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붕우 안서 (8)
아나스타샤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를 따라 감돌던 연기가 확 하고 흩어지면서 새로운 여우 불이 크게 일어났다.
콰콰쾅!
불의 파도는 아나스타샤에게 닿기도 전에 연속으로 허공에서 폭발해 나갔다. 아나스타샤가 있던 건물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다.
불꽃이 부서지면서 불똥이 사방으로 튀고, 열 폭풍이 뒤이어 나타나서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콰르르-
“제, 젠장! 도망쳐!”
“아나스타샤 님과 독식자가 싸우기 시작했다!”
거리에 뭉쳐 있던 거주민들은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이 랭커들이 싸우기 시작한 자리는 일반인들 입장에서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전투를 치르는 범위가 어디에까지 미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자신의 생활 터전을 잃게 되거나, 전 재산을 들여 쌓은 가게가 무너져 반쯤 넋이 나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연우나 아나스타샤나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불어라.”
그때, 아나스타샤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거대 구미호의 아홉 꼬리 중, 가장 좌측 꼬리에 녹색 불꽃이 켜졌다. 아나스타샤를 감돌고 있던 요력의 농도도 한결 짙어졌다.
“후!”
아나스타샤는 검지와 중지를 입술에 갖다 대면서 가볍게 입김을 불었다.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던 요력이 ‘퉁, 퉁, 퉁’ 소리를 내면서 사람 머리 크기만 한 공기탄을 잇달아 토해 냈다.
여우불도 한껏 번졌다. 여우불이 번져 나간 자리에는 갖가지 기현상들이 벌어졌다. 공간이 뒤틀리거나, 전격 혹은 냉풍이 퍼부어지는 등 다양한 공격이 쏟아지면서 연우를 공략했다.
연우는 밖으로 방출되려는 불의 파도를 잡아당기면서 검은 오러로 압축시키고, 연거푸 앞으로 휘두르면서 아나스타샤에게로 쇄도했다.
촤촤촤-
비그리드가 휘둘러질 때마다 공기탄이 잇달아 부서졌다. 그러면서 새어 나오는 요력은 여우불이 되어 재차 연우를 공격하는 신기한 모양새를 뗬지만, 그런 것들은 연우를 감싸고 있는 망령의 벽에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했다.
[제2천의 영]
퍼퍼펑-
키아아악!
이제는 거의 한 몸이 되다시피 한 망령의 벽은 수시로 연우의 체내와 체외를 오고 가면서, 활력소와 방어막 역할을 번갈아 수행했다.
호신강기(護身罡氣). 외뿔부족에서 기를 제대로 다루고 난 뒤부터 터득할 수 있다는 기예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화악!
그리고 어느덧 거친 연기를 뚫고 아나스타샤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연우는 지체 없이 비그리드를 사선으로 그었다. 목적은 아나스타샤의 팔 한쪽. 혹은 체내에 있을 구미호의 꼬리 한 개였다. 그 정도라면 겁박용으로 충분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두 번째 꼬리에 불이 켜지는 것과 동시에 이번엔 오른손에 쥐고 있던 곰방대를 횡으로 휘둘렀다.
쾅!
비그리드와 곰방대가 부딪쳤다. 들리는 건 쇳소리가 아니었다. 폭발 소리였다. 지반이 내려앉고, 다시 열폭풍이 불어닥치면서 주변에 있던 건물들을 깡그리 밀어 버렸지만.
두 사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속으로 손속을 나누었다.
콰콰쾅-
그럴 때마다 기다란 곰방대의 표면을 따라 이상한 문자가 시린 빛을 토해 냈다.
연우는 단번에 그것이 빅토리아가 자신의 스승을 위해 특별히 제작해 준 아티팩트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의 눈으로도 곰방대에 적혀 있는 룬 문자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룬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룬은 아니었다. 이계의 글자일까? 용마안은 인식의 크기만큼 세계를 해석해 주기 때문에 모르는 의미까지 알게 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우는 그 문자들이 아나스타샤가 부리는 독특한 힘을 갈무리해 주는 특징을 지녔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곰방대가 시린 불을 밝힐수록. 아나스타샤의 꼬리에도 차례로 녹색 불이 밝혀졌다.
세 번째, 네 번째. 아나스타샤는 ‘흥!’ 하고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곰방대를 세게 아래로 내리쳤다.
그 순간, 여태껏 아나스타샤의 뒤쪽으로 흐릿한 잔상처럼만 자리하고 있던 구미호가 움직였다.
성큼 앞발을 내디뎠다. 타르타로스에서 본 거신만큼이나 큰 몸집이 내려찍는 자리는 아나스타샤의 곰방대가 내려치는 자리와 동일했다.
