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00화 (300/862)

25화. 포세이돈 (12)

연우는 팔찌와 족쇄에서 시선을 거뒀다. 아무리 시선을 던져 봤자 어떤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결국 해답은 자신이 찾아야 했다. 아니면 계속 수수께끼로 남겨 두든가.

사실 연우로서는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권능을 빌려 쓴다는 건, 편의도 있지만, 반대로 불편한 점도 많았다.

채널링이 그만큼 강화되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나 생각을 읽히기가 쉬웠다. 가뜩이나 행동도 계속 노출되어 신경 쓰이는 판국에, 속내까지 읽힌다면 너무나 불쾌한 일이었다.

특히 아즈라엘은 정도가 더 심했다.

집착적인 면모만 빼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아가레스나, 호의를 보이는 헤르메스와 아테나, 말이 없는 혼돈은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다.

하지만 여태껏 아즈라엘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지켜봤다. 녀석은 간간이 탐욕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을 위하는 척 입발림 소리를 꺼낼 때도 많았다. 도저히 속내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다른 죽음의 신과 악마들을 등에 업을 때면. 녀석들이 뭘 노리는지를 알 수가 없어 신경이 곤두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아즈라엘은 죽음과 관련된 신과 악마들의 대표 격인 셈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더 큰 권능을 선물해 주고서. 덤으로 봉인까지 풀어 주지 않았는가.

연우로서는 나쁠 게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군.’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옵션을 체크했다.

여태껏 제한이 걸려 있다가 오픈된 새로운 옵션.

사실 다른 옵션들도 전부 유용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사자 소환]

컬렉션에 수확한 망령 중 일부를 소진하여, 저승에 머무르고 있을 죽은 영혼을 강제로 소환시킨다.

이때 소환 가능한 영혼은 면식이 있거나, 생전의 대상과 관련된 물건이 있어야만 한다. 영혼이 가진 격에 따라 소환에는 제한 횟수 및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다.

단, 이때 소환된 영혼은 저승에 속해 있어 자유의지를 가진다.

‘죽은 영혼을 강제로 소환한다고?’

여태껏 연우가 다룰 수 있었던 영혼은 전부 그와 권속들이 처치했거나, 아니면 근방에 있어서 도중에 거둬들인 것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들까지 접촉할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컬렉션에 수용된 망령이 아니라 뜻대로 다룰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소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가능해질 수 있었다.

‘거래를 해서 스킬이나 권능을 익히는 법을 배운다든가. 아니면 가령 위기 시에 도움이나 조언을 구한다든가.’

물론, 영혼이 가진 격에 따라 횟수와 시간에 제한이 걸려 있으니, 잘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연우는 컬렉션에 있던 망령을 일부 소모하면서, 흑살을 손끝에 다 모아 사자 소환을 전개했다.

파아아-

흑살이 엷게 퍼지다가 자그마한 소용돌이를 그렸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연우는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을 불렀다.

“벤티케.”

화아악!

검은 소용돌이가 한데 뭉치다가 다시 흩어졌다.

[소환이 실패하였습니다.]

[소환하신 대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역시.’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번 불러 봤는데. 소환할 수가 없었다.

‘벤티케의 영혼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결국 포세이돈에게 먹힌 건가?’

포세이돈의 강제 강신에 따라 벤티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육체와 함께 붕괴했었다.

그래서 혹시 영혼이 흡수되거나 소멸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이 들어맞은 셈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자 소환이 가진 새로운 제약 조건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세상에 없는 영혼은 부를 수가 없다.’

사소한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연우는 다시 한번 더 흑살을 모아 옵션을 발동시켰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라나.”

화아악!

이번에는 실패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검은 소용돌이가 한데 뭉치면서 천천히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길쭉한 팔다리가 생겨나고, 짧은 머리가 드러났다.

곧 어둠이 씻기면서 드러난 얼굴은 일기장 속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신기하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샤논이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한령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샤먼들 중에 죽은 자의 영혼을 일시적으로 몸에 부르는 경우는 봤지만, 이렇게 생전 모습 그대로 소환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저승에 있던 사람을 그대로 옮겨 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이펙트가 잔잔하게 퍼지다가 사라지고.

라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넌, 누구지?」

라나는 잔뜩 경계 어린 표정으로 연우를 노려봤다. 생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를 따라 휘날리는 기세가 살벌했다.

