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85화 (285/862)

10화. 섬 (2)

“카인?”

하이디는 첨탑의 문장에서 시선을 거둘 줄 모르는 연우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에는 갖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분노, 짜증, 경멸, 멸시……. 비록 그런 격한 감정들은 금세 가라앉긴 했지만, 하이디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태껏 그녀가 봤던 연우는 언제나 냉철했으니까. 그런 반응을 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돌아와 하이디를 돌아봤다. 왜 불렀냐는 눈빛.

하이디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턱짓을 했다.

“이 위쪽부터는 내가 조사해 볼 테니, 너는 아래쪽을 살펴라. 그리고.”

“네. 아무도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말해 두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하이디는 연우가 하려는 말을 깨닫고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를 지나쳐 천천히 첨탑으로 향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연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곧 뒤돌아서 플레이어들을 다른 곳으로 흩뜨렸다.

때문에. 그녀는 미처 듣지 못했다.

첨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연우가 이를 악무는 소리를.

바득.

“개새끼가. 감히…….”

* * *

연우는 화가 치밀었다. 이 첨탑에 다다르면서도 그는 이미 분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동생과 관련된 흔적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짜증 났지만.

그래도 베이럭의 생산 기지인 이 섬을 철저하게 조사하면 약점을 파악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냉정하게 시설들을 파악하고자 했다.

베이럭은 탑 내에서도 손꼽히는 독인(毒人)이었고, 옆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릴 정도로 지독한 독기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녀석이 내뿜는 숨결은 웬만한 나무의 생명까지 앗아 갈 정도였다.

당연히 그런 녀석을 앞으로 상대하려면 연우로서도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독의 상극이라 할 수 있는 화 속성을 지녔다지만, 녀석이 부리는 독 중에는 그런 속성도 넘나 드는 기형독(奇形毒) 역시 아주 많았다.

그러니 육체를 회복하는 동안, 섬 내부 구석구석을 철저하게 조사할 예정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갖가지 독의 제조나 실험이 진행되었다면, 알아 낼 게 많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대충 섬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녀석과 관련된 많은 비밀이 묻혀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많은 인원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건지. 왜 섬을 그 대로 놔두고 떠난 건지는 알 수 없어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연우는 냉정을 되찾으면서 상황을 하나둘씩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세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평소 베이럭이 섬을 찾을 때면 주로 머문다는 첨탑에 도착한 순간. 탑의 가장 끄트머리에 새겨진 아르티야의 문장을 발견하고 말았다.

어떻게 화가 안 날 수가 있을까.

마지막까지 동생의 육체를 좀 먹던 극독을 발명한 건 베이럭의 솜씨였다. 심장에다 칼을 박아 넣고, 동생을 돕고자 하던 여러 플레이어들을 몰살시켰던 것도 베이럭이었다.

리언트와 바할은 다른 세력으로 전향을 했다지만, 베이럭은 비에라 듄과 마찬가지로 가장 적극적으로 동생을 무너뜨린 작자였다.

아르티야에 대해서 거론할 자격도 없는 녀석이, 아르티야의 문장을 첨탑에다 새겨 놔?

으드득-

마음 같아서는 이 첨탑은 물론, 섬에 있는 모든 것들을 깡그리 밀어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억눌렀다.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첨탑에다 아르티야의 문장을 박아 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조롱과 다름없는 짓거리이거나, 단지 심심풀이로 저지른 짓일지도 몰랐다. 그런 것에 휘둘리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지금은 머리 한편에 드는 의문부터 풀어야 했다.

‘외부인들이 이렇게 왔는데도 아무 반응을 보이질 않아.’

아무리 용마안으로 마법 결계나 외부로 통하는 채널 등을 끊어 놨다지만, 그래도 외부인이 섬에 도착했다면 뒤늦게라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베이럭은 여태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섬을 진즉에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면 시설들을 허물거나 섬을 통째로 날렸어야 했다.

하지만 섬에는 여전히 갖가지 서류며 실험체들이 남아 있었다.

‘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리고 그건 베이럭에게도 어떤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녀석이 생산 기지를 버려 두고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일. 그런 게 대체 뭘까?’

