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미후왕의 후예들 (4)
연우와 용병들의 전투는 순식간에 20층에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널리 퍼졌다.
“독식자? 호호. 독식자가 여기에 왔단 말이지?”
전신을 붕대로 감은 괴인, 페이스리스는 농염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귀부인을 보는 것 같은 고운 자태. 그러다 다시 말을 이을 때에는 싸움을 앞둔 전사처럼 격렬했다.
“그래. 사건 사고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나타나는 승냥이 놈이 여기라고 안 올 리가 없지.”
목소리가 다시 변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아이처럼 밝은 목소리.
“으히히! 이참에 그 녀석도 친구로 삼아 볼까? 그 녀석이 가진 영혼은 어떨지, 궁금한데. 제발, 제발. 맛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다 페이스리스는 홱 하고 옆에 서 있던 수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망자의 함. 페이스리스를 따른다는 조직. 4대 신흥 클랜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혈검을 수색하던 건 잠시 중단한다. 지금부터 독식자를 찾아라. 녀석이 어떤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니.”
수하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붕대 사이로 페이스리스의 안광이 예리하게 빛났다. 이제 그는 마치 연구를 하는 학자처럼 차분했다.
* * *
그 외에 다른 단체들도 빠르게 움직였다.
“빅토리아는 혈검의 행방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단서다! 수색 마법을 펼쳐! 서둘러!”
닥터 둠의 명령에 따라, 네크로폴리스는 스테이지 곳곳에 마법을 뿌려 대면서 바쁘게 뛰어다녔고.
“토르카가 죽었다. 독식자, 그놈은 이제부터 우리들의 원수이니. 놈의 머리를 가져올 때까지는 다시 돌아올 생각 마라.”
철사자단은 이를 갈면서 연우에 대한 분노를 불태웠다.
그렇게 스테이지에 있는 모든 용병과 플레이어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가운데.
“독식자라면?”
“맞아. 듣기로는 녀석도 선술묘학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지.”
“그렇다는 건, 여의봉의 조각도 갖고 있을지 모른단 뜻인데.”
“만나 보면 알겠지.”
소수의 그림자들도 몰래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연우 일행은 곧바로 격전지를 떠나, 외딴곳에 도착했다. 고행오산에서도 멀리 떨어져 스테이지의 제약이 미치지 않는 곳.
“사실 지금 벌어지는 싸움은 겉보기에 불과해. 진정한 속셈은 따로 있지.”
빙왕은 연우와 단둘만 남은 자리에서 스테이지에서 벌어지는 내용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뭔가를 숨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속셈이라면?”
“이런 것이지.”
빙왕은 더 이상 숨길 게 무엇이 있겠냐는 듯, 품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파편. 여의봉의 조각이었다.
그리고.
우웅-
연우의 품에서도 자연스레 여의봉의 조각이 잘게 떨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빙왕께서도, 미후왕의 후예이셨습니까?”
“그렇다네. 반쪽짜리지만.”
“반쪽?”
“조각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미후왕의 후예’라는 칭호를 얻긴 하지만…… 사실 그걸로 후예라고 자랑스러워하기엔 부족하지.”
빙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연우는 굳이 거기에 대해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한데,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숨길 수 있었냐고?”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봉의 조각은 근처에 있기만 해도 공명을 일으킨다. 그래서 미후왕의 후예들은 서로가 서로를 쉽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여태 연우는 다른 후예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빙왕도 마찬가지. 발푸르기스의 밤 공방전 때에도 빙왕에게서는 아무런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빙왕이 살짝 장난기 섞인 얼굴로 웃었다.
“혹시 그 말 기억하나? 다음에 인연이 되면 한번 보자고 했던 것.”
연우는 무왕과 인사를 나누다가 자신을 보며 가볍게 웃음을 짓던 빙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냥 지나가는 말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럼?”
“그래. 난 사실 자네가 나와 같은 미후왕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네. 이놈 덕분에.”
빙왕은 여전히 잘게 떨리는 여의봉의 조각을 가리켰다.
“하지만.”
“맞아. 나는 알았지만, 자네는 느끼지 못했겠지. 사실 공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소에는 이놈을 단단히 봉인해 두고 있거든. 물론, 그래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지만.”
연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왜 그동안 다른 미후왕의 후예를 찾을 수 없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명을 숨길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손을 쓰기도 힘드니.
하지만 그렇다는 건.
‘그동안 놓친 후예들 중 몇몇은 날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는데.’
