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타르타로스 (9)
루시엘의 영혼석이라니.
‘그건 비에라 듄이 가져간 게 아니었나?’
아주 오래전. 이제는 역사로 남아 있는 때에, 신과 악마도 되지 못했던 루시엘은 결국 두 진영의 합공을 받아 날개가 꺾이고 하계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영혼이 쇠락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영혼석.
동생은 그것을 우연히 얻었지만, 연인이었던 비에라 듄이 도중에 가로채면서 하계에서는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아니, 감췄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또 영혼석이 있었다.
‘혹시 같은 건가?’
시기상으로 200여 년 전에 키클롭스 3형제가 결국 하데스의 명령에 실패하고, 영혼석을 유실했다가 흐르고 흘러서 동생의 손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달라.’
연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기장 속에서 보던 영혼석과 브론테스가 구현한 영혼석은 모양이나 느낌이 여러모로 달랐다.
일기장 속의 영혼석은 각진 육각형이고, 탁한 기운이 감돌고 있던 데에 반해.
브론테스의 영혼석은 오망성 형태에 환한 빛깔이 맴돌고 있었다. 정말 ‘불’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게. 활활 타오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영혼석이라. 그래. 이것을 갖고 있던 자는 그렇게 부르기도 했었지.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불’ 혹은 ‘빛’이라고 부른다.』
빛?
그러고 보니, 루시엘의 또 다른 이름 루시퍼(Lucifer)는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일 텐데?
『편하게는 ‘태초의 불’이라고도 하지. 루시엘, 그자가 원래는 불의 등대지기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여하튼. 그런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하데스 님께서는 이것을 아주 필요로 하셨다.』
브론테스는 하데스와 태초의 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 했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아니오. 태초의 불이란 것에 대해서, 그것부터 먼저 말씀해 주십오.”
브론테스는 하나밖에 없는 눈을 잔뜩 찌푸렸다. 당장 그에게 이렇게 사념체를 구성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에 말해 줘야 할 사안들이나, 주의해야 할 것 등, 전해 줘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가면 너머로 비치는 연우의 눈빛은 너무 강렬했다. 자신의 의문부터 풀어 주지 않는다면 퀘스트고 뭐고 간에 다 던져 버리겠다는 듯이.
연우는 지금 그만큼 영혼석에 대한 사안이 더 급했다. 뭔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브론테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연우의 바람을 들어줘야 했다.
『알겠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으니 자세하게는 일러 주지 못한다. 태초의 불에 관한 것은 각 신의 사회에서도 아주 오래된 고전이 되어 버린 데다, 루시엘과 관련된 사안들은 맹약에 묶여 함부로 토설할 수 없게 되어 있음이니.』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눈빛으로 재촉했다.
『태초에 불이 있었고, 루시엘은 그것을 관장하던 지기였다. 그러다 그는 절대 추종해서는 안 될 무언가에 빠졌고, 결국 힘을 얻고자 태초의 불을 삼키면서 스스로 대신격을 이뤘지. 이것이 바로 루시퍼다.』
천한 등대지기였던 루시엘은 비교(秘敎)를 추구하면서, 수십 쌍의 날개를 단 루시퍼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으니. 태초의 불은 세상 모든 신과 모든 악마들이 각별히 아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신화와 전승이 비롯된 불씨이니, 신과 악마들은 그것을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모두가 모여 루시퍼의 날개를 꺾었다.』
브론테스의 말이 계속 빠르게 이어졌다.
『그리고 루시엘? 하여간 루시퍼는 죽을 때에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신과 악마들에게 불을 돌려 주기 싫어, 하계로 떨어지면서 스스로의 영혼을 여러 개로 갈라 버렸다. 그것이 바로 영혼석. 태초의 불이 봉인된 녀석의 영혼 조각이지.』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신과 악마들은 기겁해 하며 대다수를 회수하려 했지만, 몇 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자취를 완전히 감춰 버렸지.』
“…….”
『이것은 당시 유실되었던 돌 중 하나인 ‘순결(Castitas)’이다.』
연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영혼석이 한 개가 아니라고?’
이것이 주는 의미는 컸다.
“그렇다면 떨어진 돌은 총 몇 개입니까?”
『총 14개다. 7개의 주선(Virtues)과 7개의 죄악(Sins). 루시엘이 빛과 어둠을 모두 품으면서 생긴 대가였지. 이중 천계에서 거둔 것은 총 9개. 5개가 하계를 떠돌아다니는 중이다. 이것은 그 5개 중 하나였고.』
‘그렇다면 비에라 듄이 가지고 간 건, 남은 4개 중 하나…….’