그리고.
‘뭐지?’
구미호의 앞발과 곰방대가 겹쳐지기 직전. 연우는 여태껏 아나스타샤를 상대하던 것과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게 갈라져 부서질 것 같은 느낌. 종이를 구겨서 찢듯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공간을 접어서 찢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쩌걱-
그리고 마치 거울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갑자기 연우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흔들린다 싶더니 정말 그대로 잘게 부서졌다.
연우는 재빨리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잇달아 블링크를 발동시켰다.
곰방대가 시린 빛을 토해 내는 것처럼. 그 역시 빅토리아에게 배운 방식으로 늑골에다 여러 마법을 새기면서, 이제 불의 날개는 거의 아티팩트 혹은 스킬처럼 독립적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팟, 팟, 팟!
연우가 가까스로 블링크를 멈춘 곳은 아나스타샤가 있던 곳에서 제법 거리가 떨어진 장소였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이 있던 곳을 본 순간, 눈이 크게 떠졌다.
“제법 촉이 좋구나, 애송아.”
아나스타샤는 그런 연우를 보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잘게 부서져 있었다.
여러 유리 조각을 붙인 모자이크처럼, 온통 공간이 이리저리 뒤틀리거나 쪼개져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온전한 상태로 있는 것은 아나스타샤뿐.
부서진 공간 틈새 사이사이로 새어 나오는 요력만이, 그녀가 일으킨 기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해 줄 따름이었다.
‘주술…….’
『저것…… 최소한 천 년 이상은 묵은 괴물이다.』
그때, 네메시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플레이어와 하나가 되어, 천 년을 더 머물면서 스스로 신수가 된 존재. 하지만 요력을 깨우쳤으니, 대요괴(大妖怪)라고 표현하는 게 차라리 옳겠어.』
그것은 경고였다.
아나스타샤와 함부로 싸우지 말라는.
『냉정하게 말해서, 최소한 아홉 왕 급. 전 주인이 돌아온다고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다. 무왕이나 여름여왕이 아니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를 둘러싼 요력이 점차 짙어지면서 뒤에 나타난 환영도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마치 별도로 유리되었던 두 개의 공간이 겹쳐지듯, 아나스타샤가 있는 자리로 구미호가 서 있었다.
꼬리에 붙은 여우불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구미호의 잔상과 요력도 점차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번지수를 잘못 짚었어. 이대로 내빼는 게 맞을 듯하다만.』
아무리 연우가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지만, 아직까지 아홉 왕과 겨룰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특히 무왕과 여름여왕에 가까운 레벨이라면 연우에게 너무 까마득했다.
하지만.
‘아니. 방법은 있어.’
가면 아래. 연우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리고 있었다.
“뭘 그리 쫑알쫑알 대는 것이냐?”
아나스타샤는 현자의 돌 속에 내재된 네메시스를 읽었는지, 인상을 찡그리면서 다시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다섯 번째 꼬리에 불이 붙었다.
콰콰콰쾅-
무수히 많은 공기탄이 쏟아졌다. 그리고 구미호도 커다란 몸집으로 꼬리를 크게 한 번 흔들자, 강풍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지면이 몇 번씩이나 밀려 나갔다. 여우불은 거친 화마가 되어 대지를 새카맣게 그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쩌거거걱-
공간도 잇달아 부서져 나가고 있으니. 마치 매끈한 얼음판 곳곳에다가 망치질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지면을 뚫고 촉수 같은 것들이 대거 쏟아져 후려치기도 했다. 요력이란 거대한 존재에게서 힘을 빌려 강제로 섭리를 비트는 힘.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괴이한 일들이 연우의 주변을 따라 번져 나가고 있었다.
정면에서 싸우는 건 미친 짓이다.
‘그렇다면.’
연우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차근차근히.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용마안]
[초감각]
의념을 따라, 두 개의 스킬이 하나로 뒤섞이면서 수많은 결들을 시야에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바람길 - 일진광풍(一陣狂風)]
그리고 연우는 그 속으로 몸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공기탄과 살벌한 여우불의 업화 속에서 연우는 다시 아나스타샤에게로 쇄도했다.
숙련도가 높아지면서 개방된 일진광풍은 연우의 공격 속도와 위력을 한껏 증가시켜 주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불의 파도가 광풍을 타고 더 크게 번져 나가면서 요력과 잇달아 충돌했다.
그 외에 상대하기 힘든 것들은 결을 보면서 이리저리 피했다. 기동력에 있어서는 웬만한 플레이어들이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란 믿음이 이미 있었다.