명백한 실수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네만. 그래도 걱정은 마시게. 사실 이 조각을 가진 사람들은 아래 층계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니.”
“고층 구간에 모여 있습니까?”
“미후왕의 단순한 변덕으로 여의봉의 조각이 흩어진 것만 벌써 천 년이 넘네. 당연히 대부분의 조각은 발견되었고, 그것들은 랭커들의 손에 있겠지?”
연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 이제부터 조심하면 될 것이란 의미였다.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지금 벌어지는 싸움은…….”
“쟁탈전이로군요.”
“맞아.”
빙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벌어진 조각 쟁탈전이지. 후예들끼리 모여서 서로가 가진 조각들을 빼앗으려는……. 그리고 여기에 모인 플레이어들 중 상당수가 그런 후예들이야. 혈검 녀석이 우리를 이리로 불렀고, 우리는 지옥이 될 걸 알면서도 모여든 셈이지. 불나방처럼.”
불나방.
빙왕은 자신들을 그렇게 말했다.
“아까 내가 스스로 ‘반쪽’이라고 했었지?”
“예.”
“사실 대부분의 후예들은 전부 나처럼 반쪽짜리라네. 조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뭐 어쩌란 건가. 그것을 다루는 방법도 모르고, 아티팩트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귀한 장신구나 다를 게 없지.”
빙왕은 여의봉의 조각을 소중하게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것을 쓸 수 있으려면 72선술이 필요해. 미후왕을 신격으로 올려 주었다는, 그것.”
연우는 그제야 앞뒤 정황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선술묘학을 발견했다고 소문을 낸 것은…… 칸이었군요.”
“그렇다네.”
조각을 가진 후예들은 다른 조각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조각‘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후예가 되기 위한 다른 조건, 72선술도 필요로 한다.
칸은 바로 이 점을 꿰뚫었다.
선술묘학이 자신에게 있다는 소문을 고의로 퍼뜨리고, 미후왕의 후예들이 모이게 만들었다. 랭커들조차 운신하기 버거워하지만,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한 장소로.
‘그런 곳은…… 20층밖에 없지.’
오행산에서 오랫동안 사두로 살았던 칸으로서는. 이곳보다 알맞은 곳이 없겠지.
결국.
‘쫓기는 건, 칸이 아니라 다른 후예들인 셈인가?’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다.
위험에 스스로 뛰어든 것이다.
그 차이는 너무나 극명했다.
“문제는 후예들뿐만 아니라, 72선술에 관심을 가진 다른 자들도 대거 출몰했단 것이지.”
작게는 새로운 마법 체계를 필요로 하는 여러 마탑들이나, 연금술사 연맹부터.
집 나간 작은 주인을 강제로라도 끌고 가려는 철사자단.
꿍꿍이를 숨기고 참전한 페이스리스와 망자의 함.
“자네도 본 적이 있던 트와이스나 녹턴 같은 여러 용병들, 한탕을 노리는 현상금 사냥꾼들…… 가지각색일세. 완전히 난장판이 된 것이지.”
이런 난장판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겠지.
“결국 이곳에서 사냥꾼은 우리가 아니야.”
빙왕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혈검이지.”
* * *
『개새…… 끼……!』
랭커, 사르디아는 시뻘게진 두 눈으로 적을 노려봤다. 형제 같았던 동료들을 죽인 원수. 죽을 때 죽더라도,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남을 해하려 했으면. 반대로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다는 것쯤은 염두에 뒀어야지.』
촤아악-
휘두른 칼날에 사르디아의 머리가 허공으로 튀었다. 핏물이 콸콸 쏟아졌다.
칸은 얼굴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훔쳤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동작들. 사람들과 싸우는 것도, 그들을 죽이는 것도, 이제는 그에게 너무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일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수거 작업까지도.
칸이 손을 앞으로 내뻗자, 죽은 사체들의 품속에서 여의봉의 조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각들은 칸이 가지고 있던 것과 한 데 뒤섞이면서 조금씩 모양을 갖춰 나갔다.
찰칵, 찰칵-
합쳐진 조각들은 구슬 모양이 되었다. 크기도 제법 커서 어느새 손바닥만 했다.
그만큼 모았으면 뿌듯할 법도 하건만.
정작 여의봉의 조각을 보는 칸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만하면 제법 쓸 만하게 모였군.』
그때. 칸의 뒤쪽으로 그림자가 불쑥 올라오면서 개구진 어린아이의 형상을 갖췄다.