연우는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왜 그동안 루시엘의 영혼석이 하나만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충분히 여러 개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일견 놀라운 마음도 있었다.
‘한 개만으로도 비에라 듄은 대지모신을 잡아먹고 천계로 올라갈 수 있었어. 그렇다면 남은 것들을 모을 수 있다면……?’
연우로서는 바라 마지않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그대가 이런 것을 궁금해하는 것도 이상하군.』
브론테스가 갑작스레 꺼낸 말에 연우는 다시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다. 그대도 나와 같이 영혼석을 구한 입장에서, 영혼석에 대해서 전혀 무지할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
연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게 무슨……?”
『그대의 왼쪽 가슴에, 영혼석이 있지 않은가?』
“……!”
연우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왼쪽 가슴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활짝 열린 뚜껑 사이로 시침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브론테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 말이다. 영혼석을 아주 잘 가공하여 만든 물건이로구나. 나의 손재주로도 그 정도로 정교한 물건을 탄생시키는 힘들 것 같은데. 하계에 그런 손재주를 지닌 명장이 있었던가? 여태 남지 못해 그 재주를 살피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
연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비록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능이 거의 정지가 되어 있는 듯하지만. 그래도 그것이라도 하데스 님께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다행이야.』
브론테스는 연우가 가진 회중시계가 자신이 했던 것처럼, 하데스를 위해 구해 온 물건이라고만 여긴 모양이었다.
“그……!”
그래서 연우는 오해를 산 김에 몇 가지를 더 물으려 했다.
하지만 브론테스는 손을 뻗어 연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자잘한 질문은 거기까지. 이제는 내 말을 해야겠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그래도 하겠다면, 나 역시 그냥 사라질 것이다.』
브론테스는 더 이상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듯 하나뿐인 눈을 활활 태웠다.
연우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이 절박하듯이, 그런 마음은 브론테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일단은 브론테스의 말을 빨리 듣고, 그 뒤에 자신의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았다.
『여하튼.』
브론테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형제들과 함께 하데스 님의 명령에 따라 지상에 있던 불, 이 ‘순결의 돌’을 가지고 타르타로스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하데스 님의 말에 따르면, 타르타로스에서는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어둠이 무엇입니까?”
『나도 잘 모른다. 그저 난 명령에만 따르는 장인일 뿐이니.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타르타로스에 갇힌 죄인들, 티탄과 기가스가 어떤 이유로 힘을 되찾아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단 거였지. 하데스 님은 어떻게든 그걸 막으려 했었고.』
티탄과 기가스는 올림포스 신들과 다투다가 타르타로스에 갇힌 죄인들.
그들이 준동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큰일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하데스가 감지했던 타르타로스의 이상 현상이란, 바로 죄인들의 폭동과 탈옥 모의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하데스 님은 티탄과 기가스의 준동을 막기 위해 순결의 돌을 필요로 하는 한편, 우리 세 형제의 손길도 같이 필요로 하셨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스트라페 등을 만든 키클롭스 3형제의 솜씨라면, 충분히 그에 버금가는 뛰어난 무구들을 만들어 티탄과 기가스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도중에 일이 틀어지고 만 것이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최대한 조심히 움직였는데도 불구하고 뒤에 추적자들이 따라붙은 것이야.』
외부에 타르타로스와 연결된 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이 브론테스의 생각이었다.
“그것이 망령 거인들이었군요.”
『그래. 타르타로스가 얼마 남지 않은 여섯 번째 관문에서 발목이 거의 붙잡히고 말았지. 해서 시간을 벌기 위해 내가 남았던 것이고.』
브론테스는 하나밖에 없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언젠가, 막연하지만 누군가가 와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어. 후원군이 온다면 안내해 줄 사람이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도 다행히…… 격을 상실하면서까지 남아 있었던 보람이 있었군.』
브론테스의 형체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를 구성하고 있던 사념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있단 뜻이었다.
사실 그는 여태 오랜 시간에 걸쳐 이렇게 남아 있으면서, 신격을 상당수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대로 흩어진다면 평범한 영혼으로 전락해, 윤회의 고리로 떨어지거나, 이곳 관문에 갇힐 가능성이 컸다.
