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24화 (324/862)

24화. 붕우 안서 (9)

빅토리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편지를 들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잘 지내고 있어, 할망…… 아니, 우리 사랑하는 누님?

장난기 가득한 서두로 시작하는 편지. 오행산에 있을 때는 그렇게 싫었었지만, 이제는 그립기까지 한 말투였다. 칸이 바이 더 테이블을 통해 보낸 편지였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레베카와 칸을 생각하면서 피폐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스승의 도움으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제야 일상생활을 조금씩 시작할 수 있을까 싶던 차에. 칸의 편지가 이렇게 도착한 것이다.

처음에는 기뻤다. 자신은 잘 지내고 있으며, 다시 층계를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안부 인사도 같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빅토리아는 뭔가 자꾸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분명 편지 속의 어투는 평소의 칸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감이 그랬다. 이 편지를 보낸 것에는 뭔가가 있다. 이것은 마치.

‘작별 인사를 고하는 것 같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듯이. 그런 말투가 잔뜩 묻어났다. 무엇보다. 언제 한번 보자, 시간이 되면 찾아가겠다는 지나가는 말조차 없었다.

빅토리아는 혹시 편지에 뭔가 담겨 있지 않나 싶어 손끝으로 종이를 매만졌다. 하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마법을 이리저리 걸어도 나타나는 반응은 없었다.

‘혹시?’

가볍게 불꽃을 일으켜 편지를 조금씩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은 재가 날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에…… 빅토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충격으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두우웅-

아나스타샤가 찾아왔는지, 공간이 열린다는 마력 파장이 전해졌다.

빅토리아는 재빨리 손을 흔들어 재를 치우고, 문을 열며 방을 나섰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웃는 낯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스승님, 오셨……!”

하지만 빅토리아는 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나스타샤의 뒤로 손님들이 나오고 있었다. 평소 데리고 다니시던 미동들이 아니었다. 빅토리아도 잘 아는 얼굴들이었다. 아니, 가면을 쓰고 있으니 얼굴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한 명은 프레지아.

그리고.

“카인!”

빅토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달려가 연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너, 너……!”

“이제는 편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연우는 가볍게 빅토리아를 마주 안아 등을 다독였다.

빅토리아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전에 도와달라며 연우가 찾아왔을 때. 그냥 돌려보낸 것이 그동안 너무 미안했었다.

자신의 비급을 보내긴 했었다지만. 그래도 그 일은 마음 한편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 언젠가 찾아가서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렇게 찾아와 줬으니.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못된 년. 너는 네 스승이 이렇게 다친 것도 보이지 않는 게냐? 하여간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

빅토리아는 목 언저리까지 올라 온 ‘스승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신데요’라는 말을 꾹 누르면서,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그러다 뒤늦게 스승이 늘 즐겨 입던 두루마기가 죄다 그을리거나 찢어져 나신이 훤히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참 빨리도 눈치채는구나. 뭣 하느냐. 어서 방에서 새것을 가져오지 않고. 곰방대와 담뱃잎도 좀 가져오도록 하고. 객방으로 와.”

“네.”

빅토리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연우에게 슬쩍 말했다.

“이따 마저 이야기하자. 마침 물어볼 게 있었어.”

물어볼 이야기? 연우의 눈에 의문이 어렸지만, 곧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뭘 해! 어서 가져오지 않고!”

“네!”

빅토리아가 다급하게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뒤에 서 있는 프레지아와 연우의 방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투였다.

“너희 둘도 따라오고.”

* * *

프레지아가 나타난 이후.

아나스타샤는 결국 요력을 거둬들이면서 연우와 프레지아를 자신의 거처로 안내했다.

그녀의 거처는 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양식과는 궤를 달리했다.

보통 화려한 성들이 높은 층고를 자랑하는 것과 다르게, 이곳은 넓은 담장과 부지를 따라 곳곳에 여러 크고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태였다. 장원에 가까운 형태였다.

아나스타샤는 빅토리아가 가져온 두루마기로 갈아입고, 탁상의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덕분에 늘씬한 각선미가 아슬아슬한 범위까지 드러났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투였다.

연우 역시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탁상에 놓인 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기분 좋은 향을 풍겨 댔지만. 거기에도 손 하나 대지 않았다.

“역시, 넌 마음에 안 들어.”

그때. 아나스타샤가 난데없이 툭 말을 내뱉었다.

연우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

“네놈, 아래에 달린 건 제대로 기능이나 하고 있는 것이냐?”

연우도 그제야 아나스타샤의 말뜻을 깨닫고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취향은 무슨. 남자라면 응당……!”

“자뻑이 심하십니다.”

아나스타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는데, 프레지아가 혀를 가볍게 차면서 말했다.

“이런 이상한 소리, 그만하는 게 어떨까?”