킨드레드. 마군의 두 번째 사도는 탐욕스럽게 웃으면서 조각들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제 모은 조각의 수만 해도 이백여 개가 넘어갑니다.』
칸은 킨드레드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킨드레드는 뒤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칸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정도라면 강신도……!』
『안 돼.』
킨드레드는 칸의 말허리를 가차 없이 끊었다.
『강신? 너는 강신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위대한 천마께서, 98층에 갇혀 지내는 그깟 잡신(雜神)들 따위와 같은 줄 아나?』
잡신. 여러 신과 악마들이 들었다면 대경할 말이었다.
하지만 천마를 추종하는 마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표현이 당연하다는 투였다.
그들에게 유일신인 천마를 제외한 것들은 그저 새장 속에 갇힌 새밖에 되지 않았고, 언젠가 천마께서 깨어나실 날에 잡아먹힐 축생에 불과했다.
잡신들은 사도를 통해, 교단을 통해, 혹은 영육신을 통해 하계로의 강림이 가능하다.
왜냐고? 그릇이 그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마는 달랐다.
강신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넓은 그릇을 필요로 했고, 그것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대신물 중 하나인 여의봉이었다.
그러니 여의봉의 조각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킨드레드가 칸을 통해 조각을 계속 모으게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칸은 탐스럽게 조각들을 만지작거리는 킨드레드의 뒷모습을 보면서,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뒤통수를 치고 싶은지 모른다.
하지만 도일의 신병은 저들의 손에 있었고, 그에게는 당장 도일을 구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러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
마군의 인형이 되는 것.
『왜 치지 않았지? 분명히 네가 원하던 순간이었을 텐데.』
킨드레드는 속이 빤히 보인다는 듯 차갑게 웃으면서 칸을 바라봤다.
칸은 고개를 숙였다.
『전혀 그런 불경한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느끼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재미없는 놈. 그래도 사두로 있을 시절에는 꽤 재미있었는데 말이지, 너.』
『…….』
킨드레드는 피식 웃으면서 조각들을 쓰다듬었다.
『여하튼. 네 말마따나 조각은 이제 제법 많이 모였다. 여기서 몇 개만 더 모은다면 충분히 제기(祭器)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 듯싶다.』
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바라던 순간이 온 것이다.
제기. 여의봉의 조각을 모아 만들려던 그릇.
『이 정도라면 천마의 또 다른 얼굴께서도, 천마의 벗께서도 충분히 만족하시겠지.』
킨드레드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든 감각을 닫은 채, 사두로 지내면서 미후왕의 허물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곳 어딘가에 있을 미후왕의 궁전에 머무는 그분을 모실 수 있다면.
천마가 깊은 잠에 빠져 강신이 어려운 이때. 그를 대신해서 마군을 이끌어 줄 위대한 존재를 모실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마군의 오랜 숙원이었다.
교단이기도 한 그들로서는 모시는 신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킨드레드는 갖은 고생 끝에 미후왕의 허물을 만났어도, 정작 그를 마군으로 모실 수가 없었다.
이미 허물은 궁전과 하나가 되어 버린 상태. 어떻게 데리고 나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킨드레드는 여러 주교들과 머리를 맞댄 끝에, 한 가지 꾀를 내었다.
허물을 밖으로 모실 수 없다면, 허물을 담을 그릇이 있으면 그만.
그래서 여의봉의 조각에 생각이 미쳤다.
대신물의 조각을 모아 제기를 만든다면, 허물을 충분히 수용할 만한 새로운 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군이 보유하고 있는 조각들은 따로 쓸 곳이 있는 바. 다른 조각들을 모아야만 했다.
그때부터 움직인 것이 칸이었다.
현재 도일은 모종의 이유로 신병이 마군에 구속된 상태.
칸은 그런 도일을 구하기 위해서 마군과 거래를 맺었다. 충실한 개가 되겠으니, 모든 임무가 끝난 뒤에는 도일을 넘겨 달라는 내용의 거래였다.
『그러니 좀 더 분발하도록.』
킨드레드는 조각을 모두 회수하고 다시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불에 보듯 뻔했다.
아마 궁전으로 갔겠지. 허물을 다시 회유하기 위해서.
녀석이 사라진 자리에는 피로 적셔진 발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 주변은 온통 죽은 시체들이 흘린 피로 가득했다.
『……미안합니다.』
칸이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은 곧 불어오는 바람에 묻혀 조용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