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붕우 안서 (4)
“…….”
미동도 없는 모습.
연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을 열렬히 사랑했던 만큼, 얼굴을 보여 주면 차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미동도 없는 건 똑같은 것 같았다.
그래도 연우는 아난타에게 이런 저런 말을 계속 걸었다.
이따금 브라함을 찾을 때면 연우는 이런 식으로 아난타에게 말을 걸곤 했다. 그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무의식 어딘가에 있을 정신은 이 목소리를 듣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깨어났을 때.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여태 쌓인 모든 슬픔들을 털어 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아난타가 의식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은 사실 연우가 가장 컸으니까. 동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했으면 했다.
그러다 연우는 가면을 다시 얼굴에다 쓰면서 돌아섰다. 브라함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서 있었다.
“고마워. 언제나, 늘.”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곧바로 가려고?”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세샤가 자기 안 보고 갔다고 화낼 것 같은데? 저번에도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가서 단단히 뿔이 났던 거, 달래느라 죽는 줄 알았어.”
피식. 가면을 쓴 얼굴 아래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났다.
“브라함이 잘 설득을 해 주시…….”
연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복도 끝에서 ‘우다다’하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삼초오오온!”
세샤는 짧은 다리를 빠르게 놀리면서 폴짝 뛰어 연우의 품에 달려들었다. 연우는 세샤가 다칠까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아야만 했다.
“삼촌! 또 나 두고 가려고 했지?”
세샤는 연우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허리춤에 손을 얹으면서 뺨을 크게 부풀렸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 연우가 가면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곧 떠나려 한다는 의미였다.
“그게…….”
연우는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식은땀을 삐질 흘렸지만.
“저번에도 나 버리고 가 놓고선! 이러기야?”
“세, 세샤야.”
“놀다 갈 거지? 응? 아니면…….”
세샤는 부푼 뺨을 풀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땅을 내려다봤다.
“나랑 있는 게 싫어?”
“…….”
연우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귀여운 조카가 이러는데 냉정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연우는 도로 가면을 벗었다.
“아냐. 그럴 리가. 그럼 뭐 하고 놀까?”
“헤헤헤! 나 저번에 삼촌이 가르쳐 줬던 거 하고 싶어! 땅따먹기! 그게 재미있었어!”
세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긋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땅에 폴짝 내려서서 연우가 아예 도망치지 못하게 한 손을 붙잡고 마당으로 끌고 갔다.
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따라가야만 했다. 외뿔부족의 남자아이들이 세샤라면 껌뻑 죽는다더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저 작은 엉덩이에 여우 꼬리라도 달려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는 꼭 제 아빠를 닮은 것 같았다.
브라함은 그런 세샤와 연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조카 바보가 따로 없구만.”
살벌하기만 한 이 탑의 세계에서 얼마 볼 수 없는 훈훈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아난타의 흐릿한 시선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초점이 살짝 흔들렸다가 다시 흩어졌다.
* * *
크로이츠는 가볍게 혀를 찼다.
‘타르타로스, 외뿔부족에 이어서 이제는 혈국? 이곳은 또 언제 인연을 맺어 놓은 걸까?’
연우를 관찰하기만 할 뿐, 절대 간섭하지 않기로 했기에 조용히 따르긴 했지만. 그래도 혈국까지 방문할 줄 몰랐던 그로서는 놀랍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대체 연우와 혈국이 어떤 관계일지.
‘만약 좋은 관계라면, 연대 측에서도 혈국과의 관계에 대해 재검토를 해 봐야 할 테니.’
크로이츠와 환상연대가 내리는 혈국에 대한 평가는 아주 간단했다.
미친놈들.
광신도로 가득 차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마군보다는 분명 나았다.
그리고 혈국의 인사들 중에서도 합리적인 사람들이 꽤 많았다. 환상연대 내에도 그들과 개인적으로 교류를 나누는 자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긍심과 명예욕이 강해,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혈국에 대한 평가가 박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식탐황제, 그 작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혈국은 ‘제국’의 형태를 띠고 있는 만큼, 중앙 집권적인 권력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구성원들은 그 사실을 아주 당연시하면서, 제국과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했다.
그러니 권력 체계의 꼭대기에 앉은 황제의 성향에 따라 조직의 운영 방향도 결정되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특히 식탐황제는 역대 혈국의 수장들 중에서도 가장 확고한 정통성과 권력을 지니고 있는 바. 그의 뜻은 곧 혈국의 행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면에서. 식탐황제는 도무지 신뢰를 할 수가 없는 작자였다.
그는 언제나 충동적이었다.
