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포세이돈 (6)
연우는 반사적으로 아공간에서 비그리드를 꺼내 위로 쳐올렸다.
까앙!
가가가각-
괴물 뱀의 독니가 아슬아슬하게 연우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녀석은 어떻게든 연우를 집어삼키고자 턱에 바짝 힘을 주었지만, 마룡체를 완성하면서 단련한 근력은 꿈쩍도 않았다.
그래도 괴물 뱀이 가진 힘이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보통 괴물이었다면 바로 머리통이 잘려 나갔겠지만. 비그리드를 막고 버텨 낼 정도로 대단했다. 지이잉. 비그리드가 잘게 떨렸다.
연우는 용마안을 통해 괴물 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일라인.”
트리톤을 지키는 또 다른 간부. 일라인의 변형체였다.
〈둔갑 - 괴(怪)〉. 카리브디스 신은 그 자체로도 이미 대단한 괴물이기 때문에, 사도인 일라인에게는 단순히 괴물을 다스리는 권능뿐만 아니라, 카리브디스의 허물로 변할 수 있는 권능도 같이 주어졌다.
하지만 일라인은 평소 괴물로 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뜻은 하나.
“나부터 빨리 처치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소.”
연우의 혼잣말에 대한 대답은 바로 뒤쪽에서 들렸다. 어느새 진랑이 고요한 눈빛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죽어 주시오, 독식자.”
쐐애액!
진랑은 손에 쥐고 있던 쌍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칼날을 따라 단단하게 맺힌 오러가 찬란한 빛을 토해 냈다.
〈해일참(海溢斬)〉. 칼을 휘두를 때마다, 절벽에 부딪히는 해일처럼 강한 일격을 날리는 스킬이었다.
녀석의 칼날이 연우의 허리를 쓸기 바로 직전.
연우는 마력회로를 단번에 회전시켰다. 여태 대기하고 있던 현자의 돌이 잔뜩 가열되면서 불의 날개를 한껏 뿜어냈다.
콰아앙-
막대한 열압이 폭발하듯이 팽창하면서 진랑을 뒤로 튕겨 냈다. 진랑은 짙은 고랑을 남기면서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그의 양팔이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흉측하게 타 버린 살갗 위로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끔찍한 고통을 낳았다.
비록 신력이 작동하면서 빠른 복구를 하곤 있지만. 그래도 바다의 가호를 받고 있는 육체에다 이런 상처를 남기는 열풍이라니. 도대체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경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연우가 불길을 한껏 휘감으면서 몸을 측면으로 틀었다. 새하얗게 빛나던 비그리드가 검은색으로 물들면서 거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불의 파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발이 일라인과 진랑을 단숨에 덮쳤다. 그리고 그들을 둘 러싸고 있던 공간을 가득 채웠다.
콰콰쾅-
공간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열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박살 났다. 열 폭풍은 외부 세계에서도 거친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단숨에 하늘에 닿았다. 대기가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갔다.
진랑은 단번에 튕겨 나면서 바닥을 한참 동안 나뒹굴어야 했다. 그리고 검을 지팡이 삼아 억지로 일어났을 때, 그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크게 위아래로 요동쳤다.
‘어떻게 이런……!’
원래 그가 짰던 계획은 간단했다.
망자의 함이나 네크로폴리스가 한창 괴물들의 기습에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자신과 일라인이 빠르게 연우를 제거하고 나머지 녀석들을 상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 어려울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이곳은 포세이돈의 가호가 직접적으로 닿는 성역의 근지(近地)였고, 연우를 유리된 공간에 가둬서 제거한다면 그 뒤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다른 세력들이야 벤티케가 철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진랑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연우는 단순히 가둬 놓고서 일라인과 합공을 한다고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역시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그런 괴물 같은 놈이었던 건가.’
실력을 숨기고 있던 걸까, 아니면 그만큼 더 강해진 걸까. 진랑이 가졌던 두 고민 중 후자가 증명된 셈이었다. 이 작전은 어디까지나 연우가 지난 벤티케와의 싸움에서 드러낸 실력을 토대로 수립한 것이었으니.
‘아니. 둘 다였나.’
하지만 진랑은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느덧 연우의 머리 위로, 두 개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도깨비불처럼 둥둥 떠올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오시하고 있었다. 마치 경멸스러운 벌레를 보듯이.
살짝 열린 공간의 틈 사이로 비치는 두 눈은. 진랑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뭐지, 저건?
진랑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만다. 흔히 말하는 ‘심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이럴까.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낭떠러지의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기분이었다.
저것을 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구축한 유리 공간은 저 두 눈의 주인이 이룬 경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애당초 공간을 분리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연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를 숨겨 두고 있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 아니야. 오, 오지 마아앗!”
