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1화. 미후왕의 후예들 (1)
칠대성. 동주칠마왕을 기리는 사당.
미후왕의 궁전 이후로 그들과 관련된 유적지는 본 적이 없었기에. 연우의 눈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너?”
아나스타샤와 프레지아도 뭔가를 느꼈는지 연우를 돌아봤다. 특히 프레지아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뜻하지 않게 뭔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하지만 연우는 두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부.’
「알겠. 습니다.」
[부(부두술사의 영혼)의 시야를 공유합니다.]
부의 마법에 따라, 사당을 둘러싼 갖가지 사념이 눈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혈검! 너의 만행도 여기까지다.
-빌어먹을 놈. 여기까지 도망쳐?
-이젠 네놈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동료들의 원한을 갚아 주마.
‘칸?’
사념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평소 연우가 알고 있던 칸의 모습과는 달랐다. 언제나 여유롭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다니던 녀석이었지만. 사념 속의 칸은 싸늘하게 식은 눈빛과 살벌한 위세를 풍기고 있었다.
얼마나 피를 많이 뒤집어썼는지, 갑옷이며 옷, 손에 쥐고 있는 검까지 흠뻑 젖어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혈검(血劍).
피로 물든 검이라는 별칭이 그토록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칸을 에워싼 플레이어들의 눈동자에서는 적의와 함께 경계심이 잔뜩 묻어났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연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여태껏 그가 파악했던 칸은 아주 비밀리에 움직였다. 그래서 연우는 그를 억류한 마군이 그렇게 지시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서 보이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적의가 심상치 않았다. 원수라도 보는 듯한 눈빛. 웬만한 충돌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살의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관계를 증명하듯이. 칸은 플레이어들을 보면서 되레 코웃음을 쳤다.
-웃기네.
-무엇이?
-무슨 헛소리를……!
-어차피 너희들도 나와 똑같은 놈들이잖아? 그런데 뭐? 원한을 갚아? 차라리 솔직해지는 게 어때?
칸은 한쪽 입술 끝을 비틀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그의 손바닥 위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쇳조각이 나타났다.
-너희들도 이것을 갖고 싶다고 말이야.
순간, 칸을 둘러싼 플레이어들의 가슴도 잘게 떨렸다. 옷깃 사이로 황금색 빛무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웅, 웅-
황금색 쇳조각들이 서로 하나로 합쳐지고 싶다는 듯, 동시에 공명을 일으켰다.
‘여의봉의 조각!’
연우는 칸과 플레이어들이 가진 쇳조각을 보고 침음을 삼켰다.
‘여태 미후왕의 후예들을 사냥하고 있었던 걸까?’
상대적으로 칸이 가진 여의봉의 조각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크기가 컸다. 덩어리 채로 주웠을 리는 없으니, 여태 다른 후예들을 상대하면서 조각을 빼앗아 합쳐 왔다는 뜻이었다.
연우 역시도 여의봉의 조각을 갖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미후왕의 후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태껏 이유를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후예가 그리 많지 않거나, 아니면 이미 후예들끼리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회가 형성되어 있거나.
보아하니 둘 다인 모양이었다.
-그럼 시작하자고.
칸은 여의봉의 조각을 회수하면서 지면을 세게 박찼다. 붉은색 오러가 해일처럼 크게 일어나면서 거친 폭음이 뒤따랐다.
콰콰쾅-
‘72선술까지.’
아무래도 칸은 미후왕의 궁전에서 72선술도 확실히 터득해 자신의 것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장면이 바뀌었다.
거친 싸움이 지나간 자리. 그 위로 빅토리아가 뒤늦게 나타났다. 아다만틴 노바를 품에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슬픈 눈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포탈을 열어 사라졌다.
사념은 거기서 끝이 났다.
연우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졌다.
“뭐라도 봤나?”
아나스타샤가 곰방대를 입에 물면서 물었다.
연우는 자욱하게 퍼지는 연기를 보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행산.”
* * *
팟-
“쫓아!”
“놈은 현재 크게 다친 상태다. 멀리 달아나지 못했을 거야! 놓치지 마!”
“다른 놈들에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 놈은 반드시 우리 마탑이 손에 넣어야 해!”
잔뜩 우거진 숲과 경사가 가파른 산맥의 지류를 따라. 여러 명의 플레이어들과 클랜들이 각자 다른 포위망을 구축하며 한 사람을 쫓고 있었다.
고행의 산. 여러 감각이 닫힌 탓에 제대로 된 실력을 드러내기 힘든 스테이지였지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칸이었다.
찰박, 찰박-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흘리게 했는지. 그가 지나는 자리에는 핏자국으로 땅이 흠뻑 젖어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칸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하면. 그럼 도일을 되찾을 수 있어.’
* * *
[이곳은 20층, 고행오산의 관입니다.]
연우는 20층에 도착하는 순간, 직감적으로 뭔가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눅눅하지만, 들끓는 공기. 맡는 것만으로도 피부를 따라 으스스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아프리카에 있을 시절과 똑같은 느낌이라, 연우는 아주 잠깐 자신이 제대로 층계에 도착한 게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넓게 펼쳐진 산맥과 산등성이를 따라, 곳곳에 여러 플레이어들이 포진해 있었다.
얼추 잡아도 수백, 수천은 넘을 것 같은 인원들. 그것도 꽤나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연우가 기억하는 20층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광경.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싶어 프레지아를 돌아봤다.
