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84화 (284/862)

9화. 섬 (1)

원래 베이럭의 섬은 여러 방비 시설로 가려져 있어 위치를 특정해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연우도 섬을 포기하고 망자의 강을 건널 생각이었지만. 왈츠와 싸우던 중에 문득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해수 부적.

비록 대부분의 신력을 소모해서 신물로서의 기능은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기능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옵션, 바다의 노래를 사용해서 망망대해 어딘가에 있을 베이럭과 관련된 기억을 좇았다.

그리고 다행히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

연우는 잠시 몸을 숨길 은신처로 이곳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안티 베놈 베이럭이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요새. 당연히 외부에는 거의 공개가 되질 않아, 아무리 왈츠나 아르드바드 공작이라고 해도 추격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연우는 파악한 좌표를 그대로 식인괴인들에게 알려 주었다. 녀석들은 곧바로 키를 돌리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 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연우는 그동안 망가진 육체를 수복하는 데 전념할 생각이었다.

* * *

“마음 놓고 잘도 자는군.”

연우는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분명히 모든 의념을 현자의 돌에다 집중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이상한 별세계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세계. 위와 아래를 구분하기 힘든 곳.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홀릴 것 같은 곳이었다.

무저갱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어둠 위에. 녀석이 있었다.

잿빛으로 빛나는 형체. 그림자처럼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목구비의 구분은 없었다. 그저 얼굴 아랫부분에 포물선 모양으로 쭉 찢어진 입 같은 것만 나와 있을 뿐.

녀석이 연우를 이곳으로 초대한 범인이었다.

마성(魔性).

연우가 자각한, 여태 철창 속에 갇혀 있던 괴물. 혹은 맹수.

연우가 녀석을 보면서 물었다.

“뭐냐, 또?”

“왜? 부르면 안 되나? 그래도 난 명색이 너의 또 다른 인격인데. 쌍둥이 같은 거라고. 동생이 형을 보고 싶어서 불렀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연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화아악-

그를 따라 맹렬한 바람이 불었다. 뜨거운 열기가 잔뜩 섞인 바람. 화가 났다는 표시였다.

“그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라.”

쌍둥이. 동생. 형. 이딴 말을 마성이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쾌했다. 연우 앞에서 절대 쉽게 거론해서는 안 될 단어들이었다.

마성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크크큭. 말 몇 마디 했다고 이렇게 쉽게 화를 내는 꼴이라니. 이래서야 냉철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어? 냉혈? 특성이 울고 가겠어. 안 그래?”

고오오-

“그래. 알았다고,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키키키킥!”

마성은 말만 미안하다고 할 뿐,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연우는 아주 잠깐 녀석의 면상에다 주먹을 꽂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곧 조용히 불의 날개를 거둬들였다.

벤티케, 왈츠와의 계속된 싸움으로 피로가 만만치 않은 상황.

여기서 마성과 겨뤘다가는 정말 정신적 타격이 클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한창 회복 중인 육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테니 꾹 눌러야만 했다.

대신에 그는 깊게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는 마성을 노려봤다.

“날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뭐지?”

“아, 그거? 맞다. 뭐 할 말이 있어서 널 불렀었는데. 뭐였더라?”

연우의 낯이 다시 굳어지는데, 갑자기 마성이 무릎을 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거로군. 키키키킥.”

녀석은 주먹으로 다시 입가를 가리면서 키득거리더니, 입꼬리를 흉측하게 옆으로 쭉 찢으면서 말했다.

“이봐. 너, 너무 약한 거 아냐?”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성의 힐난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난 지금 네가 무르익길 기다리고 있다고. 그런데 그딴 짓들은 뭐야? 현자의 돌, 마룡체, 칠흑왕의 절망, 비그리드……. 그 좋은 것들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밖에 못 해? 나 참, 답답하다. 답답해.”

마성은 검지만 쭉 펴면서 좌우로 까닥거렸다.

“그러면 안 된다고. 어? 좀 더 분발해. 좀 더. 그래야.”

잔뜩 벌어진 입가 사이로 송곳니 같은 것이 보였다. 허기에 굶주린 괴물의 이빨.

“내 굶주린 배를 채우지.”

* * *

‘제대로 미친놈이군.’