“객으로 온 두 연놈들 다 짜증나.”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면서 곰방대를 입에다 물었다. 후우, 하고 가볍게 날숨을 내뱉자 희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프레지아가 연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제대로 설명은 해 줄 것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도움, 감사합니다.”

“무엇을요. 저 역시 대가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거래자와의 오랜 친분이 있었으니 잘 설명해 주는 게 옳다 여겨서 온 것일 뿐이에요.”

실상은 연우와의 거래는 거래대로 챙기면서, 아나스타샤를 달래어 그녀와의 거래도 유지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지만.

목적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연우로서는 프레지아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기에 감사의 인사를 표시했다.

“그런데 프레지아.”

“왜 그러신가요?”

“아나스타샤와 오랫동안 친분이 있으신 듯한데.”

“우연찮게 어렸을 적부터 서로 보아 왔던 것뿐입니다.”

네메시스가 말하기로, 아나스타샤는 분명 천 년은 족히 묵은 구미호라고 했다. 그런 그녀와 친분이 있다면.

‘혹시 프레지아도?’

나이를…….

“그 이상 묻는 것은 여인에게 결례가 아닐까요?”

프레지아가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그녀 역시 나무탈을 쓰고 있어 얼굴 표정을 살필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연우는 그녀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탁!

그때. 아나스타샤가 물고 있던 곰방대를 가볍게 내리면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잡담은 거기까지 하고. 말했지만, 대가로 뭘 내놓든 간에 그건 절대 줄 수 없다. 그걸 가져가려면 내 목을 가져가야 할 거야.”

아나스타샤는 연우를 쏘아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그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여우불이 다시 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주인이 팔기 싫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진 모르겠지만…… 오냐. 그렇게 궁금해하니 보여 주마.”

아나스타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실내의 뒤쪽에 있던 병풍을 옆으로 치웠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이 드러났다. 하지만 거기다 손을 갖다 대자,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벽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쿠쿠쿠, 쿠쿵-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따라와.”

아나스타샤는 연우와 프레지아의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고 먼저 계단으로 내려갔다. 입에는 다시 곰방대가 물렸다.

연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 프레지아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몇 번씩 거대한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아나스타샤는 요력을 흘려서 관문을 열었다.

곳곳에는 빅토리아가 설치한 듯한 여러 마법 장치나 트랩 외에도, 갖가지 요괴나 마물들이 잔뜩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역시나 아나스타샤에게서 분리된 듯한 것들. 아무래도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가 나타나면 동면에서 깨어나 공격하도록 명령이 심어진 듯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것들까지 전부 거둬들였다면…… 정말 위험했겠는데.’

연우는 어쩌면 아나스타샤에게 달려든 것이 진짜 겁 없는 행동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요괴나 마물도 결국 아나스타샤의 일부일 테니, 전부 회수한다면 힘이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가장 먼저 여름여왕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와도 어느 정도 승부를 볼 수 있을 듯 보였다.

이만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여태 은거를 택하고 있었다니. 대체 아나스타샤의 목적이 무엇일 까.

“여기부터가 진짜다. 괜히 휩쓸리지 마라. 그런다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릴 테니까.”

아나스타샤는 연우에게 싸늘한 경고를 날리면서 마지막 관문을 열었다.

철컹-

휘휘휘!

그 순간, 확 불어오는 악기.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칠흑왕의 절망과 비탄이 떨리면서 망령들이 일어나 악기를 전면에서 막았다.

“제법이로군.”

아나스타샤는 곰방대를 입에 물면서 연우를 품평했다. 싸울 때도 느꼈지만, 망령을 다루는 연우의 기예는 오랫동안 살면서 갖가지 다양한 기예를 보아온 그녀에게도 신기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 집중할 새가 없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악의(惡意).”

연우는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다.

“악의라면?”

“아주 오랫동안, 이 빌어먹을 탑을 좀먹어 가던 놈들의 사념, 뭐 그런 거지.”

다시 아나스타샤를 따라 들어간 공간은 온통 다양한 무구들로 가득했다.

검, 도, 창, 권, 갑옷, 투구, 건틀릿……. 방어구와 무기가 제대로 된 구분 하나 없이 아무렇게나 벽에 걸려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박제’라는 표현이 옳은 것 같았다. 무구가 걸린 자리에 갖가지 마법진이 겹쳐져 설치되어, 요력으로 만든 것 같은 실들이 꽁꽁 묶어 대고 있었으니.

그리고 무구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이따금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강한 사념이 어린 무구에는 언제가 영이 깃들기 마련이지. 흔히 말하는 귀물(鬼物)이나 요병(妖兵)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탑에서도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되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진 비그리드가 그러했고, 작게는 마장대검도 귀물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이 계속 시간이 지나, 사념이 계속 누적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요괴가 된다.”

“…….”

연우는 순간 오래전에 지구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오래된 물건은 도깨비가 된다는 전설.

