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포세이돈 (3)
테드는 자신의 실력에 항상 자신이 있었다. 그가 모시는 신, 안타이오스는 괴력과 투쟁을 상징하는 신. 헤라클레스에게 당하기 직전까지 단 한 번도 패배를 겪지 않았다는 무패의 신이기도 했다.
테드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살면서 패배를 해 본 경험은 단 두 번.
한 번은 전 대장이었던 라나에게 포섭될 당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벤티케가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 미리 서열을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서 겨뤘을 때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테드는 그 순간들이 너무 억울했다.
‘그땐 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거야. 라나와 벤티케의 기술도 너무 변칙적인 것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당시의 나는 어렸어. 지금 다시 겨뤄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그때와 나는 확연히 달라졌으니까.’
그래서 테드는 언젠가 벤티케를 꺾고, 트리톤의 수장이 될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벤티케도 했던 짓을 자신이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다만, 라나 때와 다르게 당장 명분이 없을 뿐이지.
그래서 테드는 생각을 바꿨다.
수하들에게 누가 트리톤의 수장으로서 가장 자격이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기로.
그리고. 때마침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벤티케가 전력을 다해 덤볐지만 이기지 못한 존재, 독식자. 그에게 벤티케는 트리톤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트라이아나까지 빼앗겨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독식자의 목을 꺾어 온다면?
그때부터는 아주 많은 것들이 달라질 터였다.
자신을 보는 수하들의 눈이 달라질 것이며, 이따금 자신을 하찮게 보는 진랑의 고개를 꺾어 버릴 기회도 생길 것이다.
여기에 오른팔이 돌아오지 않는 벤티케가 실정을 몇 번만 더 한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세상이었다.
그렇게 잔뜩 부푼 마음을 안고 찾아왔는데.
‘어째서……!’
테드는 이렇다 할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절명해야만 했다.
부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영혼에다 강렬하게 각인시킨. 두려움을 한껏 안은 채로.
* * *
데구르르-
테드의 머리통이 잘게 부서졌다. 뇌수와 살점이 튀었지만, 곧 활짝 열린 바토리의 흡혈검으로 몸뚱이와 함께 전부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연우의 머릿속으로 테드가 마지막으로 흘려 대던 사념이 스며들어 왔다.
연우는 테드의 생각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녀석은 가지고 있는 그릇에 비해서 욕망이나 자신감이 넘쳤다. 제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벤티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그건 오히려 벤티케를 욕보이는 짓이지.’
벤티케는 적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한 번쯤 교류를 나눠 보고 싶을 정도로 뛰어난 플레이어였다. 실력만큼이나 자신감도 넘쳤고, 무엇보다 자신이 걷는 길에 일절 망설임이 없었다.
호적수.
연우가 벤티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벤티케 역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와 자신은 닮지 않은 닮은꼴이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테드가 낀다고?
헛소리였다.
적의 전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자신감에 취해 무작정 머리통부터 들이밀다가 제대로 실력 발휘도 못 하고 골로 가 버리는 녀석이 끼기는 어디에 낀단 말인가.
오히려 멀쩡하게 있다가 신력만 뜯기게 생긴 안타이오스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아니. 신화에서도 안타이오스는 자기 힘만 믿고 날뛰다가 결국 헤라클레스에게 목이 조여 죽었었지? 어차피 그 신에 그 사도인 셈인가?”
[포세이돈이 분노합니다!]
[포세이돈이 분노합니다!]
연우는 이제 너무 익숙해진 포세이돈의 반응에 코웃음을 치면서 모든 흡수를 완료했다. 안타이오스의 신력도 고스란히 체내에 흡수되었다.
신의 인자가 다시 맹렬하게 활동하면서 신력을 고스란히 흡수하고, 인자를 대거 증식시켰다.
거기에 따라 세포들의 형질도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면서 육체가 단단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포세이돈의 팔 한 짝과 비교하면…… 아쉽긴 해.’
신력의 양은 벤티케의 오른팔을 흡수했을 때와 얼추 비슷했다. 안타이오스의 신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포세이돈의 신력이 그만큼 양이 풍부하고 질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서든 퀘스트(케토의 한)를 20%만큼 달성했습니다.]
케토 신이 그에게 줬던 퀘스트를 일부 수행했다는 메시지도 친절하게 떠올랐다. 더불어 목에 착용하고 있던 해수 부적에도 푸른 빛무리가 감돌면서 소량의 신력이 회복되었다.
