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93화 (293/862)

18화. 포세이돈 (5)

“독식자가 바로 턱밑까지 다가 왔다는데. 이제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결사대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 같고.”

일라인은 가늘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진랑을 바라봤다. 진랑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미친년.’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죽었다. 그리고 원수가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니. 예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일라인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예전부터 그랬다.

라나의 아래에 있을 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깊은 생각이나 어떤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 놓일 때마다, 더 재미난 길을 쫓기만 했다. 그야말로 쾌락에 미친자였다.

마지막에 쿠데타를 일으킬 때에도 마찬가지. 라나보다는 트리톤과 함께 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면서 손을 잡았다. 동기부터가, 언젠가 벤티케의 자리를 강탈할 것이라는 허황된 희망에 젖었던 테드보다 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런 정신머리는 아직도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이성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진랑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고 싶지도, 가까이하고 싶지도 않은 사고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연우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입혀 주고 알아서 도망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테드는 너무나 허무하리만치 쉽게 당하고 말았다.

‘독식자가 여태 숨기고 있던 게 있었나?’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벤티케와 왈츠의 원영신, 아르드바드 공작, 환상연대가 복잡하게 얽히는 싸움터에서 끝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아무리 독식자가 속을 알 수 없는 괴물이라지만. 그건 상식적으로 도저히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아니면 그사이에 더 강해졌다는……? 그것도 말이 안 돼.’

하지만 진랑은 진실이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가깝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후자 쪽이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이번에 놈을 죽여야 한다.’

독식자의 성장 속도는 이따금 주변에서 보는 이들의 등골을 쭈뼛 서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구석이 많았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싸움으로 그만큼 강해진다면. 재능부터가 남다르단 뜻이었으니까. 그런 위험 분자는 계속 내버려 두면 내버려 둘수록 클랜에 있어 위험 요소밖에 되질 않았다.

다만, 문제는.

‘놈을 막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진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 누르면서, 슬쩍 뒤를 바라봤다.

거대한 철문이 입을 꾹 다문 채로 서 있었다. 철문의 표면에는 해일을 일으키는 삼지창을 높이 들면서 갖가지 괴물들이 만들어 내는 언덕 위에 높이 선 포세이돈의 성화(聖畵)가 그려져 위압감을 불러일으켰다.

저 철문은 근 며칠째 열릴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래서. 대장께서는 대체 언제 나오신단 거야?”

진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다. 단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회복이 더디신 것 같아.”

“그럼 바깥 상황도 말씀을 못 드렸단 뜻?”

진랑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역시 우리 참모만큼 대장에 대한 지극정성이 대단한 사람도 찾기 힘들 거야. 안 그래? 성가시게 해 드리기 싫다면, 내가 말씀드리지.”

일라인은 진랑의 옆을 홱 지나치면서 철문에 다가섰다. 진랑은 굳이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저런 시도가 헛수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일라인은 진랑의 예상대로 철문에 다가가지 못했다.

철문 너머. 거대한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끈적끈적하면서도 강렬한 힘. 사위를 압도하고, 고개를 절로 숙여야만 할 것 같은 엄청난 무언가가 꿈틀대는 중이었다. 그것은 괴물 같기도, 그들이 모시는 신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철문에 다가갈수록 그런 정체불명의 힘이 더 커지고 있어서. 일라인은 몇 걸음을 옮기다 말고 다시 진랑을 돌아봐야만 했다.

이대로 더 다가갔다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홀라당 저쪽으로 빼앗길 것 같은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언제나 엷은 미소를 띠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이게 대체 무엇이냐는 경악이 단단히 새겨졌다.

저 미친년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진랑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대장께서 무언가를 준비 중이신 게 분명하다. 어쩌면 포세이돈과 어떤 신통(神通)을 이루고 계 시는지도 모르지.”

“신통? 이게 신통이라고……?”

“여하튼 대장께서 저 문을 열고 나오실 때까지 접근은 불허한다. 아니, 다가가지 않을 것을 권고하지. 허무하게 신력을 모두 빨려 죽고 싶지 않다면.”

일라인은 철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며 숨을 골랐다. 경악에 가득 찼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눈가에 희열이 가득 차올랐다. 진랑은 이제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신물이 날 정도였다.

“흐응. 그럼? 이제 저 무단 침입자들은 어떡하려고? 우리들로만 막게? 이제는 단순히 독식자가 문제인 게 아닌 것 같은데?”

