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타르타로스 (7)
“헉, 헉헉…….”
크로이츠는 입에서 풀풀 휘날리는 단내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무거운 중장 갑옷과 성검을 들고 연우의 뒤를 쫓으려니 괴로웠던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비룡을 타고 멋지게 연우의 뒤를 따라야 했지만. 이곳은 이상하게 비룡 소환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뛰었고, 겨우겨우 연우의 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다 때려치우고, 히든 스테이지 밖에서 연우를 기다릴까 하는 마음도 들었었지만.
이제는 점점 독식자라는 인물이 뭘 하려는지가 궁금해서, 개인적인 호기심과 호의를 가지고 연우를 지켜보게 되어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할 모양인지, 연우는 자신이 항상 대동하고 다니던 리치를 불러서 뭔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긴 몇 번씩 와도 영 적응이 되질 않는군.’
크로이츠는 주변 광경을 보고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이리저리 잘게 부서진 육편(肉片)으로 가득한 대지. 분명 얼마 전까지 사람의 형체를 띠고 있었을 땅은 썩어 가면서 갖가지 악취와 부시독을 뿌려 댔고, 곳곳에서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걸까. 걸을 때마다 늪처럼 발이 계속 깊게 잠겨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어느새 발목까지 잠기니. 거기다 꾸역꾸역 위로 쏟아지는 핏물이며 산성독은 지독하기만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헛구역질이 나고, 정신적인 공황이 찾아오는 곳. 크로이츠가 겪었던 여러 관문 중 가장 끔찍한 곳이 이곳이었다.
그래서 크로이츠는 방금 전부터 계속 기도문을 외우고 있는 중이었다. 삿된 기운을 물리치고, 부시독이 체내에 감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젠 단순히 이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연우의 작업도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결계라도 쳐야겠군.’
우웅, 웅-
성검 줄피카르가 싫다면서 징징 울어 대긴 했지만.
“미안하구나.”
크로이츠는 미안하다는 인사와 함께 성검 줄피카르를 역수로 쥐어 땅에다 꽂았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더 긴 축문을 외기 시작했다.
우우웅-
성검 줄피카르가 떨리면서 성력을 반구 모양으로 방출했다. 독기와 산성이 밀려나면서 제법 넓은 크기의 결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 * *
끼아아-
크아! 크아아!
칵칵칵!
갖가지 귀곡성이 귓가를 왱왱 울려 댔다.
‘어지럽군.’
연우는 뇌리를 쑤셔 대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물밀 듯이 들어왔다.
하나하나가 전부 강한 고통 속에서 죽은 플레이어들이 남긴 사념이다 보니, 사념이 뾰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룡체를 각성하고, 시차 괴리로 단련된 연우의 정신력에는 잠깐 현기증만 일으킬 정도일 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미 연우가 이룬 격은 한낱 망령들의 원념이 어떻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시끄러운데.’
연우는 서로 자신을 봐 달라고 시끄럽게 울어 대는 사념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분명히 근 200년 안에 죽은 망자들만 모았는데도 불구하고, 숫자가 너무 많았다. 못해도 수만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이 중에서 키클롭스 3형제와 관련된 정보만 쏙 빼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시차 괴리]
연우는 의식 세계를 최대한 빠르게 돌리면서, 외부 시간을 느리게 만들어 사념들을 일일이 체크하기 시작했다.
신물이 날 정도로 지겨운 반복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유독 강렬한 사념만 골라내면 되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키클롭스와 관련된 존재라면, 격이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운 작업도 아니었다. 애당초 여섯 번째 관문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생전에 높은 경지에 올랐단 뜻이었으니. 게다가 망자들은 간만에 만난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은 눈치였다.
그렇게 한참을 뒤진 끝에.
‘찾았다.’
연우는 유독 강렬한 빛을 띠는 사념을 찾을 수 있었다.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시선이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올림포스와 관련된 영혼이란 뜻이었다.
사념 쪽으로 의념을 쏟았다. 그러자 동기화가 시작되면서 눈앞으로 트레일러처럼 갖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화아악!
-뛰어! 절대…… 절대 이것을 저들에게 보여서는 안 돼!
‘뭐지? 뭔가에 쫓기고 있는 건가?’
사념 속에서. 세 사람이 다급하게 뛰고 있었다.
연우는 그들을 따라 감도는 후끈한 열기와 괴이한 느낌을 보고, 세 사람이 하데스의 부름에 따라 타르타로스로 향하던 키클롭스 3형제의 사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품에 뭔가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뒤를 쉴 새 없이 돌아봤다.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은 것이 그들 일행을 맹렬하게 추적 중이었다.
