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18화 (318/862)

18화. 붕우 안서 (3)

연우는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칸답다고 해야 할까. 그동안 그렇게 행방을 찾으려고 애써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고작 하는 말이 저게 전부라니.

편지는 아주 길었고, 첫 부분은 대부분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는 그 뒤에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그 날 그렇게 되고 난 뒤에 나도 정신없이 보내야 했어. 마군 놈들과 거래를 한 게 있었거든.

연우는 조금씩 인상을 굳혔다. 눈빛이 또렷하게 빛났다. 마군과의 거래. 그것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았다.

‘빅토리아도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추적자와 칸이 사라진 뒤였다고 했었지.’

칸은 무슨 거래를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적어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과 자신은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여하튼. 간만에 밖에 나와서 빌어먹을 아버지를 만나러 갔었는데. 네가 그렇게 곳곳에 날 수소문하고 다녔었다면서? 그래서 소식 듣고 여길 통해서 편지 보낸다.

그런데 들어 보니 너도 여기와 거래를 하고 있다더라? 역시. 나야 빽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넌 참 난놈이야. 그렇지?

연우는 편지에서 시선을 들어 아트란을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트란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고객님에 대한 정보는 저희도 극비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 다만, 대상에 따라 정보 등급 제한이 풀리긴 합니다. 칸 님은 로얄 등급이시고, 카인 님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정도는 밝혀도 무방했던지라, 말씀드렸었던 것뿐. 칸 님의 행방에 대해서는 비밀입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고요.”

칸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몸을 숨기고 있는 마당에 바이 더 테이블과 접촉할 때 쉽게 거취를 드러내진 않았겠지.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여기까지. 네가 나에게 숨기고 있었던 게 많았던 것처럼. 나도 그런 것이라고 알아줘.

하지만 난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빅토리아에게도 안부 좀 전해 줘. 나도 이쪽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찾아갈 테니까. 알겠지? 그럼 그동안 잘 지내.

결국 칸의 편지는 그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현재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마군과는 대체 어떤 거래를 하고 있는지. 그와는 별도로 도일에 대한 소식은 왜 알 수 없는지. 둘 사이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연우는 편지를 접으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잘 지내고 있어서 보낸 건지, 아니면 자신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니 어떤 부담감을 안게 되어 진정시키기 위해서 보낸 장치인 건지. 어떤 건지 도저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디서 어떻게 잘 지내고 있다 하니 다행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얻은 점이 있다면.

‘칸, 철사자의 아들이었구나.’

발푸르기스의 밤 공방전 때에도 지나가듯이 본 적이 있었던 거대 용병 집단, 철사자단. 그곳의 주인이 칸의 아버지였을 줄이야. 여기에 대해서는 연우도 여태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던 내용이었지만, 연우도 칸의 신상 내력까지 자세하게 캔 건 아니었기에 뒤늦게 안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철사자를 통해서 찾으면 되겠지.’

연우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어딘가에 있을 칸의 무사를 기원했다.

그리고 도일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 * *

“아아아악! 살려 줘! 제발! 제…… 발!”

“으흐흐. 켄타우로스. 언제 한번 먹어 보고 싶었던 별난 간식이지. 간이 그렇게 맛있다는데 어떤 맛일까요?”

인간의 상체에, 말의 하체를 갖고 있는 반인반수. 켄타우로스는 32층의 네이티브로 분류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개체 수가 너무 적고, 폐쇄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 쉽게 접촉이 힘들다는 자들. 그래도 타고난 용력이 있어, 세상에 나설 때에는 크게 이름을 떨 치곤 했다.

나타한도 그런 존재였다. 사춘기 시절, 너무 좁은 종족 사회가 싫어서 밖으로 나왔고, 레드 드래곤에 들어가 승승장구를 하면서 81개의 눈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다.

‘붉은 눈의 사수’라는 별칭은 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했으니. 이따금 고향에 돌아갈 때면 자신을 우러러보는 옛 친구들이나 어른들의 시선 덕분에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만은 유독 그를 두고 말했었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냐고. 돈도 많이 벌었으니, 자유로워지라고. 이 이상은 위험 해질 것이라고. 켄타우로스는 퀴퀴한 전장이 아니라, 드넓은 들판을 뛰어다닐 때가 행복한 법이라고.