연우의 뒤를 쥐새끼처럼 따라붙은 놈들을 말하는 것이다. 크로이츠와 페이스리스, 닥터 둠. 전부 마음 같아서는 한꺼번에 치워 버리고 싶은 놈들이었다.

하지만 잘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여태 트리톤의 행사에 방해만 일삼던 골칫거리들을 한꺼번에 제 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너와 내가 치워야지. 어떻게든.”

“그건 내 손을 필요로 한다는 뜻?”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부족한 지경이니까.”

“참, 이럴 때는 솔직해져도 괜찮은데 말이야. 네가 잡으려는 손은 고양이 정도가 아니라고.”

일라인의 동공 위로, 새로운 동공 수십 개가 새롭게 열렸다.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을 절로 일으키게 하는 겹눈이 수십 개로 갈라진 진랑의 얼굴을 즐겁게 담아냈다.

* * *

연우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저 멀리, 해안가를 따라 높게 치솟은 절벽 위에 거대한 성채가 세워진 것이 보였다.

성채는 여러 모습을 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버려진 폐성(廢城)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요새, 혹은 신전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확실하게 느껴졌다.

저곳에 벤티케가 있었다. 거대한 뭔가를 품고 있는 채로.

‘뭘 하고 있는 거지?’

벤티케의 그림자 속에 숨겨 뒀던 괴이는 언제부턴가 연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찾아서 소멸시켰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연결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마치 중간에 뭔가로 가린 것처럼. 그 너머가 느껴지지 않았다.

연우는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신의 결계.’

흔히 신과 악마가 자신의 힘을 제대로 하계에 투영하기 위해 만든 장소를 성소(聖所) 혹은 성역(聖域)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소와 성역을 둘러치고 있는 게 바로 이런 신의 결계였다.

16층, 앉은뱅이 세 여신의 신전에서 느꼈던 것도 저런 것과 비슷했다.

‘특히 우르드 신이 내려왔을 때가 더 저랬을 텐데. 뭐지? 포세이돈이라도 내려온 건가?’

하지만 연우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닥치시오!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어떻게 내 탓인가! 신이 되어 이깟 일도 예지하지 못한 당신 탓이지!

-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성질만 더러운 우리 신 때문에. 조금 못난 모습을 보였군. 다시 시작하지.

벤티케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시는 신인 포세이돈에게도 막말을 퍼붓던 인간이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하던 녀석이니만큼, 아예 강신(降神)을 이뤘다는 게 이상했다.

‘아니. 강신도 아니야.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하지만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한 강신이라면 포세이돈의 신력이 강하게 느껴졌겠지만. 지금 성안 쪽에서 일어나는 파동은 그것과 비슷하되,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부딪칠 수밖에 없겠지.’

연우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천천히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의 뒤를 따라오던 여러 기척들이 더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연우가 본격적으로 트리톤과 전면전을 벌이면, 상황을 지켜봤다가 어부지리를 취할 생각일 모양이었다.

하지만 연우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들이 트리톤의 옆구리를 후려쳐서 어부지리를 취하든, 후미를 공격해서 트리톤의 전력을 깎아먹든.

여기서 연우가 원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못다 끝낸 벤티케와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포세이돈의 신력을 강탈하는 것.

그것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다른 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리든지 관심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혼란을 조장할 수 있으니 그에게는 괜찮은 패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뒤를 노릴 수도 있겠지만. 왈츠의 원영신도 따돌렸던 마당에, 저런 놈들의 공세에서도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할까.

게다가 크로이츠와 환영기사단도 약속했던 것처럼, 거리를 적당히 멀리 띄우면서 접근하고 있었다. 크로이츠가 비교적 그와 거리가 가까웠지만, 그는 약속한 대로 여태 아무 개입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

연우는 성으로 올라가면서 마력 회로를 가동시켰다. 어느덧 외뿔 부족의 혈도만큼 많아진 360개의 코어가 회전하고, 현자의 돌이 쉴 새 없이 마력을 공급했다. 감각이 깨어나고, 근육이 잔뜩 긴장했다. 용마안과 초감각도 활짝 열리면서 성을 둘러싼 흐름을 읽었다.

여차하면 바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언제 어디서 트리톤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될지 몰랐다. 여태껏 모습을 계속 드러내지 않았던 만큼, 모든 전력이 성에 있으리란 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지?’

연우는 성 쪽으로 다가가는 내내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요충지는 텅 비어 있었다. 절벽을 따라 포진해 있어야 할 병력도 없었다. 용마안과 초감각을 아무리 돌려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성채에 다다를 때까지 똑같았다.