어느새 인간 형태로 돌아온 일라인이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땅을 발로 밀면서 억지로 물러나려 했다. 옷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고, 화상으로 잔뜩 망가진 얼굴은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남동생이 죽었어도 히죽 웃기만 하던 녀석이. 뭘 하면 재미있을까 늘 쾌락만 좇던 그녀의 저런 행동은 진랑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만큼 일라인은 부의 눈에 크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테드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본래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때문에 괴물의 왕인 그녀의 눈에는 부가 얼마나 대단한 격을 지니고 있는지. 부가 얼마나 까마득하게 높은 존재인지 모두 보였다.
그녀 같은 이들에게 있어서. 부는 절대 넘을 수가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무리 일라인이 랭커에 달하는 실력이고, 가진 힘은 부를 넘는다고 할지라도. 속성 차로 인해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부는 그런 한계의 위에 놓인 존재였다. 아니, 그 위보다도 훨씬 상위에 놓여, 그녀로서는 감히 눈도 마주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만난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언제나 그녀를 지켜 주던 카리브디스 신의 가호도 언제부턴가 희미해져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넌. 나를. 알아. 봤구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지면서 일라인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마치 귓속말처럼 작게 그녀의 귓가에다 속삭였지만, 일라인에게는 머릿속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크게 다가왔다. 골이 조여 오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 다면.」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말은 일라인의 심장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죽어. 라.」
보이지 않는 손이 그림자를 타고 올라와 일라인의 숨통과 영혼을 옥죄려던 그때.
“한 명.”
스걱-
일라인 뒤쪽으로 서늘한 칼바람이 불어닥치더니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목을 잘랐다. 일라인은 경악한 표정 그대로 머리가 허공으로 튀었다.
피가 튀는 분수 아래로.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아 성별도 나이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자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페이스리스. 여섯 신성 중 한 사람이자, 망자의 함의 수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녀석은 성대가 대부분 끊어져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괴기한 목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일라인과 카리브디스 신의 채널링이 끊어지면서 괴물들이 통제를 잃고 혼란에 잠기자, 재빨리 제거하고 전장에 개입한 것이다.
페이스리스는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방관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판단, 단번에 일라인의 머리를 자르면서 성안 쪽으로 뛰어들었다.
자기 앞마당이 혼란스러운 와중인데도 불구하고, 벤티케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 말뜻은 하나. 벤티케가 지난 독식자와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 덜 회복되었다던 추론이 맞아떨어졌단 뜻이었다.
「감. 히……!」
부는 잔뜩 분노를 드러냈다. 황망하게 바로 보는 앞에서 먹잇감을 빼앗기고 말았다. 평범한 먹잇감이 아니었다. 위대한 주인께서 취하실 신의 인자가 잔뜩 뭉친 맛난 먹잇감이었다. 그런데 그걸 놓치고 말았으니……!
재빨리 괴이들을 움직여 일라인의 사체를 그림자 속으로 숨기긴 했지만. 그래도 영혼은 컬렉션에 담지 못했다. 사도의 영혼이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부는 페이스리스를 잡기 위해 마법을 가동시켰다. 녀석이 디디고 있던 땅이 움푹 꺼지면서 그림자 촉수가 단박에 일어나 녀석을 칭칭 감쌌다.
페이스리스의 낯이 잔뜩 굳었다. 비록 붕대로 감고 있어서 보이진 않지만. 단번에 벤티케가 있는 곳까지 쳐들어가려던 그로서는 발목이 묶인 꼴이라 거치적거리기만 했다.
연우의 머리 위에 맺힌 거대한 눈동자가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진랑과 일라인에게나 암담한 격의 차이를 느끼게 할 뿐이지, 페이스리스는 그런 것에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거치적거린다!”
페이스리스가 달리던 그대로 몸을 크게 돌렸다. 그러자 앙상하게 메마른 팔에서부터 붕대가 길게 풀려 나오면서 그림자들을 뭉텅 뭉텅 썰었다.
붕대는 채찍처럼 낭창거리면서도, 때때로 칼날처럼 빳빳해지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면서 부의 공격을 일일이 쳐 냈다. 붕대에는 오러가 잔뜩 섞여 있었다. 매서운 움직임과 다르게 섬세한 컨트롤이었다.
쾅!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불덩이가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발끝에서부터 붕대가 풀려나오면서 둥그스름한 반구 형태를 만들었다.
페이스리스는 그렇게 타 버린 붕대는 끊어서 버리고, 다시 새로운 붕대를 풀어내면서 방향을 꺾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방해만 될 것 같아 먼저 부부터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목표는 연우였다.
