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
1화. 타르타로스 (1)
『……그러하니 행사를 하는 데 있어 절대 차질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이제 너에게 남은 신실한 마음을 증명할 유일한 기회이니.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부디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군.』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메시지가 겨우 끝났다. 그런데도 아이테르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난 이딴 수모를 겪고 있어야 하는 거지?’
트루메기투스의 탁본을 입수하는 데 실패한 이후. 그는 부평초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엘로힘 내에서는 여전히 원로원의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아이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피하지 못해 지탄을 받는 중이었고.
마군에서는 어찌어찌 아홉 번째 주교직을 받을 수 있었다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킨드레드에게 모두 통제되어 손발이 꽁꽁 묶인 상태였다.
결국. 그는 엘로힘에도 마군에도,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어중이떠중이가 되고 말았단 뜻이었다.
그가 바라던 그림은 이런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엘로힘에서는 광요의 가주로서, 차기 집정관으로 거론될 만큼 당당히 많은 이들의 존경과 경외를 받길 바랐다.
마군에서는 아홉 번째 사도로서, 천마의 부름을 받아 제천대성의 힘을 손에 넣길 희망했었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는 엘로힘과 마군, 두 곳 모두의 최고 자리에 올라 탑을 지배하고자 하는 꿈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제는 그런 희망 따위는커녕, 지금 자리를 보전하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듣자 하니, 아이온에 이어 새롭게 생명의 가문을 손에 넣은 파네스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말도 들리고 있는 중이었으니.
‘제기랄, 제기랄!’
아이테르는 이를 악물었다.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믿었던 동료를 배신하고, 쌍둥이 동생을 죽이면서까지 온 자리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엘로힘의 감시는 계속 촘촘해져 언제 마군과의 끈이 들킬지 모르는 위기 상황이건만.
마군에서는 킨드레드가 다시 텔레파시를 보내오면서 일을 마저 진행하라고 독촉을 해 댔다.
현재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고 설득도 해 보았다. 지금은 최대한 몸을 바짝 낮춰서 태풍을 피해야 한다고
하지만 킨드레드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거야 네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지,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고. 고작 그따위 마음가짐으로 주교직을 수행할 것이라면 자리를 내놓으라고 말이다.
그리고 방금 전, 킨드레드는 아예 마지막 통보를 날렸다.
-곧 너희 엘로힘에 새로운 신탁이 내려질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손에 넣어라.
‘완전히…… 엘로힘을 배신하라는 말이잖아.’
물론, 엘로힘에 대한 미련 따위는 더 이상 없었다. 주류 속에 녹아 보고자 그렇게 애를 썼어도, 그는 여전히 배신자의 혈족이었으니까. 아르티야를, 믿었던 동료들을 배신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마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천마를 신실하게 따르는 척을 했다지만, 마군에 가담한 것은 어디까지나 엘로힘에 대한 배반감과 치욕 때문이었을 뿐. 완전히 그쪽으로 전향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 건 똑같았다.
‘나는 결국 평생 박쥐밖에 못 하는 거겠지. 하하! 하하하하! 정우, 네 말이 맞았다. 네 말이 맞았어.’
아이테르는 이것이 전부 헤븐윙의 망령이 그에게 남긴 저주라고 여겼다.
그래서 후회도 많이 했다. 만약 그때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아르티야에 남았더라면. 헤븐윙의 결을 지켰더라면. 지금처럼 멍청한 신세는 안 되었을까?
‘아니. 그랬다면 헤븐윙과 같이 몰락을 면치 못했겠지. 난 제대로 길을 온 거야. 난 올바른 선택을 한 거라고. 잘못된 건, 잘못된 건 이 더럽기 짝이 없는 세상일 뿐!’
그는 이를 악다물었다.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어차피 이렇게까지 온 것……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다. 이번 일에 모든 걸 거는 거야. 모든 걸……!”
어차피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쉽게 생각하자. 이전과 똑같은 일을 되풀이할 뿐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아르티야를 저버렸고, 지금은 엘로힘을 저버린다는 것.