연우는 계속 의문을 던지면서 첨탑 내부의 복도를 수없이 지나 갔다. 좌우로 여러 방들이 보였지만, 대부분 응접실이거나 단순한 서고여서 어느 것 하나 그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러다 그의 앞에 계단이 나타났다. 위와 아래로 분리된 계단. 연우는 그중에서 나선형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찾은 섬은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 있어 조금 놀라웠다. 이따금 한 번씩 장기적으로 자리를 비우더니. 이런 걸 만들고 있었나?

동생이 섬의 좌표를 베이럭에게 던져 주고 나서, 단 한 번도 섬을 찾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가끔씩 베이럭은 아르티야에서 자리를 비웠고, 여기에 궁금증이 생긴 동생이 녀석을 따라 섬에 와 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던 것이다.

당시 베이럭이 머물던 건물이 바로 이곳이었다.

2층은 응접실, 3층은 서재 및 창고 같은 개인 공간으로 주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필요한 실험은 특별 방비 시설이 된 대규모 지하실에서 벌인다고 덧붙였다.

지하실은……. 정말이지 넓어도 너무 더럽게 넓고, 복잡해도 너무 더럽게 복잡했다. 무슨 미로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나선형 계단의 끝에는 두터운 철문이 놓여 있었다. 특정 마력 패턴을 기입하지 않으면 절대 열리지 않도록 된 문.

연우는 마장대검을 세게 내리쳤다.

까앙!

하지만 철문이 얼마나 단단하고 두꺼운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쯧.”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차고,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의념을 담아 마장대검을 휘둘렀다. 검은 오러가 잔뜩 씌워지면서 철문에다 깊은 상처를 남겼다.

쾅-

폭발 소리와 함께 그대로 철문이 터져 나갔다. 그러자 드러난 광경은 일기장에 서술된 것과 같이 미로처럼 어지럽게 나 있는 복도였다.

보아하니 동생이 한 번 찾아왔을 때보다 더 복잡하게 변한 것 같았다. 일기장에 그려진 구조로는 돌파하기 힘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흩어져.”

츠츠츠-

연우의 그림자가 쭉 늘어난다 싶더니 삼십여 마리의 괴이로 변하면서 곳곳으로 흩어졌다.

연우는 일단 이곳에 있는 것들을 전부 인트레니안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분석은 나중에 따로 부와 브라함이 알아서 해 주겠지. 일을 늘리는 것 같아 조금 미안했지만, 보다 확실한 방법이었다.

다만, 여기서 연우가 챙겨야 할 것은.

‘여기다.’

따로 있었다.

연우는 복도를 몇 번 꺾어 어느 문 앞에 섰다. 용마안을 따라 새롭게 파악한 복도의 구조와 일기장 속에 남아 있는 구조를 대치시키면서 파악한 곳. 자신이 찾으려는 곳은 여기가 맞았다.

쾅.

또다시 단단하게 봉인된 문을 거세게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갖가지 용액들이 담긴 플라스크나 용기가 가득한 실험실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것들은 전부 괴이들이 수거하도록 놔두고, 대신에 가장 안쪽에 위치한 벽에 다가갔다. 손으로 벽을 가볍게 두들겨 보니 텅텅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안쪽이 비어 있단 소리였다.

옆에 놓인 책자의 위치를 돌렸다. 그러자 벽이 그대로 돌아가면서 안쪽에 숨겨져 있던 거대 금고를 드러냈다.

“빙고.”

연우는 다시 마장대검으로 손잡이 부분을 내리쳤다. 금고에는 외부의 갑작스러운 충격이 있으면 자동으로 폭발하는 마법 도식이 새겨져 있었지만, 마장대검은 그 마저도 완벽하게 끊어 냈다.

끼이익-

잔뜩 일그러진 문이 힘을 잃고 열렸다.

안에는 서로 다른 색깔의 용액이 담긴 열 개의 플라스크가 단단히 밀봉된 채로 놓여 있었다.

나는 섬이라는 방대한 넓이에 걸쳐 대규모 실험장을 필요로 하는 베이럭의 ‘실험’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원래 연금술사 출신인 녀석이니 여러 실험을 필요로 할 것은 당연했고. 독인을 이룬 만큼, 외부의 눈을 피해 갖가지 독을 제조할 필요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는 건, 최종적으로 원하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다른 누구보다 엘릭서를 간절히 구하듯이.

베이럭도 그런 게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의 그런 물음에, 베이럭은 한참 동안 말없이 고민하다가 말했다.

“신인(神人).”