“이런 요괴들은 제 주인을 잡아 먹고 자유를 찾길 바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고와 이성이 갖춰진 요괴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

“피를 부르겠죠.”

“맞다. 난리가 나도 아주 크게 나지.”

아나스타샤는 계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럴수록 더 강한 악의를 풍겨 대는 귀물과 요병이 나타났다.

“난 그딴 게 보기 싫었다. 그래서 눈에 띄는 건 몽땅 거둬들였고, 여기다 처박아 놨지.”

후우-

새하얀 연기가 다시 자욱하게 퍼졌다. 연기는 곧 검은 악의와 뒤섞이면서 혼탁한 회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제든 나오려고 발버둥 치니 박아 놓는 데도 한계가 있어. 그래서 묶어 둘 필요가 있었고. 그 중심이 되는 게.”

아나스타샤의 걸음이 멈췄다. 막 다른 길이 나타났다. 공간은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았다.

“바로 저것이다.”

마지막 벽에 걸린 검은 구슬이 보였다. 마치 빛나는 별처럼 시린 빛을 토해 내는 구슬. 여태 봉인의 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전부 구슬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아다만틴 노바. 강렬한 힘이 풍겨져 나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그것을 바라봤다.

“아다만틴 노바는 이곳, 만병천고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저것을 내어 달라고? 어림없는 소리. 그랬다가는 여기 있는 것들이 전부 미쳐서 날뛰기 시작할 텐데. 그동안 나한테 쌓인 게 많으니, 나부터 물어뜯으려 할 테고.”

아나스타샤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냉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런데도 달라는 헛소리는 하지 않겠지? 저건 내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제 이유를 알았으면, 썩 꺼져.”

* * *

“아나스타샤는 절대 그렇게 정의롭거나, 호의적인 사람, 아니, 여우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귀물과 요병을 거둬들이는 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에요. 당시의 그녀는 아주 애절하고, 처절했으니까요.”

아나스타샤에게 내쫓긴 이후, 프레지아는 연우를 잠시 붙잡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왜 아나스타샤가 저토록 아다만틴 노바를 놓을 수가 없는지. 만병천고는 그녀의 모든 것이라고 했다.

“그때의 일은…….”

“거래에 포함되지 않으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알려드린 것도 납득하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한 것일 뿐.”

연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누구나 사연을 안고 산다. 사람도 그럴진대 천 년을 넘게 묵었다는 구미호라면 오죽할까. 아마 일반인으로서는 짐작도 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도 아주 얻는 것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귀물과 요병은 그 자체로 높은 격을 갖춘 요괴라, 주기적으로 요력을 뽑아내는 장치가 되기도 해요. 하지만 단언컨대, 카인 님이 아다만틴 노바를 가져가려 한다면.”

“위험해질 거란 뜻이시겠죠.”

“맞아요.”

“하아.”

연우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다만틴 노바를 가져가려 해도 아나스타샤가 저렇게 나오는 이상, 가져올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탑 내에 그것을 가진 다른 사람이 있냐고 한다면, 없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았다. 있었다면 여기서 프레지아가 말했을 테니까.

‘역시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나.’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본을 들여야 하는 걸까. 타르타로스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지금, 한 시가 급한 그로서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말이었다. 두 키클롭스들이 돕는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까.

‘헤노바와 브라함, 대장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빅토리아에게도 부탁해야겠어.’

현자의 돌을 만들었을 때처럼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어 연구하다 보면, 보다 빨리 결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연우는 어떻게 해야 제작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킬 수 있을까, 빠르게 머릿속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빅토리아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그러다 이따 밖에서 얼굴을 보자고 했던 빅토리아가 약속 시간까지 나타나질 않아 의아함이 들었다.

그때, 연우 앞으로 포탈이 열렸다. 빅토리아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불쑥 나타났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살벌한 기세가 휘몰아 쳤다.

그리고.

쾅!

아나스타샤는 다짜고짜 연우의 목을 낚아채면서 지면에다 그대로 내리찍었다. 연우는 어떻게 저항할 새도 없었다.

어느새 아나스타샤의 뒤쪽으로 아홉 개의 꼬리 중 아홉 개 전부에 불이 잔뜩 켜져 있었다.

요력이 들끓었다. 대기가 이리저리 일그러지면서 막대한 중압감이 연우의 폐부를 짓눌렀다.

“어디에 숨긴 거냐.”

“아나스타샤!”

“닥쳐, 늑대. 난 지금 이 새끼와 이야기 중이니까!”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말리려는 프레지아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다시 연우를 돌아봤다.

“말해. 어디에 숨겼어?”

“무엇을……!”

“시치미 떼지 마라.”

아나스타샤의 눈빛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빅토리아 말이다. 아다만틴 노바와 함께 사라졌어. 네 짓이 아니면 누구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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