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87화 (287/862)

12화. 섬 (4)

벤티케는 눈을 번쩍 떴다.

“대장! 일어나셨습니…… 컥!”

옆에서 그의 수발을 들고 있던 수하는 반갑게 인사를 하다 말고 숨이 갑자기 턱 하고 막혔다.

벤티케가 일어나자마자 손을 뻗어 그의 숨통을 옥죈 것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벤티케의 눈을 보고 있노라니,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자신이 그대로 짓밟혀 으스러질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진랑은?”

“예……?”

“진랑은. 어디에 있지?”

“그, 그, 그것이……!”

수하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뭔가를 말하고 싶어도 어떻게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벤티케의 화만 더 부채질할 뿐이었다. 결국 수하의 목을 붙잡은 악력에 힘이 바짝 실리려던 그때.

“애꿎은 아이는 그만 혼내십시오.”

진랑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죽이 담긴 그릇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벤티케의 눈에는 전혀 그런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진랑……!”

벤티케는 진랑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를 바득 갈았다. 자신의 싸움을 망친 녀석. 그는 스스로 맹수를 자처하는 사람이었고, 싸움을 방해받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 싫어했다. 그건 자신의 정체성을 망치고, 자존심을 뭉개는 짓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랑은 벤티케의 살기를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태연했다. 벤티케의 손에서 겨우 빠져나왔던 수하는 그대로 졸도하고 말았다.

그렇게 있기를 한참.

벤티케는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가만히 감더니, 곧 길게 숨을 내뱉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광기는 싹 빠져 있었다.

“그래. 네가 결정한 것이라면. 이게 옳은 것이었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랑은 고개를 숙였다.

벤티케는 아집에 사로잡혀 망가진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인이었던 라나. 그 전철을 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화가 나더라도 억눌렀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랑의 충성심과 판단력만큼은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벤티케는 고개를 숙인 진랑을 보면서 송곳니를 훤히 드러냈다.

“두 번은 허락지 않는다.”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너무 자연스러운 대꾸.

벤티케는 콧방귀를 뀌었다.

“……싱거운 새끼.”

그래도 심통이 난 건 어쩔 수 없어 골려 주려고 했는데. 진랑은 그런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벤티케는 녀석이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벤티케는 굳은 눈빛으로 옆쪽을 내려다 봤다. 오른팔이 있어야 할 소맷자락이 텅 비어 있었다.

“팔이 돌아오질 않는군.”

“예. 그렇습니다.”

진랑도 굳은 얼굴이 되었다.

흔히 신력은 신이 내려 주는 힘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신력이란 창생(創生)의 힘이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고, 상상한 것을 물질세계에 구현케 하는 힘. 그리고 원래의 질서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힘이기도 했다.

벤티케가 한 번 몸이 망가졌어도 빠른 재생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런 신력이 풍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포세이돈과의 채널링이 강화된 지금, 잘린 오른팔도 복구가 되어야 옳았다.

그것이 ‘원래의 벤티케’였으니까. 신력이 마땅히 제 모습을 복원하려 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른팔은 여태 복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세포가 움직여야 하는데,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벤티케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크할할할! 내 팔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나 보군.”

벤티케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너무 좋았다. 신물에 이어 팔까지. 참 많은 것을 앗아 가는 녀석이었다. 독식자. 정말이지 욕심도 많다 싶었다.

재미도 있었다.

기대도 있었다. 그런 녀석의 목을 꺾으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조만간에 이곳으로 들이닥치기도 하겠고.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벤티케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때. 벤티케의 그림자가 살짝 일렁였다. 그 위로 가느다란 실눈이 살짝 뜨였다가, 다시 아래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 * *

[신의 인자를 획득했습니다.]

[신의 인자를 획득했습니다.]

……

[다량의 신의 인자를 획득했습니다.]

[잠복 중이던 신의 인자가 호응합니다.]

연우는 체내를 타고 감도는 힘을 한껏 느꼈다. 여태 용의 인자나 마의 인자에 비해 양이 턱없이 부족해서 별다른 효과도 내지 못했던 신의 인자가 처음으로 기지개를 켰다.

