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미후왕의 후예들 (3)
토르카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는 얼굴로 빙왕을 노려봤다.
하지만 빙왕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좋다는 듯, 뒤로 슬쩍 몇 걸음 물러섰다. 정말 이번 일에 개입하기 싫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이래서 늙은이들은.’
토르카는 빙왕에게 가졌던 마지막 남은 존경심마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겁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저깟 놈이 무엇이라고.
토르카는 후방에 빠져 있던 수하들에게 턱짓을 했다. 철사자단의 정예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으면서 천천히 연우를 에워쌌다.
스르릉, 스릉-
토르카도 자신을 상징하는 쌍고검을 천천히 뽑아 양손에 쥐면서 앞으로 나섰다.
* * *
『이런 꼴을 보이긴 싫었는데, 하하…….』
빅토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연우를 바라봤다. 피에 젖어 축 가라앉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연우의 얼굴이 아닌 살짝 비껴 난 곳을 보고 있었다. 시력이 망가졌단 뜻이었다.
‘위험해.’
품에 안긴 빅토리아를 보는 연우의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빅토리아의 기식은 엄엄했다.
한쪽 손이 잘리고, 전신이 화상으로 짓눌렸다. 거기다 억지로 마력을 돌리면서 내상도 크게 입은 상태. 이대로는 위험했다.
힐링과 리커버리를 계속 부여하고는 있지만. 이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다. 생명력이 너무 빠른 속도로 소모되는 중이었다.
‘아다만틴 노바.’
그때, 연우의 눈에 바닥을 뒹굴고 있는 아다만틴 노바가 보였다. 빛을 잃어 평범한 구슬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주변으로 강렬한 마력 파장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연우가 앞으로 손을 뻗자, 아다만틴 노바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르면서 빅토리아의 손 위에 올라왔다.
우웅, 우우웅-
빅토리아는 그것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토록 잡고 싶었는데 결국 잡을 수 없었던 것. 그게 겨우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공허한 시선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연우는 빅토리아가 보고 있는 것이 지난날 오행산에서 칸을 놔 두고 도망쳐야만 했던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쌓인 한이 아직도 가슴에 사무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우는 빅토리아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꼭 끌어안아 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부』
츠츠츠-
부름에 따라, 연우의 뒤편으로 두 개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도깨비불처럼 맺혔다.
「예.」
『살려. 어떻게든.』
「명에. 따릅. 니다.」
우우우웅-
그때, 아다만틴 노바가 다시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하면서 강렬한 빛을 뿌렸다. 서광이 점차 빅토리아를 따라 퍼져 나갔다.
순간, 빅토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체 어떻게? 아다만틴 노바는 뛰어난 기능만큼 다루기가 아주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도 귀물과 요병을 봉인하는 결계의 핵으로만 썼고, 빅토리아도 특별히 제작한 단말을 통해 마력을 끌어냈다. 그리고 단말이 깨졌을 때, 아다만틴 노바도 기능이 정지했다.
그런데 연우의 권속으로 보이는 리치는 그런 제약 따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너무나 능숙하게 아다만틴 노바를 다루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사용되는 마법도 고위 등급에 해당하는 〈힐링 포지션〉. 죽음을 다루며 생명과는 거리가 먼 리치가 다룰 수 있는 마법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부는 그런 빅토리아의 궁금증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가 내린 명령에 따라 그녀를 치료하는 데에만 몰두할 따름이었다.
연우도 여기에 필요한 마력을 공급하는 데 집중하던 그때.
『붉은 신목을 내놔라, 독식자.』
철사자단을 비롯한 여러 플레이어들이 이곳을 좁혀 오고 있었다. 두 눈에 탐욕에 젖은 불을 잔뜩 켠 채로.
가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연우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에 몸을 감고 있던 불의 날개를 한껏 옆으로 젖혔다.
그러자 맹렬한 열풍이 불어 닥치면서 눈앞에 있던 보기 싫은 것들을 깡그리 밀어 버렸다.
콰콰콰-
『……!』
『……!』
그 뒤에 벌어진 광경에,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격의 노출 범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결계를 구축하던 자들도. 방어 스킬을 펼치던 자들도 예외는 없었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새카만 그을림과 붉은 불씨, 그리고 재가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그런 무지막지한 열풍이 여전히 연우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고오오!