두 번째 관문에서부터 시작된 불길한 감각은 네 번째 관문부터 현실이 되더니, 이제는 그들을 너무 노골적으로 뒤쫓고 있었다. 여섯 번째 관문에 다다랐을 때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들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안 되겠다. 이대로는 이것을 빼앗기고 말 거야. 그래서는 위험해져. 하데스 님도, 타르타로스도, 위쪽의 스테이지까지도……. 둘째야, 막내야. 여긴 어떻게든 내가 막아 볼 테니,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하데스 님에게로 가라.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첫째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으면서 품에 안고 있던 함을 둘째에게 건넸다. 둘째와 셋째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하지만, 형님……!
-형님!
-잔말 말고, 어서!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들 셈이냐?
-흐흑!
-명심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물건만은 뺏겨서는 안 돼! 하데스 님에게 꼭 전달해. 그리고 이번 일의 진실이 무엇인지, 똑바로 전하고. 그래야,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어……!
결국 둘째와 셋째가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 관문으로 도망쳤다. 첫째는 아주 잠깐 슬픈 눈으로 그들을 일별하다가, 곧 그림자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사납게 웃었다.
-티탄, 기가스…… 그런 빌어먹을 것들에게 또다시 농락당할 수는 없잖은가……!
‘티탄? 기가스?’
연우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티탄과 기가스는 모두 현재 올림포스 신들과 주도권을 두고 다투다가, 몰락하면서 타르타로스에 갇힌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걸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도망친 다른 두 사람이 지켜야 한다는 것, 그게 뭐지?’
그런 연우의 의문을 뒤로하고.
파앗!
첫째가 갑자기 공손하게 양손을 모으더니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발밑을 따라 화려한 이펙트가 터지면서 머리 위로 새하얀 빛의 기둥이 내려왔다.
등 뒤로 단안기형의 거신(巨神)이 잠깐 자리를 잡았다.
강신. 그가 모시는 키클롭스, 브론테스가 내려앉은 것이다. 신화 속에서 제우스에게 아스트라페를 만들어 바쳤다는 대장장이들의 왕. 그가 포효를 내질렀다.
쿠오오-!
그리고 곧 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그림자에게로 달려들었다. 연우는 그의 시선을 빌려 이들을 쫓던 괴물의 정체를 보고자 했다.
그 순간.
콰직, 와장창-
갑자기 연우를 둘러싸고 있던 사념이 그대로 깨졌다. 부를 돌아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진실의 단면을 엿보았습니다.]
[숨겨진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돌발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이벤트?’
쿠쿠쿠쿠!
여섯 번째 관문이 위아래로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부가 망자들을 깨우면서 일어났던 지진과는 궤를 달리했다.
‘뭔가가 올라오고 있다.’
연우는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을 내려다봤다. 살점으로 가득하던 대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여태 연우를 괴롭히던 악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독한 악취가 올라왔다.
살점이 위로 튀면서 부시독과 산성액이 비처럼 후두둑 쏟아졌다. 연우가 물고 있던 피독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갑자기 관문의 난이도가 몇 배 이상으로 확 뛴 느낌이었다.
[상태 이상에 빠졌습니다!]
[‘중독’ 상태가 되었습니다.]
[‘중독’ 상태가 되었습니다.]
……
[‘지독한 중독’ 상태가 되었습니다.]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스턴 상태가 해지되었습니다. 중독에 대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저 깊숙한 지하에서, 수천 년 동안 묵혀지고 또 묵혀지면서 만들어진 독정(毒精)이 무언가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크기만 해도 대략 7미터. 그리고 덩치만큼이나 풍기는 격도 남달랐다.
‘온다!’
연우는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때, 더 크게 요동치던 지반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살점이 위로 치솟고, 그 아래에서 거대한 손이 불쑥 올라왔다.
연우가 감지했던 것보다 더 큰 거인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 괴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저절로 들 정도로, 흉측한 몰골이었다.
족히 수천 마리의 망령들을 마구잡이로 욱여넣어 거인의 형태로 빚은 것 같은 모습. 살갗을 따라 사람 얼굴 같은 것들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면서 어떻게든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죽…… 여줘……!
-살려줘……!
-내가 왜, 내가 왜……!
-나와 같이 가자……! 나와……!
하지만 망령들은 괴물의 형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저주 섞인 말만 내뱉어야 했다. 지독한 원념이 잔뜩 퍼져 나오고, 독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사념 속에서 봤던, 그 괴물이야.’
연우는 본능적으로 키클롭스의 사도들을 뒤쫓던 괴물이 저 혐오스러운 망령 거인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녀석에게서 풍기는 기세였다.