베이럭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깊게 말하지 않았다. 동생이 아는 것이라고는 베이럭이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에 전해지던 어떤 신화를 재현하고자 노력했다는 것뿐.

즉, 이 섬은 베이럭이 신인인지 뭔지 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 만든 실험장이었던 것이다. 녀석이 사용하는 독은 그 과정에서 도출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 금고에 있는 용액들은 모두 여러 실험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들.

따지자면, 레드 드래곤의 외인부대에 몸을 담고 있을 때에 16층까지 오르면서 만들었던 증강환을 몇 단계 이상으로 업그레이드한 버전이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지.’

연우의 눈이 빛났다.

‘신화를 재현하려 했던 만큼. 이 약들은 신력이나 신의 인자를 강화시키는 데 효과가 좋을 게 분명해.’

“부.”

「예. 주인. 님.」

그때, 그림자 위로 리치, 부가 불쑥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이것들, 분석해서 효능과 주의점 말해 줘. 불필요한 것들은 따로 분류하고.”

「명을. 받듭. 니. 다.」

부는 열 개의 플라스크를 가지고 도로 그림자 속으로 돌아갔다.

‘의심 많은 녀석이 그냥 결과물만 덩그러니 놔둘 리 없지.’

연우는 열 개의 플라스크 중 절반 이상이 맹독일 거라고 예상했다.

겉보기에는 영약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잘못 섭취하면 몸이 녹아내릴 수 있는 맹독. 베이럭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그때, 괴이들이 연결 고리를 통해 첨탑에 있는 모든 자료들을 수거했다는 소식을 보냈다.

‘그럼 섬에 있는 다른 것들도 전부 수거해.’

괴이들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것으로 섬에서 챙길 건 전부 챙긴 셈이었다.

연우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 * *

연우는 지하에서 나와 2층과 3층도 천천히 수색했다.

이미 괴이들이 전부 수거해 간 까닭에 남아 있는 물건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베이럭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살펴보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러다 3층의 복도 가장 끝에 위치한 방, 서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비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벽의 절반 이상이 통째로 유리창이었다. 창에는 햇살에 부딪쳐 반짝이는 망자의 강과 깎아지를 듯이 내려 온 벼랑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겨 있었다.

언제나 히키코모리처럼 타인과의 교류를 일절 거부한 채, 골방에 처박혀서 음험한 실험이나 해 댈 줄 알았던 녀석이었는데.

“그래도 사람답게 즐길 건 즐기면서 살고 싶다, 이건가?”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단 하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녀석이었다. 당장이라도 찾아내 목을 쥐어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다시 일었다.

차라리 녀석이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 게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눈앞에 있었다면, 녀석의 연구고 뭐고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을 테니까.

으드득.

연우는 그렇게 다시 이를 으스러져라 갈다가, 갑자기 손목에서 잘게 울리는 검은 팔찌와 쇠사슬을 바라봤다.

우웅, 웅-

녀석이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거기에 맞춰 왼쪽 발목에 감긴 족쇄도 잘게 떨렸다.

칠흑왕의 비탄을 얻었을 때부터 줄곧 느꼈던 기분이었지만.

어쩐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팔찌와의 감응력이 깊어진 느낌을 받았다. 괴이를 다루는 것도 훨씬 순조롭고, 제3천의 영도 부쩍 달라진 기분이었다.

마치 손끝에 끈적끈적하고 우울한 뭔가가 닿는 듯한 느낌.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세트를 찾으면서 칠흑왕의 절망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진 탓일까.

[아즈라엘이 고요한 눈빛으로 당신을 지켜봅니다.]

특히 족쇄를 얻은 뒤부터, 아즈라엘의 시선이 부쩍 강렬해진 것 같았다.

칠흑왕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한 죽음의 신. 대체 칠흑왕의 정체는 무엇일까?

‘반면에 이쪽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데.’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침묵을 지킵니다.]

제우스의 아스트라페에 이어 포세이돈의 트라이아나까지. 올림포스를 이끈다는 대신의 신물을 두 개나 집어삼켰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연우는 깊게 착 가라앉은 눈으로 팔찌와 족쇄를 매만졌다.

[아즈라엘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아즈라엘이 어서 아티팩트를 확인해 볼 것을 조용히 당신에게 권합니다.]

아즈라엘의 계속된 채근에.

결국 연우는 고민을 거두고 족쇄의 정보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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