‘더 분발하란 뜻인가?’
한편으로는 사도쯤 되는 테드의 정신력을 단번에 제압시킨 부에게 흥미가 돌기도 했다.
아무리 샤논과 한령, 괴이들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연우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테드를 제압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부의 실력이었다.
‘역시 부의 정체는 그 사람이 틀림없어.’
연우는 가볍게 피식 웃으면서 다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불에 타는 항만이 한눈에 보였다. 테드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진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그들의 낯빛이 타오르는 불빛만큼이나 창백했다.
“나머지도 모두 정리해.”
괴이들이 다시 움직였다.
* * *
트리톤이 30층에 보유 중인 항만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말았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탑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트리톤이 자랑하는 이대장 테드가 별다른 활약도 벌이지 못한 채 죽었다는 소식까지 퍼졌을 때는. 모두가 크게 놀라기도 했다.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단 한 사람이었기에.
독식자.
카인이라는 이름보다, 이제 별칭으로 더 유명한 플레이어는 28층에서 벌였던 충돌을, 30층에서 다시 재현하고 있었다.
독식자는 차기 왕 급으로 거론 되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도는 슈퍼 루키였다.
그리고 트리톤은 기존 거대 클랜의 체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각광을 받는 4대 신흥 클랜 중 한 곳. 더구나 그곳에는 포세이돈의 사도, 패왕 벤티케가 있었다.
당연히 둘의 충돌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루머가 너무 많이 도는 독식자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그리고 트리톤의 숨겨진 전력이 어느 정도일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겼다.
또한, 트리톤과 비슷한 경쟁 선상에 있는 클랜들은 트리톤의 전력을 대폭 깎을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모든 시련이 끝났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시겠습니까?]
소량으로 남아 있던 망자의 독이 체내에서 완전히 소화되면서 시련이 끝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31층으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연우는 이제 익숙해진 메시지 창을 옆으로 치우면서 묵묵히 다시 길을 걸었다.
뜨거운 태양 빛에 땅이 이글거 리는 초원. 밤에는 매서운 삭풍이 분다.
연우는 마장을 로브처럼 길게 늘어뜨려 머리를 감추면서 벤티케가 있는 곳의 방향을 가늠했다. 이제는 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왜 여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연우는 그동안 30층의 스테이지를 관통하면서 트리톤의 전력과 여러 번 부딪쳤다.
그들이 자랑하던 항만과 선단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으니, 재산적 피해가 어마어마할 터. 게다가 테드의 죽음은 아주 큰 전력 상실이기도 했다. 이제 연우와 트리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사활을 건 전쟁이 시작된 셈이었다.
하지만 곧 나타날 것이란 연우의 기대와 다르게, 벤티케는 여태 단 한 번도 모습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치료가 아직 덜 끝났나? 하지만 지금쯤이면 신력도 회복되어서 움직일 수 있을 텐데?’
사실 따지고 보면, 부상의 정도는 벤티케보다 연우가 훨씬 심각했다. 재생 스킬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지만, 그건 벤티케도 마찬가지였다. 몸뚱이가 전부 부서졌는데도 다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되살아나던 무지막지한 재생력은 결코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연우가 파악한 벤티케는 지금쯤 모습을 드러내야만 했다. 아무리 부상이 심각하더라도, 그는 절대 도전을 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자신이 보유한 전력이 이렇게 무참하게 갈려 나가는 데야.
최근에는 트리톤도 이대론 안 되겠다 여겼는지, 출몰 빈도가 급속도로 줄어들더니 엊그제부터는 모습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차라리 트리톤의 본진까지 단번에 통과할까, 고민할 무렵.
「이봐, 주인.」
갑자기 샤논이 그를 불렀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녀석의 목소리엔 살짝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왜?”
「알면서.」
샤논은 코맹맹이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듣기 불쾌했다.
연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에이이. 우리 사이에.」
연우의 낯이 더 단단히 일그러질 무렵.
「주인님. 무릇 종이란 따로 분부가 없어도 주인의 의중을 읽고, 그것을 제대로 수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불쾌하시다면 저에게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번에는 한령이 불쑥 나타나 연우에게 속삭여 댔다. 샤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그거 내 거거든?」
「그것이야 주인님의 마음이니까.」
샤논과 한령은 한창 기 싸움을 벌였다. 연우가 아직까지 컬렉션에 보관 중인 테드의 영혼 때문이었다.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사도의 영혼은 당연히 격이 클 수밖에 없다. 아르드바드 공작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샤논과 한령이 모두 탐낼 만한 영혼인 것이다.
