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포세이돈 (11)
‘뭐지?’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잠에 취해서 한창 회복에 매달리고 있던 도중, 허전한 느낌이 너무 강해서 눈을 떴다.
그리고 뒤늦게 채널링이 하나 사라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즈라엘과의 채널링. 스테이터스 창을 띄워 보니, 어느새 권능 목록에서도 제3천의 영이 빠져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실 따지자면, 여태 연우가 받았던 권능 중에서 가장 편리하게 쓰고 있던 것이 제3천의 영이었다.
보다 쉽게 망령을 다루고, 괴이들을 강화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아즈라엘의 계속된 축복으로 권한도 계속 강화되어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었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으니. 자신에게 늘 따라 붙는 시선 중 아즈라엘의 것도 없었다.
“샤논! 한령!”
연우는 다급하게 동굴 밖을 지키고 있던 두 권속들을 불렀다. 그는 마신룡체가 90% 이상으로 진행되면서 달라진 육체를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땅에 어린 그림자에서 샤논과 한령이 나타났다.
「왜 그러나, 주인? 무슨 일이라도 있어?」
「부르셨습니까.」
“혹시 내가 잠에 든 동안,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일?」
“내 근처에 누가 왔었다든지, 아니면 내 몸에 어떤 이상이 있었다든지.”
「그럴 리가. 이곳은 우리가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어. 주인에게 어떤 이상이 생길까 봐 수시로 체크도 하고 있었고.」
샤논의 말에 한령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연우의 낯은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지키고 있던 정령,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레베카는 오랜만에 인간의 형상으로 되돌아오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전혀 모른다는 뜻.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즈라엘은 그를 사도로 삼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칠흑왕에 대한 갈망을 봐서는 절대 이렇게 쉽게 그를 떠날 존재가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신과 악마들의 반응이었다.
[헤르메스가 걱정 말라면서 타이릅니다.]
[아테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혼돈이 침묵합니다.]
[아가레스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코웃음을 칩니다. 속이 시원하다면서 통쾌하게 웃습니다.]
이들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죽음과 관련된 신과 악마들의 반응들.
[타나토스가 침묵합니다.]
[태산부군이 침묵합니다.]
[크시티가르바가 침묵합니다.]
[아이쉬마-다이바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할파스가 침묵합니다.]
……
‘역시 뭔가 있어.’
연우는 동요하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혹시 뭔가를 확인할 수 있을까 싶어 메시 지창을 위로 조작하면서 놓친 부분이 있나 확인했다.
그러다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떠오른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자격 요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칠흑왕의 비탄’의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자격 요건?’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일까? 여태 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던 족쇄의 비밀이 풀렸다니.
연우는 재빨리 왼쪽 발목에 감긴 칠흑왕의 비탄을 확인했다.
[‘칠흑왕의 절망’과 ‘칠흑왕의 비탄’의 정보창이 통합되어 ‘칠흑왕의 형틀(2/3)’이 오픈됩니다.]
[칠흑왕의 형틀]
분류: 세트
등급: ???
설명: 과거 ???들은 죽음과 어둠을 다스리던 위대한 왕을 당해 낼 재간이 없어 늘 공포와 두려움에 잠겨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그를 배신하고 어둠 속에 유폐시켰다.
칠흑왕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배신감에 치를 떨며 격노를 터뜨렸다. 덕분에 그를 구속하던 3개의 형틀은 변질되어 그의 수족이 되었다.
수갑은 영혼을, 족쇄는 죽음을, 항쇄는 어둠이 되어 그의 뜻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 영혼 수확자
소유자가 죽인 대상자의 영혼을 거둘 수 있다. 이때, 영혼은 망령으로 타락해 생전의 힘을 모두 잃고, 짙은 원한만 남는다.
수집된 망령들은 컬렉션에 속박되어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소유자의 숙련도에 따라 컬렉션의 크기도 대폭 늘어날 수 있다.
* 흑살(黑煞)
흑기가 강화된 형태. 귀속된 망령을 소모해 마력을 암흑 속성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소모된 망령의 수만큼 속성력도 강화된다.
이때 사용된 마력은 시전자에게는 버프 효과를, 대상자에게는 디버프 효과를 낳는다. 특히 랜덤으로 발생하는 저주는 대상자에게 큰 살풀이로 다가올 것이다.