『모두 피해!』
가장 먼저 위험성을 깨달은 토르카가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뒤따라 철사자단이 자랑하는 다른 단장들과 부단장들이 뛰쳐나가고, 현상금 사냥꾼 중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문 워커나 스트리지도 앞으로 나섰다.
퍼퍼퍼펑-
불의 날개가 이리저리 홰를 칠 때마다, 엄청난 고열을 품은 열풍이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가면서 지면을 휩쓸고, 대기를 뜨겁게 달궈 놓았다.
먼지구름도 거칠게 일어나 시야를 흩트리는 가운데.
『흡!』
문 워커의 앞으로 연우가 불쑥 나타났다. 마치 귀신처럼 표홀한 움직임.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였던지, 문 워커는 그의 기척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눈을 황망하게 뜨면서 방어 자세를 구축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연우가 바로 눈앞에 도착해 있었다.
쾅!
연우는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단순한 정권 찌르기. 하지만 위력은 절대 단순하지 못했다.
문 워커는 그대로 뒤로 크게 튕겨 났다. 갑옷은 잔뜩 으스러지고, 입 밖으로 쏟아지는 핏덩이에는 파열된 내장 조각이 섞여 있었다.
한 팔에 빅토리아를 끌어안은 불편한 자세로도 말도 안 되는 힘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불의 날개를 한껏 키우면서 저 멀리 튕겨 나는 문 워커를 쫓았다. 빅토리아의 손을 자른 것처럼, 녀석의 모가지도 이참에 분질러 버릴 생각이었다.
『어딜!』
『거기 멈춰라!』
철사자단의 용병들이 와락 달려들었다. 그들의 뒤는 스트리지가 엄호를 하고 있었다. 월광의 은탄을 마구잡이로 쏘아 연우의 발목을 묶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았다. 쇄도하던 중에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허공에서 멈추더니, 그대로 몸을 뱅그르르 돌렸다.
불의 날개가 한껏 번져 나가면서 커다란 소용돌이를 그려 냈다. 이미 열풍의 위력을 겪은 플레이어들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주춤거릴 때, 불꽃 소용돌이를 가르면서 다른 것들이 튀어나왔다.
연우가 나올 줄 알았던 용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타난 것은 연우가 아니었다. 잔독혈을 잔뜩 품은 괴이들이었다.
그 뒤를 따라 잿빛 망령들이 줄지어 나타나 사방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제2천의 영]
캬캬캬-
키아아악!
『무, 뭐야, 이거!』
『크아악!』
틈틈이 숫자를 늘려 어느덧 오십여 마리로 불어난 괴이들은 단숨에 용병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손톱을 휘두를 때마다 핏물이 튀고, 독에 중독된 용병들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디, 지?』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스트리즈는 화살을 시위에 걸다 말고 잠시 주춤거렸다.
‘없어?’
목표로 잡아야 하는 연우가 도무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등골이 섬뜩 느낌에 본능적으로 몸을 반대로 돌리려 했지만.
『늦었어.』
스걱-
이미 연우는 녀석의 뒤편에서 나타나 마장대검으로 목을 치고 있었다.
푸우우!
피보라가 일어나면서 목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머리를 잃은 스트리지의 사체가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 옆에는 다른 시체가 하나 더 사이좋게 놓여 있었다. 이미 사냥이 끝난 문 워커의 시체였다.
순식간에 둘이나 되는 랭커가 피를 뿌리면서 쓰러진 것이다.
『이……!』
토르카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튀어 나갔다. 아니, 튀어 나가려 했다. 연우에게로 몸을 날리기 직전에 갑자기 나타난 요력이 아니었다면.
쿵!
갑자기 이번에는 뒤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토르카는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집채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구미호가 바로 그들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아홉 개의 꼬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하울링(Howling)은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감히, 인간 따위가 내 제자에게 손을 대? 감히!』
토르카가 어떻게 말을 할 새도 없었다.
구미호가 한쪽 발을 강하게 구른 순간, 그녀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던 여우불이 확 하고 일어나 삽시간에 사방으로 번져 나간 것이다.
결국 남아 있던 철사자단과 용병들,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쓸려 나간 가운데.
『아, 아아!』
토르카는 자신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 구미호가 내뿜은 어마어마한 요력에 압도되어 투지가 완전히 꺾여 버리고 만 것이다.
