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92화 (292/862)

17화. 포세이돈 (4)

‘벗?’

더 속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연우도 이제 탑에서 보낸 시간이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벗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혹시…… 칸이나 도일?’

4대 신흥 클랜 중 환상연대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그만큼 소속 인원에 대해서도 세간에 알려져 있는 게 아주 많았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지휘하는 제1단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느 플레이어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서 십여 명의 랭커들을 감화시켰고, 휘하에 있던 클랜들이 주축이 되어 오늘날의 환상연대를 이뤘다는 것뿐.

그래서 환상연대의 연대장에 대해서는 무수한 추측만 오갈 뿐. 진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런 베일에 싸인 사람이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고?

그 순간, 연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단 두 명밖에 없었다.

칸과 도일.

오랫동안 행방을 알고자 수소문 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해야만 했던 녀석들.

연우는 이따금 혹시 녀석들이 죽거나, 본래 고향으로 리타이어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살아 있다면 어딘가에 분명 자취가 남아 있을 텐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두 녀석 중 한 명이 환상연대의 연대장이라면?

‘가능할 법도 해.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두 사람이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강해지는 게?’

환상연대의 주축이 된다는 12명의 클랜장들, 소위 ‘원탁의 기사’라 불리는 자들은 하나하나가 뛰어난 랭커들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중 몇몇은 70층을 넘은 하이 랭커들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카리스마와 함께 뛰어난 실력도 겸비하고 있어야 했다. 탑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마력은 본신의 무위(武威)에 있었다.

하지만 칸과 도일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한들, 그 시간 동안 그만한 성장을 이뤘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동생이 깔아 둔 안배를 바탕으로 강해진 연우도 하이 랭커급의 수준을 바라보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한 면이 많았다.

그런데 칸과 도일이 그 정도 수준을 이루고, 세력까지 일궜을 정도라면.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가 없지.’

물론, 두 사람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연대장으로 추대된 사람이 어떤 역사적 전통성을 갖고 있거나, 부족한 실력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한 뭔가를 품고 있을 경우.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당긴 것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도일은 몰라도, 칸이라면.’

도일은 똑똑한 머리를 지녔지만, 감성적이다.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살 수는 있을지언정, 절대적인 충성심을 받기는 힘들다.

하지만 칸은 달랐다. 만났을 때부터 ‘무슨 이런 또라이가 다 있을까’ 싶었던 녀석은 감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이성적인 면모가 강했다.

결단력이 있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기회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세력을 일굴 수 있을 만한 그릇이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연우로서는 이렇다 할 사람이 떠오르질 않아, 크로이츠에게 물었다.

“연대장이란 사람이, 누구지?”

하지만 크로이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하오. 여기서는 절대 말을 할 수가 없소. 워낙에 곳곳에서 그분을 노리는지라. 보안을 위해서는 철칙을 지켜야만 하오.”

연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오라고? 말이 되는 소린가? 그것도 말해 줄 수 있는 건 ‘벗’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밖에 없으면서? 뭘 믿으란 거지?”

“거듭 말씀드리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사과드릴 수밖에 없소. 그래도 본인이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우리 환상연대와 환영기사단이 가진 이름값을 믿고, 본인을 믿어 달라는 말뿐이오.”

크로이츠는 정말 자신을 믿어 달라는 듯,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 들겼다. 텅텅, 하고 소리가 났다.

“그래도 정 믿기 힘드시겠다면, 곧 연대장께서 폐관 수련에서 나올 거라고 기별을 보내시었으니, 그분이 오실 때까지 옆을 지켜드리고 싶소. 카인이 원하는 곳에, 연대장이 직접 오시도록 하면 될 것 아니오. 물론, 그만한 수고가 따르긴 하겠지만.”

크로이츠는 연대장이란 사람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깊어 보였다. 적이 많은 그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연우와 만날 수 있도록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칫 연우의 반발을 살까 싶어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도 보였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세력만 믿고, 강압적으로 연우의 신변을 구속하려 들기 쉬울 텐데.

‘그만큼 연대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도 강해 보이고.’

연우가 봤을 때, 크로이츠는 절대 타인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도나 정갈한 기품으로 보건대, 하나의 세력을 이끄는 리더로서의 자질이 강했다. 벤티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비슷한 면모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가 가진 기량은 절대 연우나 벤티케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끌어낼 수 있는 자라.

연우는 여태껏 일말의 관심도 갖지 않았던 연대장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돋았다.

하지만 호기심이 든다고 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 없는 일. 용마안은 절대 거짓이 없다고 말하더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말은 저 뒤에 있는 미심찍은 것들을 치워 두고 해야, 좀 그럴싸할 텐데?”

연우는 트리톤을 상대하면서 언제부턴가 멀리서부터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시선들을 엄지로 가리켰다.

시선들은 가지각색이었다. 인지 영역으로 포착되는 녀석들의 생김새나 품고 있는 기운도 제각각이었다.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이 그의 뒤를 몰래 밟고 있단 뜻이었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행적이 들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연우도 여태 녀석들을 그냥 못 본 척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위치나 이동 경로 등은 철저하게 파악해 두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림자를 일으켜서 몰살시키기 위해서였다.