그러나 나타한은 그럴 때면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 어머니가 무엇을 아시냐며 윽박지르기만 했다. 고리타분한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자신은 잘하고 있는데. 이만큼 성공했는데,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걱정이 많으신 걸까? 그것이 너무 지긋지긋하고, 싫었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순간, 나타한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것은. 걱정 가득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빛이었다. 고향은 늘 열려 있으니 언제든 돌아오라던 말씀이 귓가를 왱왱 울렸다.

웃으면서 다가오는 식탐황제의 낯이, 그에게는 악마의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 죄송합니……!’

퍽!

식탐황제의 손길은 나타한의 왼쪽 하복부를 뚫고 들어갔다. 저항 따윈 없었다. 식탐황제가 줄줄 흘려 대던 포식자의 기세가 이미 녀석의 심신을 모두 꺾어 놓은 탓이었다.

식탐황제는 상처를 활짝 열어젖히면서 머리를 밀어 넣었다. 싱싱하게 뛰는 간이 보였다. 질긴 혈관이 걸렸지만, 송곳니로 끊어 내면서 즐겁게 삼켰다. 식탐황제에게는 그마저도 맛난 별미였다.

우걱우걱.

산 채로 잡아 뜯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을 저절로 불러일으켰지만.

두 공작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변을 지켰다. 아니,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괴(怪)의 뚜언띠엔 공작과 난(亂)의 모글레이 공작은 나타한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한 시도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 다른 두 공작, 력의 아르드바드 공작과 신(神)의 로베라 공작이 봄의 여왕에게 줄줄이 전사하면서, 혈국은 전력에 큰 손실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혈국은 화이트 드래곤과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고, 식탐황제와 두 공작이 가장 먼저 몰두한 것은 봄의 여왕을 따르는 옛 81개의 눈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봄의 여왕의 왼팔이라 할 수 있는 나타한이 죽고 말았으니.

이제 어느 정도 전력상의 피해는 균형점을 찾았다고 봐도 되었다.

물론, 이 정도로 호락호락하게 끝낼 생각 따윈 없었다. 애당초 그럴 생각이었다면 전쟁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식탐황제는 이참에 아예 블랙 드래곤과 손을 잡고, 화이트 드래곤을 무너뜨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지금 식탐황제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였다.

‘봄의 여왕의 심장을 먹는 것.’

언젠가 용의 고기를 먹고 말겠다는 식탐황제의 욕망은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에 외뿔부족을 삼키려다가, 무왕에게 된통 당한 이래 작은 미련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봄의 여왕을 먹게 된다면? 그런 욕망과 미련을 한꺼번에 덜 수 있게 된다. 이보다 신나는 먹잇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드득, 우득-

“으으음.”

식탐황제는 모든 식사를 마친 뒤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부터 입고 있는 옷까지 온통 시뻘겋게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뚜언띠엔 공작이 건네는 하얀 손수건으로 우아하게 얼굴을 훔쳐 내고, 씩 웃었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는 만족감에 찬 표시였다. 눈가를 따라 불그스름한 기운이 언뜻 맺혔다가 사라졌다.

〈포식〉과 〈소화〉. 식탐황제가 가진 스킬로, 삼키는 것을 전부 마력이나 인자로 치환해 체내에 누적시키는 힘이었다. 바토리의 흡혈검과 함께, 에너지 드레인 계통의 정점에 놓인 스킬이었다.

“보통 켄타우로스는 너무 목장에만 갇혀 있으니 기름기만 가득해서 별로였는데. 확실히 이리저리 뛰어놀던 녀석이라 기름기 없이 탄력 있어서 아주 좋았어.”

“즐겁게 음미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용의 고기만 할까. 용육(龍肉)! 용육으로 만든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 용혈로 만든 술은 또 얼마나 감미로울 텐가! 언젠간 먹고 말 테다!”