『죽어라.』
토르카의 죽음을 확정 짓는데 필요한 단어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요마안으로 토르카를 보며 명령을 내린 순간, 겨우 남아 있던 의지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절명이었다.
털썩-
연우는 모든 것이 쓸려 나간 곳에서. 이제 유일하게 남은 사람을 바라봤다.
『빙왕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싸우시겠습니까?』
『나는 빼 주게. 자네가 나타났을 때부터 뒤로 빠지지 않았나.』
빙왕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방금 전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동료들, 아니, 동료들이‘었’던 것들을 바라봤다.
대부분 부서져 사라지거나, 새카만 숯이 되어 생전의 모습도 알아보기 힘든 것들뿐.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결국 죽음을 초래하고 만 것이다.
연우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빙왕도 같이 정리할 속셈이었지만, 지난 인연도 있는 데다가 자신과 싸울 의욕도 없어 보였기에 굳이 손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남은 시체들은 수습할 수 있게 해 주게.』
『그러십시오.』
『고맙군.』
빙왕은 진심으로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고, 겨우 남아 있는 시체만 수습하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상당히 소란스러워지겠군.』
-독식자가 나타난 곳에는 언제나 소란이 벌어진다.
그런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긴 하지만. 이번에는 웬만한 정도에서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명색이 용병계 최강 클랜인 철사자단이 이런 피해를 좌시하지 않을 테고, 랭커가 둘이나 죽어 나간 상황도 추적자들에게는 아주 큰 충격일 테니까.
빙왕은 곧 쏟아질 사람들의 질문이 벌써부터 버겁기만 했다.
* * *
『이건 전부 너 때문이야.』
어느덧 인간 형태로 돌아온 아나스타샤는 빅토리아를 품에 안으면서 연우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가 나타나 이 아이에게 자극을 주지 않았더라면, 이딴 사달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지』
아나스타샤는 그런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났다.
「뭐야, 저 할망구? 재수 없게. 말투도 그렇고. 왜 주인 탓을 하는 거야?」
샤논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연우가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빅토리아가 칸을 찾으러 가지 않았을까? 샤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우는 그저 중간에 끼인 입장이었을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저 원망할 대상을 필요로 했던 것이고.
하지만.
『…….』
연우는 아주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아나스타샤 때문이 아니었다. 시선은 빅토리아에 고정되어 있었다.
칸을 구하러 가기 위해 움직인 빅토리아. 동생의 영혼을 되찾으려는 자신. 두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이 되었던 것이다.
「주인?」
『어? 왜?』
「갑자기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연우는 머리를 털었다. 샤논은 그런 주인이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방향을 돌렸다.
「그보다 이제 어쩌려고? 저 할망구도 지랄 맞게 구는데.」
『일단은 이곳 전황부터 파악해야지.』
하지만 상황을 설명해 줄 빅토리아는 아나스타샤가 데리고 가 버렸다. 그럼 누구에게 확인한다?
의미 없이 주변을 훑던 연우의 시야에 어느새 사체를 모두 수습하고 조용히 떠나려는 빙왕이 보였다.
가라고 했다가 도로 붙잡는 게 모양새가 안 좋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
‘조금 짜증도 나고.’
게다가 아나스타샤의 억지도 조금 억울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빙왕 등이 저지른 짓을 자신에게 탓한 셈이었으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빙왕은 혹시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등골을 바짝 세우면서 연우를 바라봤다. 등에 식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왜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와 같이 남아 주셔야겠습니다.』
빙왕은 새삼 어색하게 웃었다.
『갑자기, 왜……?』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해져서 말입니다.』
『…….』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싫으십니까?』
연우는 가볍게 손을 펼쳤다. 검은 불꽃이 손바닥 위로 거칠게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화르륵-
순간, 빙왕의 머릿속으로 불길에 단박에 쓸려 나가던 토르카 등의 얼굴이 떠올랐다. 게다가 저 불은 자신의 속성과 정반대였다.
『하, 하하…….』
빙왕은 어색하게 웃더니.
『싫을 리가 있겠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자네 스승과의 인연도 있고. 마음껏 시켜만 주시게.』
빙왕은 사람 좋은 미소로 말했다.
『그래. 뭐부터 하면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