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붕우 안서 (2)
아트란은 그 말만 하고 다시 포탈 안쪽으로 훌쩍 뛰어들어 사라졌다. 아무래도 곧 어떤 일들이 터질지 짐작하고 줄행랑을 친 것이겠지.
연우는 고개를 돌려 이곳을 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들을 보았다.
“뭐지, 이건?”
“설마 했는데. 꽤 많군.”
“귀찮아지겠는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연우의 모습과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면 말이 없어지고, 대신에 생각이 깊어지는 연우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34층의 스테이지 주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극기(克己)’가 아닐까? 여러 명의 자신들로부터 진짜인 ‘나’를 찾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거울은 ‘나’를 비출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그리고 그 거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나’가 진짜인 나를 잡아먹고, 대신 행세를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은 누구나 한 번쯤 가질 수 있었다.
저들의 눈에는 자신이 진짜이고, ‘나’가 가짜일 테니까.
34층은 바로 그런 점에 착안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거울을 가져다 놓고, 무수히 비치는 상들에게 자유로운 통행권을 허락한다. 그렇게 되면 수없이 복제된 ‘나’가 돌아다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4층의 스테이지에서는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진짜를 찾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물론, 복제품들은 자신들이 저마다 진짜라고 주장하며, 실제로 진짜처럼 사고하고 말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를 가리는 방법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하나가 남을 때까지 서로가 죽고 죽이거나,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거나.
물론, 전자의 경우에는 진짜가 죽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때는 다른 복제품들도 함께 사라지는 결과를 맞고 만다.
그래서 대부분 이성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려 하고, 저마다 자신이 진짜라는 것을 주장하곤 한다. 쉽지는 않지만, 복제품들이 납득하는 순간 스테이지는 종료된다.
동생이 택한 방식도 후자였다.
워낙에 논리 정연한 녀석이니, 복제품들과 계속 이성적 대화를 나누면서 합의를 보고 차례대로 굴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동생은 아주 단시간에 스테이지를 통과했다.
‘반면에 비에라 듄은 정신 조작으로 가짜를 제압하고, 발데비히와 베이럭은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생사투(生死鬪)를 벌였다고 했었지.’
생사투.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는 접전을 벌였다는 뜻이었다.
발데비히는 거인족의 후예답게 전사라면 힘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싸웠고, 베이럭은 또 다른 자신들이 독을 함께 푼다면 기존 한계를 빠르게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싸움을 벌였다.
아르티야의 다른 멤버들도 비슷비슷했으니, 이 스테이지 자체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두 가지밖엔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연우 ‘들’은 생사투도, 설득도 시도하지 않았다.
[시차 괴리]
전부 저마다 한없이 느려진 세계 속에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하나.
‘나는 가짜인가?’
각 연우는 외부로 방출했던의 념을 일부만 놔두고, 대부분 안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관조를 통해, 스스로를 살피면서 자신이 복제품인지, 아니면 진짜인지를 판별하려 시도한 것이다.
다행히 연우에게는 쉽게 판별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채널링.
연우는 여럿일지 모르나, 그와 연결된 신은 전 우주를 통틀어 단일 개체인 존재.
헤르메스, 아테나, 아가레스, 케토, 혼돈, 그리고 나아가 페르세포네와 하데스까지. 연우를 중심으로 천계와 타르타로스, 각지로 연결되는 채널링은 이미 복잡하게 꼬여 있어 웹(web)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당연히 연결이 불안정한 것들은 가짜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채널링이 약하다고 판단한 연우들은.
푸확-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마력회로를 역류시켜 현자의 돌을 부쉈다. 입가를 따라 핏물이 잔뜩 쏟아지면서 그들은 흐릿한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자결을 선택한 것이다.
죽은 연우들은 일절 미련을 두지 않았다. 사라질 때까지 억울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판단은 최대한 냉정하고, 신속하게. 아프리카에서부터 줄곧 갖고 있던 신념은 지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의 목숨을 도구처럼 여기는 것이다.
퀴네에를 제작해 칠흑왕의 형틀을 완성하는 것. 동생 영혼의 행방을 찾는 것.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서라면, 절대 안일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었다.
「……미쳤어.」
「으음.」
그리고 샤논과 한령은 그런 연우를 보면서 침음을 삼켰다. 그들도 오래전에 34층을 통과했었다지만, 스스로 판단해서 자결을 하는 플레이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한 층계까지 오른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나서,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든 법이었으니까. 아니, 저건 냉정한 정도를 넘어서, 비인간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세상 어느 누가 저렇게 쉽게 자결을 선택할 수 있을까. 삶에 미련이 남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조금이라도 발버둥을 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그렇게 순식간에 절반에 달하는 인원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인자를 제대로 보유하고 있는가?’
용, 신, 마의 인자는 초월성을 띠는 만큼 유일성을 갖춘다. 아무리 데이터에 기반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용의 인자가 부족한 자가 쓰러졌다. 그다음에는 마의 인자가, 또 그다음에는 신의 인자가 약하다 싶은 이들이 피를 뿌렸다.
살아남은 인원 중 다시 절반이 무너졌다.