쐐애액-
그리고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붉은색 포탈이 열리더니 한 중년인이 내려왔다.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어 생김새를 알아보기 힘들지만, 눈 밑이 휑하게 내려앉은 폐인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너희들 모두에게 악운(惡運)을 선언한다.”
닥터 둠, 라눌은 꺼림칙한 말을 내뱉으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드넓은 상공을 따라 여러 개의 마법진이 곳곳에 맺혔다.
〈무영창 마방진〉. 닥터 둠은 다섯 마탑의 수장들이 오랜 연구 끝에 탄생시킨 공동전인. 그는 플레이어 중에 유일하게 별다른 영창이나 메모라이즈 없이 여러 개의 마법을 동시에 발동시키는 새로운 마법 체계를 구사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헤븐윙 차정우의 〈무차별 난사〉와 비슷할지도 모르는 스킬을 따라. 하늘에 주렁주렁 열린 마법진이 일제히 마법을 터뜨렸다.
무영창으로 전개하는 만큼, 기초적인 마법들밖에 없었지만. 그런 것들을 수십 개나 열고, 여러 버프를 실어, 한 점에 포화를 집중한다면 위력은 얼마든지 증가시킬 수 있었다.
콰콰쾅-
닥터 둠이 노리는 건, 일대에 있는 모든 것들이었다. 연우, 페이스리스, 진랑, 숨어 있는 벤티케까지. 아주 고맙게도, 녀석들이 한 지점에 잔뜩 뭉쳐 있었으니 무차별적으로 두들기다 보면 뭐라도 건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크로이츠도 개입했다. 연우의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지만,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그를 보호해야 하는 크로이츠로서는 이 위기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비룡에서 뛰어내리면서 닥터 둠에게로 검을 내리쳤다. 성검, 줄피카르가 빛을 터뜨렸다. 〈성스러운 십자가〉. 하늘을 따라 맺힌 새하얀 섬광이 소낙비가 되어 쏟아졌다.
“이것들이, 감히!”
그리고. 진랑은 가장 크게 분노했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4대 신흥 세력으로 묶여 있다지만, 그래도 여태 자신들이 무서워 근처에도 오지 못하던 놈들이. 기회가 한 번 주어졌다고 쥐새끼처럼 잔뜩 몰려와서 지랄을 해 대는 꼴이 같잖기만 했다.
웬만한 일에 있어서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지녔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화를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화아악-
진랑의 육신에 오리온 신이 강림했다.
이곳은 포세이돈의 신전이 있는 성소 근지였고, 인과율에 묶인 신의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장소였다.
오리온은 강화된 채널링을 통해, 사도인 진랑의 간절한 바람에 따라 현현(顯現)할 수 있었다. 진랑의 육체를 따라 희뿌연 신력이 스파크처럼 튀었다.
성좌의 신은 밤하늘에 맺혀 있기에 언제나 화려하게 빛난다. 즉, 웬만한 신들보다 더 뛰어날 수밖에 없다는 뜻.
더구나 오리온은 전승에 따라, 올림포스 12주신 중 한 명인 아르테미스의 총애도 함께 받고 있었으니.
진랑은 크게 포효하면서 칼을 휘둘렀다. 해일참이 더 강렬해지면서 공간을 쪼개고 또 쪼개면서 소중한 성역을 더럽히려는 침입자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설명은 복잡하고 길었을지 몰라도, 이 모든 것들은 찰나에 가까운 순간 동안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여섯 신성 중 두 명이 추가로 개입하고, 신력이 튀어오르며, 부가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내려는 동안.
[시차 괴리]
연우는 한껏 느려진 세계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용마안과 초감각이 모든 투로들을 계산하고 예측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시간 예지]
째깍, 째깍-
회중시계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전보다 조금 더 긴 5초. 그동안 그는 아주 많은 것들을 봤다.
또한, 조심했다.
시간 예지가 만능이 아니란 것쯤은 이미 벤티케와의 싸움에서 확인했다. 신의 힘이 개입된 싸움에서 ‘확실’이란 것은 없었다. 계산에 담지 못한 미래가 더 많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더 면밀하게 살피고, 보다 확실한 미래를 예측했다.
그리고.
그것을 붙잡았다.
비그리드의 끝에서 다시 한 번 더 검은 오러가 폭발했다. 불의 파도가 빠른 속도로 복잡하게 얽힌 스킬들 사이에 번져 나갔다.
그때. 회중시계가 멈췄다. 정지되었던 시간이 되돌아왔다.
콰아아앙-
폭발이 성채 전체를 뒤덮었다.
그 속에.
연우만이 유일하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