조직 간에 어떤 협력 사안을 진행 중이어도 그의 변덕으로 결렬 되는 경우가 잦았고, 전투를 잘 치르고 있다가도 배가 고프다는 희한한 핑계로 갑자기 자취를 감출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가진 힘은 아홉 왕에 꼽힐 정도로 뛰어났으니.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굳이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무왕 정도라 말할 수 있을까. 최소한 무왕 앞에서는 친구 운운하면서 꼼짝도 못 했으니까.
쉽게 말해, 식탐황제는 어린아이 같았다. 뭔가를 재미있어하다가도 내키지 않으면 돌변하는 변덕과 심술이 가득한 아이.
‘또 그러면서도 이따금 소름 끼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니. 진짜 제대로 미쳤지.’
그런데 그런 곳에 연우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고 하니. 걱정이 되면서도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연우에 대한 연대장의 호감은 아주 깊다. 틈만 나면 독식자를 자신들의 품으로 안아야 한다는 말도 했었으니. 그리고 이따금 ‘나의 자리는 원래 그의 자리다’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을 정도였다.
즉, 연우가 환상연대에 들어오게 된다면, 높은 직급에 앉혀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
당연히 그의 인간관계에 따라, 환상연대의 정책 방향도 어느 정도 결정이 될 테니.
그동안 혈국을 비롯해 8대 클랜과 거리를 두었던 연대의 방향성이 조금 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연우와 혈국이 어떤 관계인지를 면밀히 살필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있지 않았었나?’
크로이츠는 무리에 잘 섞여서 놀고 친구도 많은 자들을 두고 수하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격만 봐서는 아싸인줄 알았는데. 완전 인싸……. 로군.’
[외우주 ‘붉은 석양의 땅’에 입장했습니다.]
연우를 따라 포탈에 입장하자 가장 먼저 주홍색 노을이 크로이츠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빠빠빰, 빠빰-
뿌우웅!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을 따라 도열한 군악대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받들어, 창!”
처척-
그리고 그 앞에 선 의전 부대가 구호에 따라 창을 높게 들었다. 하나같이 선홍색 갑옷으로 무장한 자들. 투구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 생김새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이따금 새어 나오는 눈빛에선 절도와 기강이 바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화려한 환영 행사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놀라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였다. 대체 이 많은 것들을 언제 다 준비해 놓은 건지.
혈국의 화려한 의전은 원래 황성(皇城)을 찾는 빈객들에 대한 환영도에 따라 등급이 갈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 연우에게 보이는 의전은 홍(紅)·백(白)·청(靑)·흑(黑)의 4단계 중에서 첫 번째, 가장 높은 등급인 ‘홍’이었다.
같은 8대 클랜의 수장이 방문하거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고위 인사가 찾아왔을 때에나 보이는 것인데.
‘그걸 나에게 보인다고?’
그러니 연우가 어이없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꾸며 대긴 했었다지만, 자신을 이 정도로 깊게 생각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점을 떠나서, 아무리 식탐황제가 자신을 호의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조직이 가진 규모가 있다면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물론, 연우로서는 이런 환대가 전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호의적으로 봐 준다면 그만큼 더 뜯어내면 될 일이었다.
“오오! 이게 누군가, 나의 친애하는 벗, 독식자가 아니신가!”
그때, 황성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휘황찬란한 가마가 나왔다. 족히 백여 명은 될 것 같은 노예들이 끙끙대면서 이고 있는 가마.
그 뒤로 뚜언피에 공작과 모글레이 공작, 그리고 36명의 후작들이 시종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화아아-
피비린내가 잔뜩 섞인 살벌한 기세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된 의자 위에는 움직이기도 버거워 보일 정도로 뚱뚱한 식탐황제가 어기적대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호탕한 척 크게 웃고 있지만, 몇 겹이나 되는 턱살에서는 피지가 번들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혐오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연우는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숙이려 했다.
갑자기 식탐황제가 가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쿵, 하고 지반이 크게 흔들리고, 뚱뚱한 살결도 출렁였지만. 녀석은 뒤뚱뒤뚱 달려와 연우의 허리를 바로 세웠다.
“으아니, 이게 무슨 짓인가! 절친한 벗 사이에 이런 인사라니. 벗의 체면은 곧 짐의 체면! 날, 아니, 짐을 욕보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식탐황제는 연우의 어깨를 팡팡 두들기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하여간 이렇게 있지 마시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나!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아. 짐이 그동안 얼마나 목이 빠져라 그대를 기다렸는지 아는가?”