정말 버려진 폐성이라도 되는 걸까.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마구 풍기던 폐성은 성문까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얼마든지 들어오라는 듯.

격전을 예상했던 연우로서는 조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김이 빠졌지만,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성문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드러난 광장에, 한 남자가 바위에 앉은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도 얼핏 봤던 얼굴이었다. 아르드바드 공작으로부터 벤티케를 구했던 자.

‘진랑.’

라나 아래에 있을 때부터 그의 심복이었으며, 오리온 신의 사도이기도 한 이는 연우를 보자마자 천천히 바위에서 일어났다.

“결국 여기까지 오시었군. 그냥 지나치길 간절히 바랐건만.”

진랑은 여러모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벤티케가 회복을 위해 칩거에 들어가고, 그는 그동안 트리톤에 닥친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트리톤이 맞닥뜨린 재앙은 연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연우의 뒤에 따라붙으면서 빠르게 트리톤의 영역을 야금야금 먹어 치워가는 다른 세 클랜이 있었던 것이다.

환상연대, 네크로폴리스, 페이스리스의 ‘망자의 함’까지.

이들 전부가 트리톤을 공적으로 지목하고, 은연중에 연합을 이루며 압박을 가해 오니 신경 써야 할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연우가 언제부턴가 기습을 받지 않았던 것도 전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대로 계속 각개격파를 당해서는 정말 본거지까지 위험했다. 그래서 전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부탁하건대. 여기서 싸움을 끝낼 생각은 없소?”

진랑은 진심이었다. 만약 여기서 전쟁을 멈출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단순히 연우만 옆으로 치워 둬도, 트리톤은 할 수 있는 게 아 주 많았다. 독식자는 그만큼 골치가 아픈 상대였다.

연우로서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지만.

“너희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면서?”

“거기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사죄를 하겠소. 필요하다면 배상도 하겠소. 말만 하시오.”

진랑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연우는 그 속에서 간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벤티케의 머리를 원한다면?”

진랑의 낯이 굳어졌다.

“끝까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이로군.”

“애당초 그럴 수가 없지. 여기서 내가 끝낸다고 해도, 벤티케도 순순히 그러겠다고 할까?”

“…….”

진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설사 지금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언젠가 내 뒤를 노리겠지. 날 노리는 건, 정확하게는 벤티케가 아니라 포세이돈이니까. 그의 시종이나 다름없는 너희들이 신탁을 거부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데.”

진랑은 연우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맞소. 우리는 포세이돈의 선택을 받은 자들. 따지자면, 그의 말을 따르는 신관과 비슷하지. 언젠가 다시 당신과 부딪칠 수밖에 없을 거요.”

“나는 찜찜한 걸 놔두지 않는 편이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화아아-

진랑은 양손을 등 뒤로 가져가 ‘X’자로 걸고 있던 쌍검을 천천히 뽑기 시작했다.

스르릉.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면서 기세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테드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농도 짙은 기세였다.

“우리도 이를 악물고 싸우는 수밖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앙!

갑자기 지반이 크게 요동친다 싶더니 뒤쪽이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제길! 귀찮게 되었군!”

이곳을 주시하고 있던 플레이어들 사이로 거대한 괴물 수십 마리가 튀어나오면서, 갑작스레 공격을 시도했다. 괴물들의 머리 위에는 트리톤의 플레이어들이 잔뜩 올라타 있었다. 여태 자취를 감춰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던 병력이 거기에 있었다.

〈괴물 난동〉. 일라인이 모시는 카리브디스 신의 권능.

카리브디스는 포세이돈이 가이아와 결합하면서 태어났다. 바다와 육지의 힘을 같이 타고나, 태생적으로 흉측한 괴물이었던 그녀는 세상 모든 괴물들의 왕이 되었다. 당연히 여러 괴물들을 다스리는 권능이 저절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기회를 엿보며 어부지리를 취하려 했던 망자의 함이나 네크로폴리스로서는 자신들을 노릴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재빨리 진영을 갖춰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다른 자잘한 세력들의 경우에는 단번에 괴물에 짓밟히거나, 한낱 먹이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그리고. 동시에 연우를 둘러싼 공간이 뒤틀리면서 전혀 다른 공간에 그를 옮겨다 놓았다.

카아악!

그런 그의 앞으로. 진랑 대신에 수십 미터나 되는 몸집을 자랑하는 괴물 뱀이 아가리를 잔뜩 벌리면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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