식탐황제는 콧김을 강하게 뿜으면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이렇게 맛난 별미를 먹을수록, 용의 고기에 대한 집착은 자꾸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아무래도 그 기회가 멀지 않으신 듯합니다.”

뚜언띠엔 공작이 새로운 손수건을 건네면서 눈을 살짝 밝혔다.

“오.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블랙 드래곤에서 대대적으로 화이트 드래곤을 침공할 예정이라 합니다. 그린 드래곤도 뒤쪽을 공략할 테니, 저희도 도왔으면 한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또 전면전인가.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겠지.”

76층은 세 파벌로 나뉜 전(前) 레드 드래곤의 세력 다툼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덕분에 혈국과 엘로힘을 비롯한 여러 클랜들은 어떻게든 밥상에다 숟가락을 얹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다.

아래 층계에서 신흥 세력이니 뭐니 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계속 자라날 수 있었던 것도, 거대 클랜들의 시선이 온통 위쪽으로 쏠려 있는 탓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면전에 버금가는 거대 전투가 벌어지고, 세력들 간의 합종연횡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만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혈국이 블랙 드래곤과 손을 잡았다지만 언제 그것이 결렬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식탐황제는 당장 배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끼는 수하의 복수와 용의 고기에 대한 집착은 이제 광기마저 띠기 시작했으니. 기회가 보인다면, 어떻게든 달려들어야 했다.

“좋아. 괴, 그대는 앞으로 있을 싸움에 집중하도록. 이번에야말로 만찬을 즐길 테니까. 알겠나?”

“명!”

혈국에서 지낭 역할을 하며, 사실상 수상(首相)직을 맡고 있는 뚜언띠엔 공작은 벌써부터 내각에다 지시할 사항들을 떠올리면서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모글레이 공작이 대신 차지했다.

“폐하, 그리고 방금 전에 고대하시던 소식이 도착했나이다.”

“소식?”

저번에 주문했던 히드라의 뇌수면이 도착하기라도 했나?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보는데.

“우리 혈국의 절친한 벗이었지만, 그동안 일이 너무 정신없이 바쁘다 하여 사과 인사만 전하던 독식자가. 드디어 폐하를 뵙고 싶다고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무엇이라? 이이! 그런 것을 왜 이제 말하는 것이야!”

식탐황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콧김을 마구 뿜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뭘 하느냐, 당장 황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지 않고! 귀한 손님이 오신다 하지 않으시냐.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차비를 갖춰라! 만찬! 진미로 만찬회장을 갖춰라!”

* * *

연우는 아트란을 통해서 혈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 뒤, 간만에 외뿔부족의 마을을 찾았다.

“여기서부터 허락받지 않은 외부인은 출입 금지라 하니, 기다리고 있겠소.”

크로이츠는 연우를 전송한 뒤, 성광 결계를 치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타르타로스에서 나온 이후로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우는 금방 다녀오겠다고 한 뒤, 곧바로 브라함을 찾았다.

“남아 있는 용의 피가 있냐고?”

“예.”

브라함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여름여왕의 용혈을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거의 다 썼지. 남아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

용의 피를 쓸 곳은 아주 많았다. 풍부한 마력을 담고 있는 보물은 흔한 게 아니었으니. 하물며 오랫동안 탑을 지배해 오다시피 한 여름여왕의 피라면 오죽할까.

비그리드를 정화시키는 데 쓰였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마법 장치와 외우주를 건설하는 데 상당한 양을 소모해야만 했다.

사실 브라함도 그렇게 흥청망청 쓸 생각은 아니었다. 귀중한 보물이니 두고두고 아껴 쓸 생각이었지만.

“자네도 말했었지. 아끼지 말고 가감 없이 쓰라고. 투자하는 데 있어 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런데 남아 있냐고 불쑥 찾아와 물으니 황당할 수밖에. 브라함은 어쩐지 모르게 불심 검문을 당하는 기분이 들어 내심 불쾌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연우는 아무래도 좋다는 투였다.

“조금은 남아 있다는 뜻이군요.”

“아주 극소량이지만.”

“그것이라도 좋습니다. 쓸 곳이 있으시다면 희석해서 주셔도 됩니다. 아니, 사실 거의 다 쓰고 남은 찌꺼기라도 괜찮습니다.”