크로이츠는 순간 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옆에 있는 수하가 귓속말로 몇 마디를 해 주고 난 뒤에야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야, ‘여섯 신성(新星)’ 중 둘이 부딪치게 되었는데. 이목이 집중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한 노릇이 아니겠소?”

처음 듣는 단어.

연우가 눈살을 살짝 좁혔다.

“여섯 신성? 그게 뭐지?”

“음? 여태 모르고 있었소?”

하지만 크로이츠는 의외란 반응이었다.

“제대로 말해.”

“하긴. 여태 개인 수련과 층계 공략에 집중했다면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겠소. 비교적 최근에 생긴 명칭이니. 하지만 그래도 탑 내의 변화는 시시각각 체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연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확실히 최근에는 소식이 많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외뿔부족 마을에서 폐관 수련하듯이 수련에 워낙에 집중했던 데다가, 탑에 돌아오고 나서도 한창 오르는 데 집중하다 보니 체크할 시간이 없었다.

“여섯 신성이란, 당신을 비롯해 새롭게 탑 내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슈퍼 루키들을 뜻하오.”

“루키?”

“그렇소.”

크로이츠의 설명은 간단했다.

외뿔부족과 레드 드래곤 간의 전쟁으로 비화된 발푸르기스 밤의 멸망 이후.

탑의 세계는 커다란 지각 변동을 맞으면서 여러 신흥 세력들이 대거 쏟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실력자들이 나타나 신위를 뽐내게 되었다.

여섯 신성은 그중에서도 단연 선두에 선 자들을 뜻했다.

독식자 카인.

마희(魔姬) 에도라.

환상연대장.

패왕 벤티케.

닥터 둠, 라눌.

페이스리스(Faceless).

“4대 신흥 클랜장에 더해 현재 한창 명성을 드높이고 있던 그대와 외뿔부족 청람가의 여식이 더해졌소.”

차기 아홉 왕의 후보군으로 불리면서, 새로운 세대의 상징으로 통하는 자들.

“물론, 닥터 둠이나 페이스리스는 신세대라고 하기엔 조금 오래 된 고인 물들이긴 하지만 말이오. 그래도 아홉 왕의 아성에 도전할 만한 자들이라는 건 틀림없지.”

연우는 이름의 면면을 듣고 조금 놀란 눈이 되었다.

‘에도라가?’

4대 신흥 클랜장들은 이미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클랜들의 수장이니 당연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발푸르기스 밤의 공략전에서 실력을 어느 정도 선보였기에, 더 이상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에도라가 여기에 꼽힐지는 몰랐기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 그대의 벗이기도 한 마희는 현재 42층을 공략 중이오. 너무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어서, 모두가 놀랄 정도이지. 아마 마의 벽이라 불린다는 50층도 쉽게 깨어 랭커의 자격을 금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평가가 지배적이오.”

마을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35층에 있다는 말을 들었었건만. 그 새 일곱 층계를 더 오른 모양이었다.

층계가 높아질수록 공략 난이도도 급상승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에도라의 공략 속도는 도저히 말이 안 될 정도로 빨랐다. 35층까지 오를 때보다, 42층에 다다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층계를 오르면 오를수록 공략 속도가 더 빨라지는 플레이어. 게다가 그녀는 이제 탑 내에서 최강자로 거론되는 무왕의 여식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크로이츠가 덧붙이기를, 그녀는 언제나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다고 했다.

절대 타인과 어울리지 않으며, 누군가 그녀를 이용하려 접근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베어 버린다던가.

개중에는 랭커도 섞여 있어, 이제는 아무도 섣불리 그녀에게 덤비지 못했다.

마희라는 어두운 별칭이 붙은 것도, 그런 차가운 성정과 손속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반해, 그 뒤를 따라다니는 추종자들도 여럿 있을 정도라 하니. 그들을 가리켜 따로 ‘마희성(魔姬城)’이라는 웃지 못할 별명이 붙기도 했소. 정작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라지만.”

만약 마희성이 제대로 된 조직 체계까지 갖춘다면, 4개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은 당장 한 개가 더 추가될지도 모를 만큼 규모도 제법 컸다.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판트가 알면 배깨나 아파하겠군.’

워낙에 질투심이 많은 판트이니. 아마 동생의 그런 맹활약을 질투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열의를 더 불태울 것이라는 의미였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에도라에게 고맙기도 했다.

에도라는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숨기는 것도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실력을 뽐내지 않는단 뜻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건. 역시 연우의 부탁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너희들이 강해졌으면 좋겠다. 그 말이, 폐관 수련에 들어가 혈뢰에 매달리고 있는 판트에게만큼이나, 에도라에게도 강한 동기를 부여했다는 뜻이겠지.

“여하튼 현재 상황이 그렇소. 8대 클랜은 고층에서 레드 드래곤이 남긴 유산을 두고 서로 저들끼리 물어뜯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이고, 비교적 낮은 층계에서는 4대 클랜들과 여섯 신성이 서로 두각을 번갈아 나타내고 있지. 그리고.”