『대체, 뭘 하려고?』
하지만 네메시스는 그런 연우의 도전이 너무 과감하게만 보였다. 아나스타샤의 요력은 연우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아직도 남아 있는 꼬리의 불이 네 개. 차례로 개방할 힘이 더 많단 뜻이었다.
당장은 이리저리 피하면서 빈틈을 노린다고 하더라도, 아나스타샤에게는 날파리가 귀찮게 돌아다니며 왱왱거리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구미호의 꼬리에 불이 붙을 때, 보여?’
『무엇이……? 아!』
네메시스는 연우가 무엇을 말하는 건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여태껏 아나스타샤에게만 집중하고 있느라, 다른 곳에는 시선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권속의 수가 줄었군.』
‘맞아.’
괴이들을 금방이라도 밀어붙일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많던 갖가지 마물과 요괴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그때, 여섯 번째 꼬리불이 켜졌다. 그러자 샤논이 처치하던 마물이 갑자기 흐물흐물 녹는가 싶더니, 아나스타샤 쪽으로 흡수되었다.
『평소에는 요력을 풀어놓는 거로군.』
‘신격이나 신성을 얻은 게 아니니, 평소에는 저 많은 요력을 한 몸에 담아 두기가 힘들었던 거겠지. 그러니 지금 있는 모습도 본체인 구미호가 아니라, 플레이어인 거고.’
분명 아나스타샤가 지난 천 년을 묵으면서 쌓은 요력은 아주 대단했다.
하지만 요력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 평소에는 요력 중 상당수를 방출해 놓고 다녔던 것이다.
어차피 요력은 그 특성상, 마력과 다르게 풀어놓는다고 해도 흩어져 사라지는 게 아니라, 똘똘 뭉쳐지기 때문에 놓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미동들. 그것들이 원래는 아나스타샤의 보충 요력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다 싸울 때가 되면 요력을 다시 거둬들이는 방법을 선택했으니. 꼬리불이 켜지면 평소 숨겨 뒀던 구미호의 형상으로 되돌아가면서 더 많은 요력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연우는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지구전으로 간다면 연우가 훨씬 유리하다. 현자의 돌이 쉴 새 없이 마력을 공급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아나스타샤는? 달랐다. 요력을 많이 거둬들일수록 신체가 받는 압박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 압박을 피해 평소 요력을 방출시켜 놓는 존재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러니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간다면 이쪽에도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연우의 판단이었다.
‘네가 읽은 구미호의 전력은 아홉 개의 꼬리불이 모두 켜졌을 때야. 하지만 그 전에는 달라.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동안에는 요력도, 근력도 모두 그보다 약해.’
『그래도 주인보단 강한 듯한데.』
‘그러니 생각을 바꿔서 이런 전략을 쓰는 거지.’
네메시스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완전히 난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격차가 있으니 완전한 소모를 끌어낼 수는 없을 테고. 빈틈을 노리겠다는 건가?』
‘그래.’
정면에서 부딪치면 죽는다. 이리저리 피하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공격을 옆으로 비껴 내면서 전진하는 건 거의 곡예에 가까운 짓이었다.
연우는 금세 다시 아나스타샤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블링크에 이은 일격. 72선술을 조합해 만든 열파참이었다.
‘이렇게.’
촤아악-
“크윽! 네까짓 놈이 감히!”
구미호의 오른쪽 앞다리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가 잔상이 되어 사라졌다. 대신에 아나스타샤의 오른쪽 손목에 아주 가느다란 생채기가 생겨 났다.
또르르, 흐르는 피를 보면서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백 년도 묵지 못한 인간 따위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런 치욕이 있을 수가 없었다. 왼쪽 손날을 뒤집으면서 공간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하지만 연우는 이미 어떤 반응이 있을 거라 파악하고 블링크를 발동시켜 자리를 피한 뒤, 이번에는 구미호의 뒤쪽 왼 다리 부근에 나타나 허벅지 살을 크게 자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블링크를 발동시켰다.
쾅!
그가 사라진 자리로 꼬리가 강하게 내려앉았다.
쿠오오!
구미호가 하늘을 보며 크게 울부짖었다. 비록 덩치에 비하면 아주 작은 상처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인간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려 화를 더 치밀어 오르게 만들었다.
화신이자 구미호의 주 인격인 아나스타샤도 연우를 잡아 보려 애썼지만. 그럴 때마다 연우는 쥐새끼처럼 도망쳤다.
파바밧-
“네놈이!”
아나스타샤는 요력으로 뭉치려던 공간을 빠져나간 연우를 보면서 다시 분노를 터뜨렸다. 금방 잡힐 듯 말 듯 하면서 계속 빠져 나가니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았다.