연우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두통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마성과 대면하면서 생긴 후유증인 걸까.

하지만 두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연우는 몸이 쓰러지기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가벼운 정도가 아니었다.

재생 스킬이 있어도 족히 며칠을 꼬박 누워 있어야 할 중상이, 7할가량 회복되어 있었다.

순간, 무의식 세계에서 쫓겨나기 전에 마성이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니 일단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좀 더 분발하라는 뜻에서 주는 거니까, 요긴하게 잘 써야 할 거야.

마성은 현자의 돌에 잠들어 있으니. 돌의 숨겨진 기능 중 일부를 풀어 육체 수복에 도움을 준 것 같았다. 마치 적선을 하듯이.

- 잊지 마. 마지막이라고, 마지막. 키키키킥!

그리고 그 기괴한 웃음소리도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여긴……?’

연우는 마력을 천천히 돌려 마성이 남긴 찝찝한 여운을 모두 쫓아내고,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나무로 된 벽은 아무것도 걸리지 않아 휑했다. 익숙한 정경이었다.

‘선장실이군.’

연우는 천천히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선장실을 나섰다.

그러자 희뿌연 안개가 그를 맞았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짙은 안개. 갑판은 여러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가면서 어수선했다.

“우선 돛을 내려! 지금부터는 정속으로 움직여야 해. 안개 안쪽으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

“로프! 로프 어디다 뒀어!”

“뱃머리를 동남쪽으로 돌린다. 모두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사람들도 모두 안개에 가려져 목소리만 크게 울렸다. 뱃머리가 천천히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자, 연우는 난간을 붙잡으면서 해수 부적의 옵션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과 함께, 시야가 높은 상공에 맺혀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일단은 제대로 왔나.’

다행히 혼절해 있는 동안, 지시한 대로 배는 좌표에 맞게 잘 도착한 것 같았다.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도착한 것 같았다. 배의 위치는 베이럭 섬 근방이었다.

이 안개는 섬의 영향권에 다다르자, 인위적으로 발동된 방비 시스템이었다.

안개 속에 다른 짓은 해 두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아무것도 모르고 우연히 흘러들어 온 배들의 머리를 돌리게 하기 위해서 설치해 둔 것 같았다.

보통 앞을 분간하기 힘들면 해역을 빨리 벗어나려 할 테니.

‘천하의 안티 베놈이 자기 영역을 침범한 사람들을 그냥 순순히 보내 준다니. 웃길 노릇이야. 아니면 그만큼 여기를 숨기고 싶었던 건가.’

원래 베이럭의 성격이라면 안개에 독이라도 섞어서 몰살을 시키거나, 단체로 생포해서 실험체로 삼았을 테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흉흉한 소문이 퍼져서 도리어 이목을 끌 수 있으니 이 선에서 그친 모양이었다. 아마 섬에 그만큼 중요한 설비가 있단 뜻이겠지.

그리고 아마도 여기서 더 깊게 배를 몰고 들어간다면, 그때부터는 제대로 된 방비 시설들이 작동할 게 분명했다.

‘미리 처리해 둬야겠지.’

다행히 용마안으로 대부분의 시설들을 찾을 수 있으니, 작동하기 전에 미리 제거를 해 둘 참이었다.

그래서 갑판으로 천천히 움직이는데, 인기척을 느끼고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면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어수선했던 갑판이 금세 조용해졌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연우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그때, 유일하게 하이디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는지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절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연우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연우는 괜찮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아공간에서 마장대검을 뽑아 뱃머리 쪽으로 움직였다.

곳곳에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몇몇 플레이어들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재빨리 선두 부분에서 후다닥 도망쳤다.

하이디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을 해하려는 게 아닐 걸 알면서도 저러니. 이렇게 모진 고생을 함께 했었어도, 여전히 연우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시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선두에 멈춰 서서 마장대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검은 오러가 곳곳으로 발출되어 안개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헛손질을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퍼퍼펑-

곳곳에서 미약하게나마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연우는 한참 더 주변을 돌아보다가 마장대검을 다시 아공간으로 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와 하이디에게 말했다.

“육지에 도착하면 다시 불러.”

“네.”