연우는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정령체(精靈體)가 되어 부드럽게 허공을 노니는 레베카가 보였다.
원래 인간으로 되돌아가길 바라던 레베카는 언제부턴가 말이 없어졌다.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을 고집하지도 않고, 정령이 되었다 말기를 계속 반복하면서 연우의 주변을 따라 뱅글뱅글 맴돌기만 했다.
이따금 연우가 말을 걸 때에만 짧게 대답을 해 주는 게 전부였다.
의사소통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도,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고 필요할 때에는 즉각 움직이기 때문에 별반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럴 때는 끼어도 될 법한데도, 레베카는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인 것처럼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연우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부와는 다른 포지션이었다.
“일단은 트리톤을 모두 잡고 나서. 지금은 안 돼.”
「칫.」
「주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샤논과 한령은 더 이상 테드의 영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연우가 한 번 그은 선에 대해 서는 절대 번복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비상용으로 이런 큰 영혼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레베카와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연우가 레베카에게서 시선을 거둘 무렵.
넓게 퍼뜨린 초감각의 영역에 미세한 뭔가가 잡혔다. 오아시스에 주둔 중인 소규모 병력들이었다.
연우는 혹시 트리톤인가 싶어 허리춤에 걸어 놓은 마장대검에 손을 얹었지만, 곧 트리톤이 자랑하는 수기(水氣)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는 더 강렬했다. 그리고 낯이 익은 곳이었다.
‘환상연대?’
정확하게는 28층에서 왈츠의 원영신을 따돌리는 데 요긴하게 썼던 제2단, 환영기사단이었다.
연우의 그림자가 출렁였다. 괴이들이 언제라도 움직일 채비를 갖췄다. 괴이들이 움직이지 않는 건, 환상연대도 이렇다 할 살기를 품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녀석들은 연우가 반갑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연우가 오아시스에 다다르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렬한 햇살 때문에 착용하기 불편할 텐데도,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은색 갑주를 입고, 몸에는 커다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반갑소, 카인. 환영기사단의 크로이츠라 하오.”
크로이츠가 앞으로 나서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얼굴에는 호의적인 감정이 가득했다.
연우는 말없이 녀석이 내민 손을 바라보다가,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고 대답했다.
“뭐지, 너희들은?”
크로이츠는 머쓱했는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매만지면서도, 웃는 낯을 지우지 않았다. 잘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환한 얼굴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여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나를?”
“그렇소. 사실 망자의 강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그러질 못해 얼마나 아쉽던지. 그래서 다시 당신을 찾기 위해 수소문했고, 이렇게 어렵사리 찾아올 수 있었소. 그래도 만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연우는 눈살을 살짝 좁혔다. 동공 안쪽에 새로운 동공이 활짝 열렸다. 용마안이었다.
‘진실이군.’
그래도 연우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나를 왜 찾았던 거지? 복수라도 하려고?”
“아, 92단의 과오는 내가 환상연대를 대신해 사과하겠소.”
크로이츠는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뒤에 있던 다른 플레이어들도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꿍꿍이는 보이지 않았다.
‘진실.’
“사실 본인이 연대의 다른 클랜들에게 부탁했던 건, 어디까지나 카인을 정중하게 모시라는 것뿐이었는데. 개중 그것을 잘못 판단한 곳이 착오를 벌였던 거요. 하지만 이 역시 변명에 지나지 않을 테니, 부디 그때의 과오는 용서해 주시길 바라오.”
‘이것도 진실.’
연우는 눈을 더 가늘게 좁혔다. 크로이츠는 전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 어디에도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미안함과 함께, 오히려 호감이 가득 풍겨 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과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던 연우로서는. 오히려 환상연대의 이런 호의가 더 미심쩍기만 했다.
“날 왜 찾았던 거지?”
크로이츠가 숙였던 머리를 다시 들면서 말했다.
“우리의 연대장께서 그대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오. 또한, 그대가 위기에 처해 있다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라는 명령까지 있었소.”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너희 연대장이 누구기에?”
“연대장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오래되고 가장 친애하는 벗이라고 말씀하시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