아마 생전에 광기에 잔뜩 취했다가, 믿었던 연인에게 죽었던 한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연우는 대답 대신에 쓰고 있던 가면을 천천히 벗어 보였다.

찰칵-

「너, 너……!」

라나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녀는 쉽게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면서 천천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연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표독스럽게만 보이던 눈매의 끝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래. 그러니 저곳에서 널 그렇게 찾아 헤매도 찾을 수가 없었던 거구나. 아아, 나의 소중한 아이. 나의 아들…….」

라나는 이제 양손으로 연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비록 이승에 있을 때와 다르게 감각이 온전치 않아 큰 감촉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이렇게라도 꿈속에서나 그리던 제자와 재회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만 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라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연우를 매만지면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지난날의 회한과 후회, 추억이 잔뜩 묻어났다. 연우는 가만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길 한참. 라나는 연우의 얼굴에서 천천히 손을 거뒀다. 그리고 뒤로 떨어져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응어리져 있던 원한이 어느 정도 해소되어 있었다.

「넌…… 그 아이가 아니구나.」

라나는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린 뒤에야, 연우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녀가 찾던 사람이 아니었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우의 형, 차연우라고 합니다.”

「아아!」

라나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을 타고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하지만 영혼이 흘린 눈물은 땅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뗐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다시 단단해져 사라졌다.

「결국.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복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란 거구나.」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눌 이야기가 많겠어.」

라나는 연우의 맞은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면서 말했다.

「혹시, 술 있나?」

* * *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따금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질 때가 있기 마련이었다. 연우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런 호기심 중 하나가 풀렸다.

‘영혼도 술을 마시려면 마시는군.’

라나는 말술이었다는 동생의 말처럼, 연우가 인트레니안에서 꺼낸 술을 단지째로 들고 마셨다. 호탕하기로는 웬만한 호걸 못지 않았다. 동생이 반해서 쫄쫄 따라다닐 법했다.

‘바닥에 절반은 흘리긴 하지만.’

어차피 술을 잘 즐기지 않는 성격이었고, 아공간에 있던 술 단지도 브라함과 갈리어드가 이따금 마시기 위해서 넣어 둔 것이라, 연우는 아깝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얼핏 갈리어드가 지나가듯이 아주 비싼 술이라고 했던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냥 잊어 버리기로 했다.

「이런 상태로는 역시 취하지도 않는군. 아쉬워.」

라나는 단지를 내려놓으면서 아쉽다는 듯이 가볍게 혀를 찼다. 조금 남아 있는 감각으로 술맛만 느낄 수 있을 뿐, 취기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취하지 않으면 뭣 하러 술을 마시는 건지. 그래도 라나는 이렇게라도 기분을 내고 싶었다.

연우와 그녀는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동생에 대한 추억담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버렸지만, 여전히 너를 그리워하고 아끼는 사람들은 많았구나.’

연우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브라함과 갈리어드, 그리고 라나까지. 동생의 죽음이, 흔적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마음 같아서는 계속 남아 있고 싶은데 말이야.」

라나는 어느새 투명해지기 시작한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봤다. 소환 시간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의 격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긴 했지만, 그다음으로 영혼의 의사도 중요했다. 만약 빨리 되돌아가고 싶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소환 시간은 아주 짧아질 것이나, 되도록 오래 머물고 싶다고 한다면 최대한 길게 남을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 저승의 법칙에 구속된 영혼인 이상, 라나는 어느덧 다시 저쪽으로 넘어갈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중에 또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래 준다면야 고맙지. 나도 간만에 이승의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좋았어. 제자의 형제도 만날 수 있었고. 다만, 텀은 적당히 둬. 너무 빨리 횟수를 다 소비해 버리면 그 뒤에는 나도 심심해지니까.」

“예. 알겠습니다.”

「자, 그럼. 떠나기 전에 선물을 주도록 하지. 우리의 신께서 빨리 너에게 주라고 채근을 하셔서.」

라나가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갖고 있는 목걸이, 잠시 이리 주겠나?」

연우는 목에 걸고 있던 해수 부적을 건넸다.

라나는 해수 부적을 받아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추억을 그리는 애틋한 손길이었다. 동생이 스승의 날 선물로 그녀에게 만들어 줬던 선물.