연우는 하이디의 대답을 뒤로하고 다시 선장실로 돌아갔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 * *

안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안개는 더 뿌옇게 끼어 이제는 정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

플레이어들은 이대로 있다가 안개 속에 갇혀 남은 일수를 허망하게 날리는 게 아닌가 하고 노심초사했지만.

곧 거짓말처럼 안개가 확 걷히더니 맑은 시야가 찾아왔다.

저 멀리, 섬이 있었다.

“섬이다!”

“육지다! 정박할 준비 해!”

플레이어들도 하나같이 반가운 기색을 뗬다.

트리톤, 벤티케, 아르드바드 공작, 왈츠까지. 워낙에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었기에 피로가 잔뜩 몰려와 육지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는데. 때마침 섬을 발견한 것이다.

비록 새로운 대륙이 나타난다는 29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만 해도 그들에게는 감지덕지한 장소였다.

더구나 외부에서 봤을 때, 섬은 절대 나쁘지 않았다. 그들이 떠났던 섬은 해변이 너무 넓어 경관이 조악했던 데 반해, 이곳은 잡초와 들꽃이 많이 피어 있어서 환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더구나 얼핏 보기에도 곳곳에 사람들이 산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식인괴인 대신에 28층을 주 무대로 살아가는 플레이어들이 터를 잡은 마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무럭무럭 자랐다.

섬 한쪽에는 그럴듯한 정박장도 마련되어 있었다. 유령선은 천천히 거기에 뱃머리를 댔고, 플레이어들은 드디어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하이디의 지시에 따라 3인 1조로 편대를 구성했다. 육지가 반갑더라도,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상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겉보기와 달리 식인괴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플레이어들은 각 조별로 다른 구역에 대한 수색을 명령받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단은 섬의 환경과 지형을 먼저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연우는 마지막으로 하선하면서 주변을 돌아봤다.

‘일기장 속에서 봤던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인데.’

베이럭의 섬은 원래 팀 아르티야가 개척했던 섬. 당연히 일기장 속에도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대략적인 지형과 경관을 제외하면 이렇다 하게 눈에 밟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섬도 베이럭의 손때를 많이 탔단 뜻일 테지.

연우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섬 안쪽으로 걸어갔다.

섬 내부는 외부보다 훨씬 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울창하던 숲은 거의 벌목되어 휑했고, 대신에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여러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곳곳에 실험장으로 보이는 곳들도 있어, 마을이라기보다는 작은 도시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플레이어들도 전혀 생각지 못한 광경이 드러나자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었다.

절대 해적들의 거주지는 아니었다. 성격이 급하고 사나운 녀석들이 이렇게 반듯한 도시를 만들 수는 없었다. 곳곳에 무기장이며 실험실, 휴식을 위한 공원이나 산책로도 따로 있었다.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클랜이 철저한 계획하에 형성한 곳인 게 분명했다.

족히 천 명이 넘는 인원들을 수용해도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곳.

다만, 문제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 게 분명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대규모 이주를 한 흔적도 없었다.

각 집에는 요리를 하다가 만 흔적이 있거나, 책상 위에 책이 고이 펼쳐져 있기도 했다.

이주를 했다면 필요. 물품들은 모두 챙겨 갈 법도 한데, 집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기고에는 무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실험실에도 갖가지 서류며 책자, 실험 집기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외부에서 침입을 한 것 같은 흔적도 없었다.

마치 섬에서 사람들만 고스란히 증발한 것 같은 모습.

휑한 마을은 꼭 유령 도시를 떠올리게 해서 으스스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거?”

처음 사람들이 사는 곳에 도착했다며 좋아했던 플레이어들도, 왠지 모르게 드는 불안감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다 그들은 마을의 가장 북쪽에 놓인 거대한 첨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원처럼 보이는 건물의 끄트머리에는 익숙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조금씩 잊히던 문장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어? 저거?”

“저 문장, 아르티야 아니야?”

그리고. 그 문장은 뒤늦게 따라 온 연우의 눈에도 단단히 새겨졌다.

검을 아래로 세운 십자가에 한 쌍의 날개가 맺힌 문장.

“이 섬, 원래 아르티야의 영토였어?”

누군가가 중얼거린 혼잣말이 연우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가면 아래.

그의 눈빛이 잔뜩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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