식탐황제는 어느새 바닥에 내려진 가마 위에 연우를 강제로 태우면서 주변을 쓱 훑어봤다. 그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군악대와 의전대를 노려봤다.
“뭣들 하는가! 소중한 손님이 오신 자리이거늘. 어서 기쁘게 환영하지 못할까!”
빠빠빰, 빠빠-
황성으로 걸어가는 식탐황제와 연우의 뒤를 따라, 군악대와 의전대가 크게 음을 연주하면서 힘차게 행진했다.
* * *
“으하핫! 별거 없지만 많이 드세나!”
식탐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웅장한 홀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 거대한 식탁에 앉으라고 권했다.
‘이게 별거 아니라고?’
연우는 조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탁상에 놓인 과실주, 꿀에 절인 포도며 드레이크 스테이크 등등, 척 보기에도 귀한 진미들이 화려한 집기들에 올려져 있었다.
곳곳에 놓인 황금 촛대에서는 붉은 불빛이 화려하게 춤을 춰 댔으니.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연우가 여기까지 오면서 본 것들은 하나같이 화려하지 않은 게 없었다.
황성의 문에서부터 궐까지 줄지어 선 오등작의 문무백관들은 연우를 보며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병사들은 보다 화려한 의전으로 거창한 환영식을 치렀다.
그런데 만찬회장은 그보다 훨씬 심했으니. 연우는 아예 식탐황제의 자리와 나란히 마련된 상석에 앉았다.
크로이츠는 한쪽 구석에서 연우의 시종 신분으로 타인의 시선을 받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탐황제는 눈짓으로 어서 먹으라며 재촉했다. 반달 모양으로 굽어진 눈동자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먹으라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마침 출출하던 차였기에, 연우도 천천히 가장 눈앞에 있는 스프로 숟가락을 가져갔다.
사실 독이 섞여 있어도 큰 걱정은 없었다. 타르타로스의 관문도 통과한 데다가, 잔독혈 스킬이 웬만한 독성은 물리쳐 주리라 믿었으니.
그리고 한 입을 먹는 순간, 연우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건?’
식탐황제가 크게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파하하! 어떤가? 맛이 기가 막히지 않은가? 우리가 자랑하는 뛰어난 미식가이자 주방장인 푸언띠엔 공작이 아주 크게 고생을 하였다네. 이리 와서 인사 나누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손님께서도 아무쪼록 맛있게 즐기셨으면 합니다.”
갈색 피부에 쥐꼬리 수염을 한 뚜언띠엔 공작은 하얀 셰프 옷을 입고 밝게 웃었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미친놈들이군. 영혼상어의 캐비어가 든 스프를 애피타이저로 내놓는다고?’
영혼상어는 68층에서 영계(靈界)와 현실을 수시로 오고 간다는 희귀 몬스터였다. 수십 년에 걸쳐 알을 한두 개씩밖에 낳지 않기 때문에 구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진미로 분류되기 이전에 구하기 힘든 재료로 유명했다.
하지만 영혼상어의 캐비어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그 자체로 뛰어난 영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 플레이어는 먹는 것만으로도 영력이 차올라, 마력에 대한 컨트롤 실력이 높아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잘게 부수어, 스프로 만들었다. 게다가 여기에 들어간 듯한 ‘타라니안 산양의 젖’도 체내의 활력 한계를 증강시켜 주는 영약으로 유명했으니.
이 스프 자체가 어디에 내놓아도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들 영약인 셈이었다.
웬만한 중소 규모 클랜의 일 년 치 예산이 이 스프 하나에 담겨 있지 않을까.
게다가 혈국이 자랑하는 최고 주방장, 뚜언띠엔 공작이 직접 만들었다면 영양소 손실도 거의 없을 게 분명했다.
연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옆에 있는 과실주를 컵에 따라서 조심히 마셨다. 청량한 맛이 혀를 감미롭게 감돌았다. 순간, 마력회로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입만 삼켰는데도 불구하고, 마력량이 소폭 늘어나 있었다.
[마력이 8만큼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6만큼 상승했습니다.]
71층의 일부 구역에서만 자란다는 신의 과일, 암브로시아를 섞은 게 분명했다.
용마안을 활짝 열어 다른 음식들도 살폈다.
[봉황계(鳳凰鷄)의 탕]
[트리플 헤드 트롤의 육면]
[황금사과의 꿀젖]
[인어왕 꼬리 고기 스테이크]
[신편귀독주]
……
“…….”
연우는 이제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크로이츠는 연우를 보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대단한 대접을 받을 정도라니. 맞군. 인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