하지만 프레지아는 조용했다. 고요한 눈빛.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너무 태연한 눈빛을 본 순간.
연우는 본능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프레지아는 편지와 관련해 뭔가가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 대긴 했었다.
“선술교학(仙術妙學).”
프레지아는 연우의 눈길을 받고 뜬금없이 생뚱맞은 말을 내뱉었다.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게 무엇입니까?”
“선술이라는 학문은 마법, 술법, 주술, 요술 등 다양한 이능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별종으로 분류되어요. 신선이 되기 위한 길. 그래서 선술 뒤에는 보통 ‘신묘한 학문’이라는 뜻의 ‘묘학’이라는 단어가 붙죠. 그리고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선술을 탐내기도 해요.”
연우는 프레지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프레지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선술묘학이 나타났어요. 발견자는 혈검 칸. 그리고 여기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많은 집단들이 그것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네요.”
“……!”
연우는 산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선술묘학. 72선술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미 연우는 칸이 72선술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들켜 다른 플레이어들로부터 쫓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왜 이제 와서?’
여러 미후왕의 후계들과 싸움을 치르던 중에 일이 잘못 풀리기라도 한 것일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미후왕의 후계자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각 집단들의 명분은 혈검 칸의 학살이었다고 합니다.”
“학살이요?”
“예. 최근에 혈검 칸이 크라시앙 가(家)라는 집단을 급습해서 큰 학살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가문의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이며 장원의 가축들까지. 참상이 너무 끔찍해 꽤 많은 플레이어들이 분개를 했다는군요.”
크라시앙 가라면 연우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41층에 터전을 잡아, 제법 큰 위세를 부리는 가문. 원래는 플레이어였던 조상으로부터 시작해, 지금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네이티브였다.
그런 곳을 마구잡이로 도륙했다고?
프레지아의 말에 따르면, 크레시앙 가의 참상을 목도한 자들을 중심으로 추격대가 편성되었다고 한다.
크레시앙 가와 깊숙하게 이권이 연결된 집단들과 오랫동안 친분을 맺었던 동맹 세력들도 일제히 복수를 외치며 추격대에 가담했다.
또한, 여기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크레시앙 가의 후계가 남은 가산을 털어 칸에게 현상 수배를 걸기도 했으니.
여러 플레이어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칸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 원한을 갚아?
연우는 칠대성의 사당에서 보았던 사념을 떠올렸다. 칸을 보면서 분개하던 여러 플레이어들. 그리고 그들에게 조소를 날리던 칸.
“물론, 목적에 크레시앙 가의 복수만 있는 건 아니었죠.”
그리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칸은 그동안 숨겨 뒀던 여러 신기를 선보였다. 그중 단연 눈에 띈 것이 바로 선술묘학. 72선술이었다.
“성장이 멈추거나, 더 강한 힘을 바라는 플레이어들로서는 좋은 ‘거리’가 생긴 셈이죠. 마침 타당한 명분도 있으니까요.”
프레지아는 말을 살짝 끊으면서 말했다.
“이를테면.”
눈빛이 연우의 가면을 꿰뚫었다.
“혈검 칸은 현재 공적(公敵)이 셈이에요.”
그녀의 시선은 연우에게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위기에 잠긴 칸.
하지만 연우는 타르타로스의 일로 당장 한시가 급박한 상황이다. 퀴네에 제작에 신경 쓸 것인지, 아니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칸을 도와줄 것인지.
자칫 칸을 도와주었다가는 같이 공적으로 내몰려서 모든 일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진즉에…… 알고 계셨습니까?”
하지만 연우는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노여움에 잠긴 시선으로 프레지아를 노려봤다.
“편지를 전달해 주었을 때부터?”
프레지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 프레지아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수수방관하고 있었단 뜻이었다. 빅토리아가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 눈치챘을 텐데도, 별다른 말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프레지아의 태도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짜증 섞인 얼굴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개 같은 년.”
결국 뼛속까지 장사치인 셈이었다.
연우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손을 높이 들었다.
“니케.”
푸른 성화가 피어오르며 니케가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나타났다.
‘부탁할게.’
『응응!』
니케는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연우는 연결 고리를 통해 니케와 시야를 공유했다. 무언가를 탐색할 때에는 자신의 의념보다 니케의 감각 쪽이 훨씬 나았다.
“칸과 빅토리아를 구할 생각이신가요?”
프레지아가 연우를 묘한 눈길로 바라봤다. 퀴네에가 아닌 칸을 선택할 것이냐는 물음.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 하지만 그때도 내렸던 결정은 하나였습니다.”
연우는 칸과 도일이 아랑단에 억류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내렸던 결론은 하나였다.
형은 자신에게 영웅이었다는 동생의 말. 거기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여기서 칸을 버리고 퀴네에를 선택한다고 한들. 그렇게 해서 동생을 빠르게 구해 준다고 한들. 동생이 앞선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기뻐할까?
연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친구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구해야 했다.
“그런가요. 그게 당신의 대답이로군요.”
순간, 프레지아가 묘한 웃음을 흘리는 것 같았지만.
연우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니케가 공유한 시각 정보를 통해 넓은 산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산맥 지점에서, 거친 폭발과 함께 산사태가 일어나 절벽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저기다!’
“저기로군!”
그새 아나스타샤도 똑같이 뭔가를 느꼈는지 다시 구미호로 변신해 그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연우도 불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그쪽으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