그렇게 연우는 차례차례 자신이 갖춘 정보들을 바탕으로 부족분이 있는 자들을 연거푸 걸러 냈다.
그러자 어느새 육체적으로 똑같은 바탕을 가진 자들만이 남았다. 어디에 내놓아도 진짜 연우라 할 수 있을 자들. 완전한 독식자의 육체를 가진 자들이었다. 이 이상 접근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내재적 접근으로.’
연우는 관조를 더 깊게 파고들었다. 육체에서 정신으로. 그리고 영력을 따라 무의식의 세계로.
‘나는 진짜인가?’
용종의 사고력을 답습하기 시작한 만큼, 연우의 사고는 이미 인간의 범주로 따라잡기 힘들 만큼 아주 깊었다.
자신들의 사고가 제대로 이어지고 있는지. 잘못되거나, 결여된 부분은 없는지.
스스로에 대해 의심을 두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있던 연우는. 재빨리 마장대검을 뽑아 경동맥을 끊었다.
푸우우-
피분수가 요란하게 일어나면서 그의 몸은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건, 앞으로도 자만에 빠질 수 있는 결여품이기 때문인가.」
어쩌면 그런 성격은 진짜라고 해도 필요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의심과 부단한 노력. 그것이야말로 지금 연우를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으니까. 자만심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그다음에는.
‘옆에 있는 나를 의심했는가?’
이에 해당하는 연우들은 자신의 심장에다 마장대검을 꽂았다. 다시 절반이 사라졌다.
퍼억-
「이번에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판별하지 못해서……?」
또 그다음에는 스스로에게 의심만 품고 있는 자들이.
촤아악!
아주 잠깐이라도 딴생각이 들었던 자들이.
푸화악-
집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시차 괴리가 흔들렸던 자들도.
연우는 몇 번씩이고 자신을 의심했고, 질문을 던지면서, 확신을 하고 정답을 찾았다. 마장대검의 날카로운 칼날은 언제나 그들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답변이 늦거나 머뭇거린다면 주저 없이 찔러 넣기 위해서.
그렇게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남은 인원의 절반 정도가 줄줄이 죽어 나갔고.
바닥은 어느새 수도 없이 많은 연우들이 흘린 피로 흥건하게 적셔져, 붉은 웅덩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찬란하게 빛나던 거울의 숲이 어느샌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샤논과 한령은 질린 나머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베카는 고개를 돌리고, 네메시스는 니케의 눈을 가리면서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언제까지 저래야만 할까.』
이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여전히 연우에게는 비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목표를 위해 제 삶을 가차 없이 깎을 줄 아는 사람. 불에 타는 나방. 네메시스의 눈에 연우는 그렇게 비쳐졌다.
그렇게 여러 번의 질문 끝에, 남은 연우는 단 두 명뿐.
두 연우는 동시에 눈을 떴다. 가면을 쓴 두 눈을 따라 기괴한 광망이 흘렀다. 동작 하나하나, 눈을 깜빡이는 것 하나하나 똑같았다. 마치 둘 사이에 거울을 가져다 댄 것처럼.
두 사람은 아주 잠깐 21층에서 동생의 환영과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처럼 거울을 보듯 똑같은 모습을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받는 감정은 전혀 달랐다.
그때가 그리움이었다면, 지금은.
‘짜증 나.’
두 사람은 각자 스스로가 진짜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 이상 질문을 던지는 건 무의미했다. 어차피 내리는 결론이나 생각도 똑같을 테니까.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팟-
두 연우는 자리에서 움푹 꺼지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쾅!
* * *
촤아악-
결국 패배한 연우의 머리통이 분리되어 떨어졌다. 둘 사이에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이긴 연우도, 진 연우도. 이게 마치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휘이이!
죽은 연우는 피를 한가득 뿌려 대다 곧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 위로 포탈이 열리면서 다시 아트란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발목이 푹 잠길 정도로 쌓인 핏물들. 대체 얼마나 많은 연우가 여기서 죽어 나간 것일까. 그리고 그것들이 대개 자결의 결과라는 것을 알기에, 속이 메슥거리기만 했다.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때때로 연우는 너무 인간처럼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정말 인두겁을 쓴 괴물, 뭐 그런 거 아냐? 어떤 문명에는 기계가 사람 대신처럼 활동하는 곳도 있다더만. 으으.’
아트란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연우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모든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
[위대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시겠습니까?]
[등록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아도 당신의 업적은 탑에 깊게 새겨져 원할 시에 언제든 등록 여부를 전환하실 수 있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1위에 랭크되었다. 10층을 제외하면 전 스테이지에 걸쳐 1위를 달성한 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우가 죽고 사라진 자리에는 이상한 검은색 유리 파편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기 쉬웠다. 실제로 내용을 확인해 보아도.
[상(像)의 조각]
분류: 잡화
등급: D
설명: 34층에 나타난 상(像)들이 부서지면서 남은 흔적. 유리 조각 혹은 거울 파편으로 보인다. 마력을 일부 품고 있지만, 별다른 특징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잡템으로 치부하기 쉬웠다.
하지만.