마치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낯선 반에서 외톨이처럼 지내다가, 우연찮게 전학 온 친구가 어린 시절 헤어졌던 소꿉친구였던 것처럼. 너무 즐거워하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포세이돈이 비명을 지릅니다.]

[포세이돈이 옥좌에서 내려와 크게 고함을 터뜨립니다. 당장 그만 두라고 소리칩니다.]

[포세이돈이 휘하 제신(諸神)들에게 당신을 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제신들이 어려워합니다.]

[포세이돈이 올림포스에 당신에 대한 징죄를 건의합니다.]

[투표 결과, 아테나와 헤르메스의 반대로 만장일치에 실패했습니다.]

[포세이돈이 아테나와 헤르메스에게 적극 항의합니다.]

[아가레스가 못마땅한 눈치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가레스가 마의 인자를 가져갈 것을 종용합니다.]

평범한 신의 인자도 아니었다. 대신격이나 되는 포세이돈의 인자. 당연히 연우는 몸에 바짝 힘이 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콰드득, 콰득-

육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세포의 형질이 조금씩 바뀌고, 여기에 따라 체질도 변질되었다.

비록 마룡체라는 특성이 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연우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신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졌을뿐더러, 그만큼 포세이돈의 힘을 갉아먹을 수도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수(水) 속성에 대한 친화도를 30만큼 획득했습니다.]

[수 속성에 대한 지배도를 25만큼 획득했습니다.]

……

여태 화 속성과 암 속성에만 깊은 친화도를 갖고 있던 연우는, 처음으로 수 속성과 관련된 친화도와 지배도를 다량으로 얻을 수 있었다.

기실 망자의 강이라는 스테이지는 연우에게 여러모로 불리할 수 밖에 없었던 터라, 수 속성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그것이 단번에 만회된 것이다.

“후우.”

연우는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우드득, 우득.

체질상 변화가 있다 보니 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곧 현자의 돌이 돌아가면서 육체를 금방 적응시켰다.

이것으로 벤티케와의 싸움에서 얻은 부상은 대부분 회복되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잠력 중 일부가 크게 개척되면서 실력도 향상했다.

안력에도 힘이 들어갔다. 눈동자 위로 매서운 안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벤티케. 역시 잡아야겠어.’

라나에 대한 복수를 떠나서라도, 연우는 어떻게든 벤티케를 손에 넣어야겠다는 확신을 강하게 받았다.

한 팔만 삼켰는데도 이 정도인데, 육체를 전부 흡수하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마룡체를 한 단계 이상으로 각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신마룡체? 마신룡체?’

연우가 시답잖은 것을 생각하면서 피식 웃는데.

[포세이돈이 노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노려봅니다.]

포세이돈이 자신의 힘을 앗아갔다면서 이를 가는 시선이 느껴졌다.

연우는 그런 녀석에게 주먹 감자를 가볍게 날려 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연우 앞으로 푸른 불꽃이 확 타올랐다가 사람 상체만한 크기의 새가 나타났다.

화르륵-

『주인. 괜찮아?』

니케가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곤히 자고 있는 동안에 몸을 이리저리 굴리다 보니, 연결 고리로 감정의 동요를 느껴 깬 모양이었다.

“괜찮다. 나는.”

연우는 그런 녀석이 기특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니케는 나른해진 고양이처럼 기분 좋게 손길을 느끼면서도, 안타까운 시선은 거두질 않았다.

이번에는 네메시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너무 안일했다.』

연우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그곳에는 공허가 활짝 열린 채 네메시스가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소리에서는 짜증도 다분히 묻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어째서, 끝까지 우리를 부르지 않은 거지?』

연우는 왜 네메시스가 화가 단단히 났는지 알 것 같았다. 벤티케와 부딪칠 때. 그리고 왈츠의 원영신이 쫓아올 때.

그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연우는 끝까지 괴이나 환수들을 제대로 부리지 않았다.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로지 복수에만 집중하는 녀석이었지. 다른 곳에 한눈을 팔거나, 싸움에 취해서 시야가 좁아지고 머리가 아둔해지는, 그런 놈이 아니었단 뜻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어.』

네메시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냐?』

“…….”

연우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네메시스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싸움에 취했다. 그 표현이 옳았다.