* 제2천의 영
컬렉션에 수확한 망령은 언제나 자신을 죽인 소유자를 원망한다. 하지만 그런 원망과 원한을 무시하고, 시전자의 절대적인 의지를 심어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
평상시에는 언제나 떼를 이루며 움직이면서 지나는 길에 놓인 것들의 생명력을 닥치는 대로 갈취하고, 이들 무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조차 제대로 남지 못한다.
또한, 시전자가 원할 시, 소유자는 일정분의 마력을 소비해 망령을 사귀(邪鬼)나 괴이(怪異), 혹은 그 이상의 존재로 진화시킬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소유자의 충실한 충복이 되어 어떤 명령이든지 기쁘게 수행할 것이다.
* 사자 소환
컬렉션에 수확한 망령 중 일부를 소진하여, 저승에 머무르고 있을 죽은 영혼을 강제로 소환시킨다.
영혼이 가진 격에 따라 소환에는 제한 횟수 및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으니 주의해야만 한다.
단, 이때 소환된 영혼은 명백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어 복속시키는 데 제한이 걸린다.
* ???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봉인)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인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타인으로의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기능 중 일부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야만 해제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일부 열람할 수 없습니다.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야만 권한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재 습득한 세트(2/3)
- 절망: 절망에 빠진 영혼을 수확할 수 있다.
- 비탄: 비탄에 빠진 죽음을 거스를 수 있다.
설명창은 이전과 내용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세세한 부분에 많은 점이 달라져 있었다.
첫 번째는 영혼 수확자.
기존의 옵션이었던 ‘망자 수집가’와 내용 면에서는 똑같았다. 하지만 연우는 컬렉션을 확인해 보고 크게 눈을 떴다. 수용 한계 용량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폭 늘어나 있었다.
‘2만…….’
여태껏 계속 숙련도를 높이면서 용량을 넓히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 5천이 한계였다. 그런데 그것을 훨씬 넘어 만 단위로 훌쩍 늘어난 것이다.
과연 저 많은 용량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방대한 양이었지만.
‘전부 채울 수 있게 된다면. 많은 것들이 가능해져.’
최근 들어 깨달은 사실이지만, 보유한 망령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흑기로의 변환, 방어 형태, 버프, 때에 따라서는 잔뜩 뭉쳐서 한 번 크게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생기를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았다.
제3천의 영을 획득하면서 깨달은 것들이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일들이 가능해진 것이다.
‘흑살은 흑기의 강화판이고.’
검은 오러에 섞기 딱 안성맞춤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연우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처럼. 화염 속성력에 독기, 랜덤으로 저주 효과를 발동시킨다는 흑살까지 더해진다면? 위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엄청난 흉기를 들고 다니는 셈이로군.’
하지만 이런 영혼 수확자나 흑살보다 더 눈에 띄는 게, 다음 옵션이었다.
‘제2천의 영.’
누가 보더라도 노골적으로 제3천의 영의 강화판이라 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흔히 신화 속에서, 하늘은 총 일곱 개의 층계로 나눠져 있으며, 이 중 세 번째인 3천은 불경한 인간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2천은 신을 거스른 자들을 감금하여 벌을 내리는 곳으로 그려진다.
실제 옵션의 내용도 제3천의 영이 갖고 있던 이매망량과 백귀야행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2천의 영은 그것을 넘어, 기존의 권능이 가지지 못했던 ‘격의 상승’까지 내포했다.
망령, 사귀, 괴이로 이어지는 격의 상승.
그리고 여기에 ‘그 이상의 존재’라는 전제도 적혀 있었으니. 연우에게는 두 눈이 번뜩 뜨이는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이거라면. 괴이를 보다 더 높은 격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
그동안 그가 보유한 괴이들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더 큰 강화가 불가능했다.
연우가 녀석들에게 잔독혈을 먹인 것도, 격의 상승이 이뤄지지 않으니 다양한 공격 방식을 가지게 해서 위력을 증가시키려는 목적이 컸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높게 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지금의 괴이들만 하더라도 충분히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가볍게 찜 쪄 먹을 수준이건만. 이보다 더 격이 상승하게 된다면 어떤 힘을 지니게 될까?
