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11화 (311/862)

11화. 명계의 왕 (1)

[열 번째 관문, 흑암에 입장했습니다.]

마지막 관문까지 오는 길은 아주 험난했다.

특히 아홉 번째 관문부터 마주치기 시작한 미노타우로스와 네메아의 사자 등은 연우 일행을 전멸 직전으로 몰아넣었을 정도였다.

최전선에서 싸우던 샤논과 한령은 소멸 직전까지 갔다가, 수복을 반복해야만 했으니.

「하아…… 하아…… 이런 빌어먹을 악덕 사장 같으니.」

「이렇게 미친 듯이 싸운 것도 참 오랜만인 듯합니다.」

샤논과 한령은 이미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 보였다. 이론상, 망령만 계속 공급된다면 휴식 없이 영원히 싸울 수 있을 그들이었지만.

자아가 있고, 아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이상 전투를 지속하면서 쌓이는 정신적인 피로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계속 쏟아지는 티탄과 기가스 권속들과의 싸움은 힘들었다.

관문은 관문대로. 권속은 권속대로.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연우는 묵묵히 앞으로 전진했다.

여기에 네메시스만 이따금 위험하니 돌아가자고 의견을 낼 뿐. 연우의 다른 권속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연우의 의견을 따라 움직였다.

연결 고리를 통해 전해지는 연우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동생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겠다는 마음.

칠흑왕의 힘을 얻겠다는 다짐.

그 모든 것들이 절실해도 너무 절실했다.

그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혹독하게 몰아붙이던 연우가, 지금까지 아무런 내색 없이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런 주인의 바람을, 권속들은 들어주고 싶었다. 설사 실패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

결국 네메시스도 권속들의 바람을 알고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사실 힘과 단서에 대한 갈망은 그도 연우만큼이나 절실했으니까.

전 주인에 대한 그리움은 이따금 꿈속에도 나올 만큼 사무칠 정도였다.

“바라옵건대, 성령의 축복을 내리시어, 이곳에 내려앉은 어둠에 빛을 내려 주시옵고…….”

크로이츠는 성검 줄피카르를 꽂고, 축문 기도를 외우면서 결계를 발동 중이었다.

〈성광 결계〉. 악의에 찬 적들의 접근을 불허하고, 저주 등을 비껴가게 해 주는 결계 주문이었다.

다만, 결계를 이동시킬 수 없고, 유지를 위해서는 계속 기도문을 외워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이것이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크로이츠는 그동안 묵묵히 연우 일행의 옆을 지키면서 자기 몫을 다하고 있었다.

궁금할 것이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연우도 그의 진심을 알고, 조금씩 동료로서 존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통과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건가.”

연우는 성광 결계 아래로, 분지를 따라 짙게 깔린 어둠을 바라봤다.

열 번째 관문, 흑암은 어둠이 안개처럼 넘실대는 분지 지역을 통과해서 목적지까지 다다라야만 하는 수행 과제를 띠고 있다.

사실 그 정도는 연우에게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어둠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다고 해도, 20층에서 의념을 깨달은 그로서는 어렵지 않게 통과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넘실대는 어둠 사이로 보이는 괴물들이었다.

티탄과 기가스의 권속들. 히드라부터 네메아의 사자까지, 여태껏 연우 일행을 계속 괴롭히던 괴물들이 곳곳에 득실대고 있었다. 머릿수만 대충 헤아려 봐도 수십 마리에 달할 것 같았다.

포악성은 두말할 것도 없다. 덩치도 십여 미터에 달하고, 세기는 일행들이 전부 달라붙어야 겨우 쓰러뜨릴 수 있을까 말까한 괴물들이 저토록 많은 곳을 통과하라는 건,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뛰어 들라는 것과 똑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케토가 건네 준 타닌 피어와 부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괴물들을 제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랄까.

만약에 이런 것도 없었더라면. 위험해도 진즉에 위험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연우는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이런 시선들을 계속 겪어야 하나?’

연우는 여기에 오고 난 뒤부터 추가로 붙은 시선들에 몸서리가 쳐졌다.