“떠올라라.”
연우는 의념을 넓게 퍼뜨려 핏물에 잠겨 있던 다른 상의 조각들에 일일이 감응을 시도, 공명(共鳴)이 일어나자 손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
다행히 상의 조각에는 모두 연우와 똑같은 성질을 가진 마력이 담겨 있어 찾아내기가 쉬웠다.
휘리릭-
상의 조각들은 돌개바람을 그리면서 하나로 합쳐졌다. 찰칵, 찰칵.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구슬이 만들어져 연우의 손바닥 위로 조심히 떨어졌다.
[마도전핵]
분류: 잡화, 재료
등급: S
설명: 수백 개로 갈라진 상의 조각들이 하나로 합쳐진 상태. 해당 플레이어의 데이터가 담겨 있어 아티팩트로 만들 시, 소유주가 데이터의 주인과 동일 인물일 경우에는 뛰어난 감응력을 가진 아티팩트가 만들어진다.
반면에 소유주와 데이터의 주인이 다를 시, 리딩과 해킹을 통해 무작위로 데이터 속의 스킬 혹은 상태를 한 가지 지정받을 수 있다.
마도전핵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어 이제는 히든 피스라고 하기에도 조금 낯간지러운 수준의 히든 피스였다.
그런데도 시중에 나온 양이 극소수인 것은 플레이어가 첫 번째 시련에 한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그마저도 부서진 상의 조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모아야만 탄생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유주의 데이터가 담겨 있는 이상, 시중에 내어놓으면 자신의 약점을 대놓고 보여 주는 꼴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보통 새로운 아티팩트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곤 했다.
자신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기의 아티팩트. 당연히 뛰어난 감응력과 숙련도를 바탕으로 원래 아티팩트가 가진 능력치 이상을 뽑아낼 수 있으니, 누구나 바랄 수밖에 없었다.
동생도 여기서 얻은 마도전핵을 바탕으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개조해서, S등급에서 EX등급으로 강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드래곤 슬레이어가 아직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계속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신물에 필적할 정도로 뛰어난 무구였기 때문이었다.
연우도 마음 같아서는 이 마도 전핵을 마장대검을 강화시키는 데 쓰고 싶었지만. 그래도 비그리드도 드래곤 슬레이어에 못지않은 데다, 우선 퀴네에를 만드는 데 써야 했기에 아공간에다 던져 뒀다.
[‘마도전핵(2/2)’을 전부 모으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잠시드의 잔술 3개와 아다만틴 노바뿐인가.’
아다만틴 노바는 바이 더 테이블이 곧 구할 수 있다고 하니 걱정 없었고, 결국 남은 건 잠시드의 잔술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잠시드가 70층에 있는 존재라는 점인데.’
정확하게 잠시드는 오랫동안 70층을 다스리다가 눈을 감은 군주였다. 별칭은 만인황(萬人皇). 아주 탐욕스럽고, 잔인한 성정으로 탑에 남긴 여파가 커서 천 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는 이따금 심심풀이로 술을 빚는 것을 좋아했고, 그럴 때마다 비밀리에 시중에 나오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적은 양의 술은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연우도 마셔 본 적은 없었지만, 애주가들 사이에서는 뛰어난 영약으로도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 것이 어떻게 퀴네에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래도 구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하기에 따라서는 70층에서 구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지금부터 연우가 빠르게 달린다고 해도, 주어진 시간 안에 70층에 다다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설사 된다고 해도, 각 층계마다 필요한 공적치나 히든 피스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통과를 해야만 하니, 안 하느니만 못한 행동이 될 수 있었다. 8대 클랜의 경계를 사는 건 덤일 테고.
결국 따로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아니.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야.’
연우는 이런 진귀한 물품들을 즐겨 보관하는 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래전에 죽은 잠시드만큼이나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자가 현재 탑에 있지 않던가. 그리고 다행히 그는 연우에게 좋은 인상을 품고 있었다.
‘식탐황제.’
23층의 악마의 숲 때나, 발푸르기스의 밤 공방전 때 초대를 받은 뒤로, 줄곧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루기만 했던 혈국 방문을 해야 할 시기인 모양이었다.
* * *
“이제는 크게 놀랍지도 않군.”
드높은 상공에서. 크로이츠는 연우가 복제품과 벌인 싸움의 흔적들을 바라봤다. 투구 아래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위층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연우의 예상과 다르게, 크로이츠는 비룡을 소환해 하늘에 있었던 것이다. 복제품들이 나타나지 않게 하고, 연우를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느낀 소감은 ‘역시’였다.
터져 나간 거울들. 그리고 바닥을 적시는 핏물들. 특히 두 명이 남을 때까지 줄줄이 자결을 시도하던 모습은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납득이 갔다. 여태 그가 지켜본 연우는 이따금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적으로 만나면 절대 안 돼.’
하지만 타르타로스의 일이 급한 이때. 연우를 어떻게 연대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야 할지는 그로서도 아직 미지수였다.
* * *
잘 지내고 있냐, 친구?
아트란에게서 받은 편지. 칸이 보냈다는 편지는 그렇게 서두를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