벤티케와의 싸움이 즐거워도 너무 즐거웠다. 그건 연우가 여태껏 제대로 느껴 보지 못했던 희열이었다. 또한, 해방감이기도 했다. 여태껏 철창 속에 가둬 두기만 했던 맹수를 처음으로 인정했고, 마음껏 뛰어놀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답지 않게 냉정이 깨졌다. 고양감에 한껏 젖어 시야가 좁아졌다. 괴이나 환수가 개입해서 자신의 흥을 깨는 게 싫었다.

연우의 성격대로라면. 여태껏 그가 밟아 왔던 길을 생각해 본다면 절대 있을 수 없었던 일이었다. 벤티케와 싸울 무렵부터 샤논과 한령, 레베카를 동원해서 단번에 몰아붙여야 했다. 그리고 괴이들을 풀어 트리톤의 남은 함선들도 대거 침몰시켜야만 했다.

백번 양보해 벤티케를 상대할 때는 싸움에 취했었다고 하더라도, 왈츠가 나타났을 때에는 냉정을 되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질 못했다. 오히려 그는 왈츠가 반가웠다. 그녀라면 더욱 자신의 흥을 돋워 주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잠깐 가지기도 했었다.

“……내 실수다.”

그래서 연우는 다시 눈을 뜨면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앞으로는 조심하지.”

울타리 속 맹수를 풀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고삐는 단단히 쥐어야만 한다. 연우는 그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머릿속은 언제나 냉정해야만 했다.

『크르릉! 연우 너무 괴롭히지 마! 연우도 반성하고 있잖아!』

니케가 네메시스를 보면서 두 날개를 퍼덕이며 크게 소리쳤다. 네메시스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동생 같은 니케에게 한없이 약했다.

『하여간 다음부터는 혼자서 짊어지지 말고, 우리도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클랜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 속에 우리도 있는 것이다.』

“명심하지.”

연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메시스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네메시스도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보다 이젠 어떻게 할 거지? 딱히 괜찮다고 하기는 힘들지 않나. 여름여왕의 첫째 딸? 그 친구부터 어떻게 해야 할 텐데.』

네메시스는 이미 동생과 함께 여름여왕을 겪어 봤기에 왈츠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괴물 같았었는데. 못 본 사이에 더 괴물이 되었어.』

네메시스는 그 점이 걱정이었다.

왈츠에게 표적으로 찍힌 이상, 앞으로 오를 층계가 훨씬 많이 남은 연우가 얼마나 더 위험해질지 불에 보듯 뻔했다.

하지만 연우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렇게 쉽게 나를 쫓지는 못할 거다.”

네메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또……!』

“아직 흥에 취해 있는 게 아니야. 그래도 마지막에 가서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었으니까.”

『무슨 말이지?』

“이걸 봐라.”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손을 활짝 펼쳤다. 니케와 네메시스의 시선도 손바닥 위로 향했다.

화르륵-

검은 불꽃이 옆으로 번지면서 어떤 광경을 드러냈다.

『이건……』

네메시스가 놀란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속에서는 왈츠의 원영신이 아르드바드 공작을 비롯한 3명의 플레이어들과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왈츠의 원영신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반면에 아르드바드 공작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달랐다. 합공(合攻)은 자로 잰 듯이 너무 손발이 잘 맞았고, 기세도 거칠었다.

하지만.

그래도 왈츠는 왜 자신이 여름여왕에 이은 새로운 왕인지를 보여 주겠다는 듯. 계속되는 합공에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간간이 반격까지 가하면서 세 공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것들……?』

“그래. 모두 혈국의 공작들이지. 아르드바드 공작의 구원 요청을 듣고 찾아온 모양이야.”

다른 두 공작의 면면도 모두 네메시스가 아는 자들이었다. 아르드바드 공작처럼 언젠가는 씹어 삼켜야 할 것들. 하지만 원수들끼리 이렇게 치고받고 싸운다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특히 한 곳은 철저하게 연우를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네메시스는 이 광경을 보여 주는 것이, 아르드바드 공작의 그림자 속에 숨겨 둔 괴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이건 괴이의 수준이 아니었다.

『한령! 한령이군! 대체 언제 심어 둔 거지?』

네메시스는 탄성을 터뜨렸다. 연우와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그의 생각과 행동들을 모두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르드바드 공작의 그림자 속에다 한령을 심어 둔 건, 네메시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몰래 이뤄진 일이었다.