그리고. 해수 부적이 다시 환한 빛을 뿌렸다. 마모되었던 부분들이 복구되면서 아름다운 신물로 변했다.

[서든 퀘스트(케토의 한)을 달성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1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케토의 신물(해수 부적)’, ‘케토의 가호(수왕전)’, ‘케토의 권능(해왕석)’을 획득했습니다.]

「받아.」

연우는 라나가 다시 건네는 해수 부적을 받아 목에 걸었다. 그러자 신력이 체내로 들어오면서 몸에 부쩍 힘이 많이 실렸다. 신의 인자들이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작동했다.

「우선 설명만 간단하게 해 주자면. 특별히 지금의 너에게 가장 필요할 것들로만 골라 담았다. 신의 인자를 획득했다 하니, 앞으로 신력도 함께 사용해야 할 텐데. 사도가 아닌 몸으로 신력을 다루기란 그리 쉽지 않을 거다. 앞으로는 이 신물이 널 도와줄 테니 잘 사용해.」

“감사합니다.”

「그 외에는 수 속성에 대한 친화도나 가호가 뒤따르는 것들이지만…… 차차 확인해 보면 될 테고. 확실한 건, 케토 신께서 너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점이다. 아마 사도에 준하는 힘을 빌려주실 게야.」

케토는 라나가 죽으면서 포세이돈에게 힘을 상당수 빼앗긴 상태였다. 그것을 되갚아 주었으니, 케토도 어느 정도 힘을 되찾았을 터. 연우를 각별히 아낄 수밖에 없었다.

연우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아즈라엘이 사라진 자리. 꿍꿍이속을 알 수 없는 음험한 녀석보다야, 그에게 호의적인 신의 가호가 더 좋았다.

화아아-

시간이 거의 끝나 가는지, 라나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끝나 가나 보군. 역시나 아쉬워. 먹고 싶은 것도, 마시고 싶은 것도 참 많은데. 다음에 부를 때는 진수성찬을 앞에다 두고 불렀으면 좋겠군.」

“그러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일하는 데 꼼꼼하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탑 내에는 여간 사악한 것들이 있는 게 아니니까.」

라나는 연우가 그동안 동생의 복수를 위해서 한 일들을 알면서도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어 했다. 연우가 여간내기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노파심과 걱정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짧은 대면 시간이었지만, 연우는 그녀가 정말 가깝게 느껴졌다.

‘여장부라고 했지만. 정우 녀석이 왜 스승이라고 따랐는지 알 것 같아.’

그러다가.

「그리고 또…….」

라나는 사라지기 직전, 말꼬리를 흐리면서 그녀답지 않게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묻자꾸나.」

“예.”

「벤티케의 마지막은…… 어땠지?」

연인에 대한 미련일까, 아니면 원한일까. 목소리만 들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덧 정신을 차린 그녀도, 왜 벤티케가 당시에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의 그녀는 반쯤 미쳐 있었으니까.

“그는.”

연우는 포세이돈이 강신하기 직전에 보이던 벤티케의 눈빛을 여전히 잊을 수가 없었다.

상당히 지쳐 보였지만, 그래도 꺼지지 않던 불씨. 모시는 신의 강압에도 그는 절대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웃고 있었습니다.”

크할할. 그런 기괴한 웃음소리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쩌렁쩌렁하고, 자신감으로 충만한 웃음소리.

「그랬군. 마지막까지 녀석다웠어. 나와는 다르게 말이지.」

라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녀는 마지막 남아 있던 한까지 전부 털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 * *

“…….”

다시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연우는 한참 동안 라나가 준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낡은 뚜껑에 적힌 ‘J. W. CAH’ 글자가 눈가에 아른거렸다.

딸깍-

뚜껑을 열자, 시침만 남은 시곗바늘이 여전히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금술과 야금술, 마도 지식을 숱하게 공부해도, 여전히 회중시계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네가 닿은 곳까지 다다르려면. 얼마나 더 걸려야 할까.’

연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흑살을 천천히 회중시계에 불어넣었다.

사자 소환의 조건. 죽은 망자와 면식이 있거나, 유품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동생의 유품이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추억이 잔뜩 담겨 있었다.

연우는 눈을 감으면서 옵션을 발동시켰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연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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