크로이츠는 눈에 불을 켜며 힘을 가득 실어 말했다.

“그중에서 가장 선두에 있는 자가 바로 카인, 당신인 것이오.”

“…….”

연우는 아주 잠깐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여러 눈들. 그들은 대개 4대 신흥 클랜이거나, 그에 준하는 강자들일 게 분명했다. 아니면 8대 클랜의 산하에 속해 있거나.

어찌 되었건 간에, 이제 모두의 집중이 그에게 쏠리고 있단 뜻이기에.

연우는 트리톤과의 전쟁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따라붙는 눈들이 많아서야 이리저리 귀찮고 불편하기만 할 것이오. 트리톤과의 전쟁에 집중해야 하는 이때, 저들이 어떤 방해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저들은 대개 그대가 트리톤의 전력을 대폭 깎아 주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공멸하기를 바라고 있소.”

연우는 다시 크로이츠를 돌아봤다.

“그러니 방해를 받지 않게 너희들의 보호를 받으란 뜻인가?”

“그런 표현이 거슬린다면, 손을 잡자고 하는 게 어떻겠소? 아니면 그대가 우리를 고용했다고 해도 좋고. 어떤 표현이라도 좋소. 우리는 그대가 연대장과 무사히 만날 수 있도록 돕고, 그대는 다른 곳의 방해 없이 트리톤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으니 좋을 것이오.”

“내 몸은 혼자서도 잘 지킨다.”

“거추장스럽단 뜻이오? 하면 기사단은 널리 물리도록 하겠소. 대신에 나 혼자라도 좋으니, 조용히 그대를 따르게 해 주시오.”

연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크로이츠는 이래저래 내쳐도 어떻게든 따라붙을 생각인 모양었다.

순간, 그와 겨뤄서 내쫓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그래서는 환영기사단과 통째로 전투를 치러야 하는 데다가, 크로이츠의 실력도 벤티케에 못지 않기 때문에 이쪽의 피해만 클 수 있어서 접었다.

환영기사단과 싸워서 얻을 것은 없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자들을 굳이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는 데다가, 지금은 트리톤과 전쟁을 벌이는 데 집중해야 했다. 벤티케는 어떻게든 잡아야만 했다.

결국 연우는 손사래를 쳤다.

“마음대로 해. 대신에 기사단은 옆에 붙이지 마. 귀찮으니까.”

“알겠소.”

크로이츠는 환영기사단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단원들은 일제히 거리를 띄워 흩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두 사람을 보호하며, 외부의 간섭을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쪽으로 가깝게 접근하려던 눈들도 뒤로 멀찍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환영기사단은 환상연대의 손꼽히는 전력들. 당연히 그들로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물러나지 않는 시선도 몇몇 있었다.

하나같이 기운을 안쪽으로 갈무리하고 있지만,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품고 있는 자들. 역시나 크로이츠에 못지않거나, 그에 준하는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연우는 그들이 다른 여섯 신성이거나, 2인자들이 아닐까 하고 여겼다.

‘역시 탑에는 강자들이 많아.’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난 그쪽과 발을 맞출 생각이 전혀 없다. 따라오려면, 알아서 붙어.”

“걱정 마시오.”

크로이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쉽게 대답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무슨…….”

쐐애액-

크로이츠가 무슨 말을 하냐며 되물으려는데, 갑자기 연우가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대지를 박찼다. 바람길을 이용한 블링크.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오아시스를 벗어나고 있었다.

크로이츠는 아차 싶었다. 독식자의 기동력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이렇게 무거운 중갑주를 착용한 상태로 연우의 뒤를 쫓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뙤약볕에 팔자에도 없는 달리기를 해야 할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검지와 중지를 입에다 물고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익-

그때, 저 멀리 하늘에서부터 3미터에 달하는 크기를 자랑하는 와이번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환영기사단이 자랑하는 탈것, 비룡(飛龍).

크로이츠는 단번에 와이번 위에 올라타, 목에 걸려 있던 고삐를 잡아당겼다. 연우의 뒤를 따라잡으려면 오늘 한참 동안 날아야 할 것 같았다.

* * *

“어? 어어! 저거 저러면 반칙인데.”

“여태 편하게 온 거였지. 일단 죽어라 뛰어야겠군.”

“타하하! 이건 또 이거대로 재미있겠는데?”

플레이어는 연우와 환영기사단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라처럼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전신을 하얀 붕대로 칭칭 감고 있어 성별과 나이를 구분하기 힘든 자. 심지어 붕대 아래에서는 중얼중얼 서로 다른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마치 한 사람의 몸에 여러 사람이 깃든 것처럼 묘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세간에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라는 뜻의 페이스리스로 유명한 그가, 가볍게 대지를 박찼다.

* * *

“움직인다.”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흑마법사의 말에 따라, 그를 따르던 마법사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닥터 둠과 그의 제자들로 이뤄진 클랜, 네크로폴리스. 그들은 곧 바닥에 깔린 붉은색 포탈을 타고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있던 자리는 생기가 모두 빨린 나머지, 모든 것이 시커멓게 죽어 메마른 사지(死地)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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