 바람구멍을 냈다. 아니, 내려 했다.
연우는 바람길을 밟으면서 볼텍스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바람은 신풍(妃風). 빠른 바람에 의지하면서 그도 팔극검의 비기를 잇달아 풀어냈다.
볼텍스를 모두 피할 수가 없어 왼쪽 팔뚝과 오른쪽 장딴지 등 곳곳에 구멍이 났다. 하지만 비그리드도 그만큼 빠르게 공간을 가르면서 벤티케를 난도질했다. 피가 튀고, 뼈가 훤히 드러났다. 사지가 반 이상 잘려 나갔다.
저대로 몸 부위 하나가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둘은 일절 고통스러워 하는 기색 없이 칼을 측면으로 틀었고,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시야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끈질기기만 한 상대의 명줄을 완전히 끊어 놓기 위해서.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연우와 벤티케는 서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맹수들의 웃음소리. 아니, 그걸 두고 웃음소리라 할 수 있을까. 으르릉. 가래 끓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포효 같기도 했다.
그러다.
퍼퍽 -
퍽!
연우와 벤티케는 거의 동시에 상대의 급소에다 무기를 쑤셔 넣었다. 둘 모두 심장을 가르는, 차갑고 이질적인 감촉을 맛봐야만 했다.
그래도 둘은 끝까지 상대의 심장을 마저 부숴 놓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칼과 창을 밀어 넣었다.
울컥-
연우와 벤티케, 둘 모두 입가를 따라 핏물이 번졌다. 서로의 호흡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쳤다.
연우의 시야에 여전히 웃고 있는 벤티케가 잡혔다. 녀석은 죽어 가는 와중에도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고 있었다.
벤티케의 눈에도 연우가 담겼다.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 하지만 벤티케는 연우도 자신처럼 웃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떻게 아냐고?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맹수는 맹수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그러다. 벤티케는 문득 연우의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 이따금 자신과 대련할 때 저렇게 눈웃음을 짓는 녀석이 있었다.
“너……!”
벤티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던 그때.
촤르르-
째깍 째깍.
연우의 오른쪽 품속에 곤히 잠들어 있던. 회중시계의 바늘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 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