여태껏 그가 노출되었던 신과 악마들의 시선은 ‘위’에서부터 내려온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타르타로스에 가까워질수록 달라붙는 시선들은 ‘아래’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 같이 불길하고, 잔혹한 느낌이 드는 것들이었다.

티탄과 기가스. 그들의 시선이 분명했다. 퀘스트창의 내용이 맞았던 것이다.

‘이제는 헤르메스나 아테나들 외에는 위쪽의 시선도 거의 느껴지질 않고.’

당연한 말이지만, 타르타로스의 기운이 강해질수록. 천계의 시선은 거의 약해져 가고 있었다. 권능을 매개로 채널링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이들을 제외하면, 연우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신과 악마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가레스가 당신을 볼 수 없어 답답해하는 다른 신과 악마들에게 비웃음을 던집니다.]

[아가레스가 머리를 맞대어 타르타로스에 대해 의논을 나누는 다른 신과 악마들을 찾아가 직접적으로 놀립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아가레스를 무시합니다.]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아가레스의 방문에 귀찮아 합니다.]

……

아가레스는 여전히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중인 듯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메시지창을 아래로 내려버렸다.

그렇게 가만히 마력회로를 돌리면서 재생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여태 수정구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던 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떨그럭. 턱관절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뭔가 찾았나?”

「이곳에. 있는. 망령들. 에게. 전부. 심문해 본. 결과.」

연우는 각 관문을 지나면서 곳곳에 흩어진 망령들을 죄다 쓸어 온 상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권속들은 진즉에 전부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른. 키클롭스들은. 통과. 한 것으로. 보입. 니다.」

“그렇단 말이지?”

연우는 엉덩이를 털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는 그동안 다른 키클롭스 사도들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그들이 관문을 모두 통과해서 타르타로스로 넘어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움직입니까?”

크로이츠는 연우의 기척을 읽고, 기도문을 멈추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또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 그의 눈 밑이 꺼멓게 죽고 말았다.

* * *

크르르-

성광 결계를 나온 순간, 모든 괴물들의 시선이 조금씩 이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미 관문을 지나고 있던 다른 플레이어들은 잡아먹혀 녀석들의 배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

만족을 모르는 허기진 배는 다음 먹잇감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연우는 권속들을 모두 거둬들인 상태였다. 저렇게 많은 괴물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목적지까지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면서 피해야만 했다.

“뛰어.”

팟-

일행은 전력을 다해 일직선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연우의 머리 위로, 부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활짝 열리면서 엄호를 시작했다.

콰콰쾅!

* * *

[히든 스테이지, ‘열 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하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칭호, ‘열 개의 시련을 견딘 자’가 생성되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2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두 번째 히든 스테이지에 도전하시겠습니까?]

『정말, 플레이어가 되어 여기까지 올 줄이야.』

키클롭스 브론테스는 자신의 눈앞에 거대하게 서 있는 청동문을 보면서 감회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어서도 다다르고 싶었던 타르타로스의 입구에 드디어 도착하 게 된 것이다.

연우는 손을 뻗어 청동문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곳의 문도 올림포스 보고나, 포세이돈의 신전에서 봤던 철문과 비슷한 양식을 띠고 있었다. 갖가지 성화가 멋들어지게 그려진 웅장한 문.

다만, 이번에 그려진 성화는 이전에 보던 것보다 훨씬 세세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제우스가 던진 벼락을 맞고, 하얀 구름에서 검은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티탄과 기가스들이 보였다.

특히 그 중심에 놓인 것이 유독 눈에 띄었다.

아래로 추락하는 와중에도 눈을 크게 뜨며 제우스와 포세이돈, 하데스 형제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자.

‘크로노스.’

시간과 죽음의 신이자, 티탄의 왕이었던 그는 얼굴 표정이 유독 다른 신들에 비해 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크게 분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또 어떻게 보면 아들들의 배신에 깊은 슬픔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로 대변되는 큰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자신들에게 대적했던 티탄과 기가스를 타르타로스에다 처박았다.

아마도 이 너머에는 짙은 어둠과 함께 크로노스를 비롯한 녀석들이 득실대고 있겠지.