‘문제는 어떻게 파네스에게 다가가냐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머릿속이 단숨에 명쾌해졌다. 그러니 자연스레 곧바로 계획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런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여전히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파네스를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
파네스는 아이온의 양딸로서, 프로토게노이 족의 새로운 실권자로 떠오르는 인물이다. 그리고 봄의 여왕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경질되고만 세 집정관 자리의 유력한 새 후임자로 거론되고 있기도 한 인물. 그녀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어떤 계획도 무소용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말았다.
“파네스 님께서 아이테르 님을 뵙기를 바라십니다.”
야밤중에 갑자기 불쑥 찾아온 전령.
녀석은 자신을 파네스가 보낸 심부름꾼이라고 소개했다.
“생명의 가주가, 나를?”
“예. 최대한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일대일로 대면하길 바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테르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파네스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자신과 대면하기를 요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지만. 전령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자신은 가부 결정에 대한 대답만 들으면 된다는 듯이.
“좋아. 축시(새벽 1시)경에 따로 뵙도록 하지.”
전령은 인사와 함께 조용히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이테르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미 방아쇠는 당겨졌다. 그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 * *
프로토게노이 족.
그들은 오래전에 위대한 신이었으나, 신성을 잃으면서 하계로 떨어진 존재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며 피는 엷어져 갔고, 초월성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엘로힘 내에서 중요 세력으로 군림하는 중이었다. 신혈(神血)을 타고났다는 것은 그만큼 고귀한 성품과 자질을 품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파네스는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일족 내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산생(産生) 가문의 적통으로 태어나, 생명 가문의 양딸이 되면서 자연스레 두 가문의 공동 가주가 된 인물.
그리고 타고난 신혈 속 인자가 조상들과 가까워 가장 많은 신성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파네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이들의 우러름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또한, 그녀도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하고, 뛰어난 식견과 안목을 선보이면서 어느새 아이온이 사라진 프로토게노이 족의 ‘이끄는 자’가 되어 있었다.
‘저 오만한 눈빛은 언제 봐도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군. 빌어먹을 년.’
아이테르는 파네스와 만난 자리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저런 도도한 눈매를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계집들이 있었다. 여름여왕, 봄의 여왕, 그리고 죽은 동생 헤메라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상대방을 늘 자신보다 아래로 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아이테르는 그런 여인들과 마주할 때면 언제나 심장이 빳빳하게 굳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하지만 아이테르는 속으로만 그녀를 욕할 뿐이지, 겉으로는 전혀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항상 그랬다. 강자에게는 약자가 되고, 약자에게는 강자가 되는.
게다가 지금은 파네스에게 잘 보여야만 하는 시기였다. 우선 그녀의 의심을 거둬야만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툭-
파네스가 말없이 던진 두툼한 보고서를 본 순간, 아이테르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세고 말았다.
“이, 이것은…….”
“광요 가주. 당신이 마군과 결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새 착실하게 공을 세워 아홉 번째 사도가 되셨더군요.”
“……!”
파네스가 건넨 보고서에는 그간 아이테르가 마군과 접촉한 시간과 경과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어떻게 알아냈는지, 거래 내용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팍-
아이테르는 순간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파네스를 급습하려고 했다.
〈백광(伯光)〉. 빛을 단단히 압축시켜서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를 도륙하는 스킬이었다. 파네스를 죽이지는 못할지라도, 상처를 입혀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도망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빛무리가 터지기도 전에 하늘에서부터 두 그림자가 떨어지면서 그의 양팔을 잘라 버렸다.
“크아악!”
아이테르는 피를 뿌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파네스의 두 권속은 아이테르가 다른 반항을 할 수 없게 남은 두 다리도 마저 잘라 버리고, 몸뚱이에다가 단검을 깊게 쑤셔 넣었다.
퍽-
“말도 안 돼……!”
아이테르는 마령을 전개할 수도 없는 현실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턱을 관통한 칼은 엘로힘에서 특별히 대(對) 마군용으로 제작한 무기였다.