그리고 30여 마리로 한정되어 있던 숫자도 대폭 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즈라엘은 온데간데없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대신에 갑자기 봉인이 풀리고, 여기에 더 강화된 권능이 어렸다……?’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즈라엘이 기특하게 갑자기 선의로 봉인을 풀어 주고 사라졌을 리는 없고.’
연우가 그동안 봤던 불멸자들은 신과 악마, 구분할 것 없이 하나 같이 자신의 이기심을 추구하는 작자들이었다. 신명을 지키고, 신위를 추구하는 게 훤히 보였다.
아즈라엘도 마찬가지. 칠흑왕에 대한 갈망이 짙었던 만큼, 이렇게 순순히 물러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연우가 잠에 빠진 동안, 어떤 허튼수작을 부리려다가 제 힘을 고스란히 빼앗겼다고 보는 게 더 맞았다.
‘혹시 이 물건이 아즈라엘을 집어삼키기라도 했나?’
연우는 문득 그런 추측을 하다가.
‘설마.’
피식,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신을 집어삼키는 아티팩트라니. 그런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만약 있었다면 탑이 뒤집혔겠지.’
사사건건 관리국을 대신해서 탑을 제 입맛대로 갖고 놀려고 하는 신과 악마들이 그런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만무했다. 그들은 스스로가 불멸(不滅)이라는 사실에 깊은 자긍심을 지닌 이들이었으니까.
또한, 관리국도 자칫 탑의 생태계가 흐트러질 수 있는 그런 것을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아니, 애당초 시스템이 그런 것을 용납할 리가 없겠지.
그런데.
[할파스가 침묵합니다.]
[헬이 침묵합니다.]
[네르갈이 침묵합니다.]
……
연우의 그런 생각과 다르게, 죽음의 신과 악마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계속된 침묵.
녀석들은 아즈라엘의 실종과 관련해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언급을 꺼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몇몇 신과 악마들은 임시로 시선을 거둬들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우는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자신의 팔찌와 족쇄를 바라봤다.
하지만.
우웅, 웅-
칠흑왕의 절망과 비탄은 잔잔하게 몸을 떨고만 있을 뿐.
연우의 질문에 대한 어떤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우우웅-
* * *
98층.
“감히, 감히이!”
올림포스의 성역(聖域) 중 바다와 인접해 있는 해신의 신전에서. 불과 같은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포세이돈을 따르는 휘하 제신들은 어느 누구도 성소에 입장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왕이 진정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안 된다. 안 된단 말이다……!”
포세이돈은 상당히 해쓱해진 얼굴이었다. 사자 갈기처럼 무성하게 자랐던 머리는 듬성듬성 빠진 상태였고, 우락부락하던 덩치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특히 꺼멓게 가라앉은 눈은 그가 얼마나 많은 신력을 상실했는지를 보여주었다.
헤르메스와 아테나, 혼돈, 아가레스, 아즈라엘의 비호와 더불어서 여러 죽음의 신과 악마들의 견제까지.
그로 인해 강신은 실패했고, 사도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신력이 강제로 뜯겼으니, 아무리 대신격인 포세이돈이라 하더라도 큰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두둔해도 그런 것을 두둔해……? 어찌, 어찌 불멸자가 되어……!”
포세이돈으로서는 도저히 그런 그들의 판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르메스와 아테나는 그렇다고 치자. 녀석들은 어리석은 제우스의 자식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식견이 좁으니 그릇된 판단을 내릴 확률이 크다. 혼돈은 원래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악마였고, 아가레스는 미친놈이었으니 그렇겠거니 여길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무엇인가.
그들도 자신들이 가진 힘이 전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있을 터. 따지고 보면, 차연우라는 플레이어는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소였다. 그런데도 두둔하고, 비호하는 꼴이라니.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그도 아니면.
‘그 뒤를 노리고 있는 건가?’
놈들의 노림수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포세이돈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이자, 실수였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야망과 야욕을 달성케 해 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유산이었다.
제우스는 깊은 잠에 들고, 하데스는 실종된 이때. 차연우라는 플레이어를 제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밖에 나설 사람이 없었다.
“다른 형제들을 찾아야겠어.”
포세이돈은 눈을 크게 뜨면서 이를 악물었다.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6형제 중 아직 올림포 스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찾아 이 일을 의논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의 두 눈은 칙칙한 광기로 번들거렸다.
신력이, 조금씩 오염되고 있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