필멸자로서는 절대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신격들이 가득한 감옥.

성역을 제외하고 하계에서 신과 악마들이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기도 하기에,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크로이츠도 마찬가지였다.

열 번째 관문은 정말 다른 관문들의 난이도를 전부 합쳐도 부족할 정도로, 지독했던 곳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통과를 하고 나니 스스로가 대견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이전의 시도에서는 몇 번이고 번번이 실패를 겪어야만 했으니까.

역시 사람은 기력을 한계까지 쥐어짜다 보면 불가능한 게 없어지는 걸까. 왠지 연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번졌다.

연우는 용마안으로 청동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브론테스를 돌아봤다.

“그런데 이 너머로는 어떻게 넘어가야 하는 겁니까?”

아무리 손으로 매만져 봐도 청동문은 꿈쩍도 않았다. 페르세포네의 퀘스트를 받았으니 저절로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하긴 올림포스 신들이 죄수들을 가두기 위해 만든 문일 텐데, 그렇게 쉽게 열릴 리가 없겠지. 만약 그랬다면 진즉에 티탄과 기가스가 문을 박차고 나왔을 터였다.

『샛길이 있다. 하데스 님만 알고 있는. 정확하게는 그분과 그분의 허락을 받은 자들만이 통과할 수 있는 곳이지.』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라.』

브론테스는 눈을 감더니 갑자기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팟!

그를 따라 빛무리가 번졌다. 브론테스가 앞으로 손을 내밀자, 민들레 홀씨 같은 것이 둥둥 떠다녔다. 새하얀 광채 위로 잿빛이 감도는 홀씨였다.

『다행히 아직도 되는군.』

“이것이 무엇입니까?”

『명계(冥界)의 정령이다. 따지자면, 하데스 님의 힘을 빌려 그 분이 있는 곳까지 인도하는 안내책이지. 원래 우리 형제들에게 주셨던 것인데…… 시간이 지났어도 소환이 가능하군. 언젠가 이 몸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계셨던가.』

브론테스는 감격에 젖은 얼굴로 하나밖에 없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며 말했다.

『이렇게 있지 말고 어서 따라 가세.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연우와 크로이츠는 정령을 따라 옆으로 쭉 걷기 시작했다. 청동문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둠과 적막만이 내려앉은 곳. 연우는 청동문에 그려진 성화만 계속 주시했다. 그려진 성화들이 다 달랐다.

그러다 정령은 도중에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팟 하고 사라지더니 청동문을 따라 자그마한 붉은 포탈을 열었다.

연우와 크로이츠는 서로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포탈을 건넜다.

빛이 가신 뒤, 연우는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 어느 거대한 산등성이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 순간.

[두 번째 히든 스테이지, ‘타르타로스’에 입장했습니다.]

[경고! 이곳은 올림포스의 죄수들인 티탄과 기가스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관리국의 특별 관리 지정 장소입니다. 플레이어에게는 접근이 어려운 스테이지이니 빠른 탈출을 권고합니다.]

[불길한 시선이 비춥니다.]

[불길한 저주가 다가옵니다.]

[서든 퀘스트(페르세포네의 오랜 소망)이 갱신되었습니다.]

[퀘스트창을 확인하세요.]

화아악-

연우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싹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도 청동문 밖에서는 어느 정도 제어되던 티탄과 기가스의 시선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선 속에 담긴 감정도 일부 느낄 수 있었다.

호기심, 놀라움, 그리움, 질시. 통일성 없는 갖가지 시선들이었지만, 그 밑에 깔린 공통점이 있었다.

불신(不信).

대체 이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연우에게 불신을 느끼는 걸까?

‘설마?’

연우는 순간 시선들이 정확하게 향하는 곳이 자신이 아닌, 그가 착용하고 있는 칠흑왕의 절망과 비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그분의 흔적이. 왜.』

아스라이, 먼 곳에서부터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메아리처럼.

그리고.

연우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산등성이가 아니라 사실은 엄청나게 큰 거신(巨神)의 머리 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검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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