아군이 모를 정도이니, 아르드바드 공작이라고 해서 알 수 있을까.

왜 연우가 마지막에는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렸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이렇게 즉흥적으로 일을 해낼 줄이야.

네메시스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 자신의 주인은 이전 주인과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오히려 몰아붙인 게 무안해질 정도였다.

『와아…….』

니케도 신기하단 눈빛으로 바라 봤다.

네메시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옆에다 한령을 심어 뒀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있나? 저기 있는 왈츠라고 해 봤자, 고작 분신밖에 되질 않는데. 여기서 세 공작한테 당해도 다시 분신을 보낸다면…….』

“아니. 두 번 그러긴 쉽지 않을 거야. 화이트 드래곤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니라서. 아마 이번에 나타난 것도, 날 잡기보다는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거다.”

연우는 화이트 드래곤을 둘러싼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레드 드래곤이 있던 76층은 여전히 혼란한 상황이었다.

왈츠가 여름여왕에 이어 패권을 인정받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층계는 화이트 드래곤, 그린 드래곤, 블랙 드래곤의 3파전으로 몸살을 앓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왈츠가 원영신을 보낸 건 어디까지나 여름여왕의 원수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큰 것일 뿐.

연우가 파악한 왈츠는 그런 우선순위를 미처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자가 아니었다.

‘애당초 그렇게 멍청했으면, 지금 정도로 세력을 일구지도 못했겠지만.’

지금 세 공작들과 대립하는 것도, 잠재적인 적이 될 가능성이 큰 혈국의 전력을 깎기 위해서일 것이다.

『확실히. 일리가 있군. 그럼 저 쪽은 저대로 둘 생각인가?』

“아니. 이것도 추측일 뿐이니까. 네 말대로 왈츠가 독하게 마음먹고 덤비면 이쪽도 골치가 아파져. 전쟁이 소강상태에 잠겨서 여유가 생길 수도 있고.”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괜찮은 불씨가 있는데, 굳이 놔 둘 필요가 없지 않나?”

『……?』

네메시스는 연우가 또 무슨 짓을 하려는가 싶었다. 여태 그가 봤던 연우는 이렇게 꿍꿍이속을 숨길 때가 가장 무서웠다.

“지구에는 이런 말이 있지.”

연우가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며 차갑게 웃었다.

“싸움 구경과 불구경은 클수록 좋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영상 속에서 아르드바드 공작의 그림자가 살짝 출렁거린다 싶더니,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면서 아르드바드 공작의 머리를 쳤다.

말끔하게 도려진 아르드바드 공작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튀었다. 왈츠를 한창 몰아붙이던 중에 벌어진 일이라, 다른 두 공작의 낯이 충격으로 부릅떠졌다.

아르드바드 공작은 죽기 전까지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지 모르는 듯, 싸움에 집중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남은 두 공작이 악다구니를 질렀다.

한령은 아르드바드 공작의 영혼을 낚아채고, 다시 그림자 속으로 숨으면서 존재를 완전히 감췄다.

왈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보신권의 일보맹격을 터뜨렸다. 악다구니를 지르던 공작 중 한 명이 그대로 날아갔다. 공세의 균형은 단번에 흐트러졌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한령이 완전히 자리를 이탈하면서 공유하던 시야도 사라진 것이다.

『…….』

『…….』

네메시스와 니케는 입을 쩍 벌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우는 컬렉션 속으로 한령이 큼지막한 망령 하나를 잡아 되돌아온 것을 느끼면서 차갑게 웃었다.

“공작이 죽었으니, 혈국도 아마 화이트 드래곤을 잡으려 혈안이 되겠지.”

아주 손쉽다는 듯한 연우의 말에, 네메시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샤논이 늘 했던 말이 맞아.』

“뭘?”

『역시 주인의 인성은…….』

그래도 명색이 발 벗고 자신을 구해 주려던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데도 저렇게 단번에 머리를 날려 버릴 줄이야.

“닥쳐.”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라면서, 어떻게 성격이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건지, 원.』

네메시스의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컬렉션 한쪽에서는.

샤논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