‘나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
타르타로스와 관련된 괴물이라 그런 걸까.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자면 연우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감이었다.
위압감뿐만 아니라, 지독한 독기와 원념이 옆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상태 이상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저놈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지하에서 더 많은 망령 거인들이 꾸역꾸역 지상으로 올라오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중이란 점이었다.
연우는 이번 싸움이 결코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야만 했다.
어쩌면 하데스가 말했다던 타르타로스의 이상 현상이,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그때.
쐐애액-
망령 거인이 연우에게로 우악스러운 손길을 뻗었다. 연우는 재빨리 아공간에서 비그리드를 뽑아 그대로 올려쳤다.
쾅!
“큭!”
연우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지면으로 크게 곤두박질을 쳤다. 망령 거인의 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몸이 부서질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었다. 게다가 충돌한 순간 들이닥친 지독한 악취며 독기가 극심한 상태 이상으로 몰아갔다. 냉혈 특성으로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가 있던 자리로 망령 거인의 주먹이 다시 틀어박혔다. 지면이 파이면서, 살점이 위로 튀었다.
“영역 선포.”
연우는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면서 권능을 해방했다. 살갗을 따라 용의 비늘이 잔뜩 올라오면서 일대 영역이 그의 의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신의 성흔, 흉신악살, 해왕석이 차례대로 개방되면서 힘을 한껏 고양시켰다. 흉성(凶性)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콰앙!
다시 한 번 더 망령 거인의 주먹이 날아왔다. 연우는 비그리드를 올려쳤다.
이번에는 힘이 엇비슷해 튕겨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검은 오러가 폭발하면서 망령 거인의 주먹이 그대로 부서져 사방으로 튀었다.
쿠오오-
망령 거인은 잔뜩 열이 받았던지, 포효를 내지르면서 이번에는 왼손을 말아 쥐어 그대로 연우 머리 위로 내리쳤다.
「감. 히!」
연우와 재차 충돌하기 직전, 공간이 갈라지면서 부가 나타났다. 그의 인페르노 사이트는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망자들의 사념을 제어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그는 감히 망령 따위가 주인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죽어. 라!」
콰콰쾅!
부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뼈다귀만 남은 손바닥이 활짝 펼쳐지자, 갑자기 망령 거인의 머리 옆에서 거친 폭발이 일어나면서 머리통의 절반이 날아갔다.
크어어-
망령 거인이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뒤로 물러나고, 부는 허공을 박차면서 잇달아 마법을 난사했다.
마법진이 허공 곳곳에 맺히면서 화려한 이펙트를 터뜨렸다. 닥터 둠이 발휘하던 무영창 마방진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콰콰쾅! 콰쾅!
망령 거인이 계속된 폭발로 자꾸 떠밀려 났다. 분명 격은 망령 거인이 높을지 모르나, 상성적으로 부는 녀석보다 훨씬 우위였다.
그리고. 연우의 그림자가 길쭉하게 늘어나면서 샤논과 한령도 튀어나와 질주했다. 어느덧 지면을 뚫고 다른 망령 거인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으하하! 싸움이다, 싸움!」
「빠르게 해치우자.」
두 데스 노블은 간만에 날뛸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즐거웠던지, 잔뜩 들떠 있었다. 레베카도 어느새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와 싸움에 참전 중이었다.
또한, 허공에서는.
『꿈이…… 저문다.』
네메시스가 어느새 나타나 깊은 어둠에 잠겼다. 얼룩덜룩한 공허가 내려앉으면서 연우가 선포한 영역의 특성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리고 곳곳에서 일어난 돌풍이 때마침 지상으로 올라오던 망령 거인들을 단단히 붙들어 매면서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었다.
『나도! 나도 할 거야!』
그 사이로. 니케가 화려하게 날개를 펼쳤다.
화르르륵-
니케는 푸른 불꽃으로 변하면서 벽면과 지면을 따라 그대로 질주를 시작했다.
망령 괴인들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두 환수는 그동안 현자의 돌 속에서 깊은 잠에 들어 있던 동안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겠다는 듯, 관문 전체를 그들의 색으로 물들이는 중이었다.
콰콰콰콰-
* * *
『이건……?』
영혼이 어렴풋하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키클롭스 브론테스의 사도, 알딘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괴물들에게 죽었을 텐데? 어떻게 의식이 살아 있는 거지?
그때.
“정신이, 드나?”
시커먼 가면이 알딘의 눈앞에 다가와 섰다.
알딘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고 말았다. 자신을 비추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그에게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