신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불멸성을 잃는 것이지만. 브론테스는 전혀 그런 것에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여하튼. 고된 길이겠지만, 뒤를 잘 부탁한다. 보아하니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아직 어둠은 물러나지 않은 것 같으니…… 형제들도 도움의 손길을 아주 절실히 필요로 할 것이다. 그저 아쉬운 게 있다면.』
화아아-
브론테스의 영혼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맏이인 내가, 그 옆에서 도와 주지 못한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
[서든 퀘스트(페르세포네의 오랜 소망)이 갱신되었습니다.]
[퀘스트창을 확인하세요.]
브론테스의 영혼이 빠르게 옅어졌다. 그동안 버티고 있었던 것도, 사실 그가 가진 미련 때문이었다.
‘안 돼!’
연우는 그런 브론테스를 보면서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회중 시계에 대한 답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영혼석이 대체 뭔지, 태초의 불은 어디서 기인한 건지. 그런 것을 알아야 회중시계에 대해서 알고, 그것을 어떻게 고칠지도 감이 잡힐 게 아닌가.
게다가 칠흑왕의 무구에 대해서도 물어야만 했다. 아스트라페와 트라이아나를 집어삼킨 이유. 그것을 안다면 칠흑왕의 정체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연우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죽음.
그리고 영혼.
그것은 자신이 가진 권능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브라흐마라는 신을 권속으로 거두지 않았던가?
하물며 지금 미련 속에 스러져 가는 격을 잃은 신이라면…….
“브론테스!”
연우는 이제 머리만 남은 브론테스를 주시했다.
『왜? 작별 인사라도 해 주려는 건가?』
“형제들을 돕고 싶다 하셨지요? 하데스를 도와, 티탄과 기가스를 물리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신 것, 맞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그들은 나에게 있어 원수이니까.』
티탄이 올림포스를 차지하던 시절. 그들은 한때 키클롭스 3형제를 꼴 보기 싫다 하여 타르타로스에 가둔 적이 있었다. 이것을 구해 줬던 이가 바로 제우스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키클롭스 3형제는 힘을 모아 3대 대신기(大神器)를 제작해 제우스 등에게 바쳤다. 아스트라페, 트라이아나, 퀴네에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티탄과 기가스가 타르타로스를 빠져나오려 한다. 키클롭스 3형제가 하데스를 도운 이유도 바로 옛 원한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게로 귀속되십시오.”
『뭐?』
“제가 당신의 미련을 풀 수 있게 도와주겠습니다.”
연우는 ‘미련’이라는 키워드를 던져서 브론테스를 붙잡고자 했다.
망령 거인과 달리 저만한 영혼을 강제 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명분을 만들어서 그의 의사를 긍정적이게 만들어야 했다.
『무슨……!』
브론테스는 연우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신더러 인간에게 귀속되라니? 불경한 말일뿐더러,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우가 손을 뻗어 자신에게로 향하는 순간.
『그건……?』
브론테스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동안 아무 반응도 없어 평범한 아티팩트라고만 여겼던 칠흑색의 팔찌와 족쇄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본 브론테스의 눈꺼풀도 같이 떨리고 말았다.
이제야 연우가 누구의 후예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스틱스의 맹약에 얽매여 ‘그’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자가……!
“귀속되어라.”
파칭-
그 순간, 존재가 흐려지던 브론테스를 둘러싼 세상이.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다.
* * *
『……이런 말도 안 되는.』
브론테스는 방금 전과 달리 또렷한 빛을 띠기 시작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크로이츠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십만 마리도 넘는 망령들을 강제로 복속시킬 때도 그랬지만, 이제는 신의 영혼을 귀속시켜 버릴 줄이야.
필멸자가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크로이츠의 눈가는 불신으로 가득했다.
특히 성검을 다루면서 신성에 대해서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깊게 알고 있는 그는 경악을 넘어 충격을 받고 있었다.
아무리 격을 상실했어도, 여전히 초월성을 띠는 영혼을 거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당연한 건가.』
브론테스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티탄을 세상 무엇보다 증오하는 그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제 자신의 주인이며, ‘그’의 후예였다. 자신이 빠져나갈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저 필멸자의 입발림 말에 당했다는 것을.
‘그래도 형제들을 만나 놈들을 막을 수 있게 도와준다면…… 무엇인들 못 할까.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숙운(宿運)일는지도.’
브론테스의 눈빛을 본 것일까?
“아까 전에 못 다한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회중시계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말해 보게, 주인이여.』
“이 시계, 고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