브라함도 그제야 연우가 또 뭔가 일을 꾸민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쾌함 대신에 흥미로움이 얼굴에 감돌았다.

“어디다 쓰려 그러지?”

“식탐황제에게 주려고 합니다.”

“뭐?”

브라함은 살짝 낯을 구겼다. 식탐황제는 세샤를 노리던 손길 중 하나였다. 그런데 녀석에게 뭘 준다고?

하지만 연우는 오해가 생기기 전에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브라함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쓰다 남은 용의 피를 내어 주고 잠시드의 잔술을 받아 오겠다고?”

“그렇습니다.”

“잠시드의 잔술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용의 피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더 비싸게 거래되는 물품이야.”

잠시드의 잔술은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만인황의 마력이 담겨 있었다. 영약으로서의 가치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런데 제대로 정제된 혈청도 아니고, 쓰다 남은 걸 준다면 당연히 받기 힘들…….”

“가치란 상대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브라함은 용육과 용혈에 대한 식탐황제의 집착을 떠올리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게.”

브라함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안쪽에 마련된 실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마개로 단단히 봉인된 시약을 가져와 연우에게 던졌다.

연우는 가볍게 받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붉은 피가 기포를 내고 있었다.

“희석시킨 것에다 이것저것을 잡다하게 섞었다. 오히려 피 맛은 제대로 나도록 해 놨으니 그 멍청한 놈은 더 좋아라 하겠지.”

용혈의 성분은 얼마 되지 않아도, 오히려 피 맛을 강하게 내게 만든 거란 뜻이었다. 식탐황제라면 환장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용육이다. 혹시 몰라 벗겨 내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니 얼마든지 갖고 가고.”

브라함은 탁상에다 내용물이 빵빵하게 담긴 주머니를 올렸다. 연우는 조용히 그것을 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원래 전부 자네의 물건인데 무엇을. 그보다.”

브라함은 잠깐 말허리를 끊었다가 눈을 빛냈다.

“정우의 영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 사실이겠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승이 아닌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는 건 분명한 듯합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퀴네에를 제작해야 한다, 이거지?”

“예.”

브라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데스, 그 친구는 원래 올림포스에도 잘 나타나질 않아서 만나 본 적이 별로 없긴 했지만. 말은 없어도,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자긍심과 책임감이 강하던 친구였어. 아마 타르타로스에서의 일도 그 때문에 아직까지, 그리 오랫동안 버티고 있는 것이겠지.”

그러다 브라함은 살짝 눈살을 좁혔다.

“하지만 조금 이상하기도 해. 상황이 그 지경이 될 것 같았으면 진즉에 올림포스에다 전력 지원을 요청했어도 되었을 것을. 왜 여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 아무리 하데스가 책임감이 강하다고 해도,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때까지 미련하게 있을 자는 아니었다. 뭔가 알기 힘든 내막이라도 있는 걸까.

연우도 일전에 해 봤던 생각이었기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살던 지구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백인백색(百人百色). 백 명의 사람에게는 백 가지의 사연과 특색이 있다고요. 하데스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죠. 신의 행사에 끼어들 필요도 없고 말이죠. 대신에 저는 퀴네에 제작에만 집중할 생각입니다.”

“그래도 한때 인과율을 주시했던 나에게 그런 강의라니. 너무하는군그래.”

연우와 브라함은 그렇게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연우는 슬쩍 다른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활짝 열린 방문 너머, 아난타가 흔들의자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아난타는 여전히 그대롭니까?”

브라함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늘 이지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그도,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수척해 보였다.

“잠시 아난타와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면 나야 고맙지. 아난타도 심심하지 않을 테고.”

연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난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무릎에 담요를 덮고 있었다. 귀여운 곰 무늬가 보였다. 세샤가 자주 쓰던 담요. 아무래도 제 엄마가 추울까 봐 주고 간 모양이었다.

연우는 피식 웃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아난타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찰칵-

가면을 벗으면서. 정우와 똑닮은 얼굴로, 두 눈으로 직접 아난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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