〈룰 브레이커〉. 신혈을 잔뜩 담은 칼을 대뇌의 밑에 위치한 송과선(松科腺)에다가 박게 되면, 신혈 속에 담긴 신성이 작동하여 천마에게로 이어지는 채널링을 끊어 버리게 된다.
당연히 천마의 힘을 빌리는 마령은 작동할 수가 없다. 주교로서 가지는 모든 장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파네스는 싸늘한 눈빛으로 아이테르를 내려다봤다. 아이테르는 겁에 잔뜩 질린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뇌가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건, 그만큼 그가 엘로힘과 마군을 오고 가면서 쌓은 힘이 적잖다는 뜻. 정말이지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얼어붙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보고 있는 자신까지 한심해질 정도였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아이온은 제게 소중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적에게 일족은 물론 조직까지 통째로 넘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일가(一家)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젠장! 네년이 뭘 안다고 그래! 평생 호의호식을 하면서 자란 네깟 계집이!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돌팔매질을 당하면서 살아온 내 상황을 이해나 하겠느냐고!”
아이테르는 저주를 퍼부었다. 애당초 파네스가 자신을 비밀리에 찾으려 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었는데. 설마 하는 방심이 이런 사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가슴에 쌓인 말은 다 내뱉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입니까?”
싸늘한 파네스의 말투.
순간, 아이테르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만약 그냥 죗값을 물으려 했다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곧바로 체포하거나, 사살하면 그만일 텐데.
하지만 파네스의 권속은 그를 제압하기만 할 뿐, 그 외에 다른 제지는 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그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사, 사, 살려 줘!”
“제가 왜 당신을 살려 주어야 합니까? 당신은 제 아버지의 원수일 뿐인데.”
“아, 아이온을 죽인 건 내가 아니야! 나도 여름여왕에게 쫓겨서 겨우 도망친 게 전부였다고! 아이온을 그렇게 만든 건, 여름여왕과 무왕이잖아! 그리고 마군이었다고! 난 중간에 끼인 입장이었어! 그러니까 살려 줘! 아, 아니, 살려 주십시오! 무엇이라도 할 테니, 제발……!”
아이테르는 더 이상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살 수만 있다면 정말 영혼이라도 내다 팔 수 있었다.
파네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깟 놈이 여태 같은 일족이랍시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원하던 소리는 들었다. 그녀는 아이테르를 제압하고 있던 권속에게 턱짓을 했다. 권속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공간에서 뭔가를 꺼내 아이테르의 목에다 채웠다.
철컥-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와 함께, 아이테르의 목에 단단한 쇠 목걸이가 자리 잡았다.
“이, 이건…….”
“긴고아입니다.”
“무, 무, 뭐……?”
긴고아. 아주 오래전, 제천대성을 유일하게 속박시켰다던 천계의 구속구. 신력과 마기를 제압하기 때문에, 신과 악마들도 신진철 다음으로 꺼려 하는 물건이었다. 이런 귀중한 것을 어떻게 파네스가 갖고 있는 걸까?
하지만 파네스는 그의 생각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차갑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부터 당신은 저의 충실한 개가 되는 겁니다.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십시오. 그리고 죽으라고 할 때, 죽으십시오. 그것만이 당신이 여기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떻습니까? 하시겠습니까?”
아이테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고개를 들어 떨리는 눈으로 파네스를 바라봤다.
파네스는 여기서 아니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곧바로 그를 죽일 눈치였다. 결국 아이테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 하겠습니다……!”
파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상에 어느 개가 말을 하죠?”
아이테르는 파네스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 어기적어기적 몸을 꿈틀거리면서 그녀의 발치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입을 열어 개 울음소리를 냈다.
“멍! 멍멍!”
“좋습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보군요.”
“멍멍!”
아이테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 충견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타르타로스로 가는 길에, 길라잡이가 되십시오.”
* * *
[소환하신 대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망막 위에 떠오른 메시지.
연우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검은 팔찌를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우웅, 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