결국 일곱 번째 꼬리에도 불을 밝혀야 할 모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절대 드러내지 않았을 수준이지만.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기 위해서는 이 정도까지 개방해야 할 것 같았다. 외부로 유출되었던 힘의 일부를 이쪽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지금!’
연우가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블링크를 발동시켰다. 위치는 아나스타샤의 바로 코앞.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쳐져 있지만, 외부의 요력을 흡수할 때만큼은 잠시 거둬지는 것을 눈여겨보고 타이밍을 노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었기에. 아나스타샤는 그 틈을 노리고 들어올 줄 몰라 크게 눈을 뜨고 말았다.
시차 괴리를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가속된 정신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연우는 절대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검은 오러가 다시 폭발했다. 아나스타샤의 왼팔이 크게 베였다.
바라던 것과 다르게 완전히 잘라 내지는 못했지만, 구미호의 한쪽 꼬리는 거의 잘라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연우는 다시 블링크를 발동시켰다. 히트 앤드 런. 금세 자리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일곱 번째 꼬리에 불이 밝혀지고.
화악!
“……!”
연우는 순간 몸이 바짝 굳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다른 공간으로 인도해 줘야 할 마법이 불발되었다.
아니, 분명 시동은 되는데, 강제로 중지되었다. 그를 둘러싼 공간 자체가 단단히 결속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콰앙!
구미호의 거대한 앞발이 연우를 그대로 찍어 눌렀다.
“컥.”
입가로 핏물을 쏟아 내면서 지면에 처박히고 말았다. 얼마나 충격이 강한지, 단단한 마룡체의 뼈들이 죄다 으스러질 정도였다.
재생 스킬이 발동되면서 신체 수복을 하려 했지만, 이미 연우의 몸 위에는 아나스타샤가 올라타 있었다.
“네깟 놈이, 감히! 나를 이딴 꼴로 만들어?”
『네깟 놈이, 감히! 나를 이딴 꼴로 만들어?』
아나스타샤가 연우의 목을 조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구미호가 앞발로 연우를 짓누르고 있는 걸까.
두 존재는 하나의 공간 위에 겹쳐진 상태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연우를 노려봤다. 언성을 내뱉을 때마다 목소리도 같이 겹쳐져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요마안(妖魔眼)〉.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연우의 신체와 영혼을 단단히 구속하고 있었다.
“재롱 잔치도 여기까지다. 제자의 벗이라 하여도 봐주는 데는.”
『재롱 잔치도 여기까지다. 제자의 벗이라 하여도 봐주는 데는.』
연우는 얼마든지 아나스타샤의 빈틈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사실 그가 놓친 점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빅토리아의 스승이라는 점. 빅토리아에게서 룬 마법을 배운 연우의 마법 체계를 아나스타샤가 꿰뚫어 보지 못했을까? 연우의 실착이었다.
“그러니.”
『그러니.』
다 풀어진 두루마기 사이로 나신이 훤히 드러났지만. 실핏줄이 잔뜩 돋아나 보기 기괴했다.
“이제, 죽어라.”
『이제, 죽어라.』
아나스타샤가 사형 선고와 함께 손날을 세우면서 연우의 가면을 향해 그대로 내리찍었다. 연우도 이를 악물면서 마지막 저항을 하려 했다.
「미천. 한. 여우. 따위가!」
권속들이 다급하게 몰려오고, 연우를 돕던 부가 눈을 크게 뜨려던 그때.
“거기까지면 충분하잖아? 이제 그만해.”
갑자기 구미호 앞으로 거대한 늑대의 머리가 드리워졌다. 동시에 아나스타샤의 손날도 누군가가 붙잡았다.
아나스타샤가 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가면을 쓴 프레지아가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늑대, 방해하지 마라. 그리고 거기 가만히 있어. 이후에는 너에게 책임을 물을 테니까.”
『늑대, 방해하지 마라. 그리고 거기 가만히 있어. 이후에는 너에게 책임을 물을 테니까.』
“나도 그래서 온 거야. 미안하니까. 그리고. 팔지는 않더라도, 우선 사정 정도는 들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꼭 천 년 전의 너를 보는 것 같지 않아?”
아나스타샤는 거짓말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왼팔에 깔린 연우를 바라봤다.
가면 속에 담긴 눈빛. 강렬하게 타오르면서도 간절함이 섞인 눈빛이었다. 언젠가……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잘 기억나지도 않는 시절 자신의 눈빛과 똑같았다.
결국 아나스타샤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손길을 거둬야만 했다.
“개 같은 년.”
『개 같은 년.』
프레지아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여우도 갯과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