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미후왕의 후예들 (5)
“……정신 나간 년.”
아나스타샤는 제자의 잘린 팔과 망가진 눈을 치료해 주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빅토리아는 이미 정신력이 다해 곤히 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아나스타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제자가 그동안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죄책감에 젖어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겨우 일상생활이 가능해졌을 때에도 이따금 우울한 모습을 내비치곤 했다.
백 년을 넘게 살면서 뻔뻔해질 대로 뻔뻔해졌던 모습만 보아 왔던 아나스타샤에게는. 수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제자의 옛 모습이었다.
그래서 빅토리아가 칸을 구하러 가야 한다면서 발작하듯이 나서려 할 때에도, 도와주지 않고 독방에 가두기도 했다.
저대로 계속 뒀다가는 정신이 메말라 미쳐 버리고 말 테니까. 아나스타샤는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미친년이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런 꼴이 되고 말았으니.
아나스타샤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곰방대를 입에 물면서 구박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빅토리아.』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모여들더니 사람의 형상을 떴다. 레베카는 조용히 내려앉으면서 빅토리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옛 친구에 대한 위로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빅토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이것아?”
“스, 승님…….”
“못난 년.”
“……죄송해요.”
“아다만틴 노바에다 참 깜찍한 짓을 저질러 놨더구나.”
빅토리아는 차마 아나스타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혹시 만약에 다른 놈들에게 빼앗기기라도 하면 안 되어서…….”
“그래. 그때는 정말 큰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문제는 덕분에 나조차도 골치가 아파졌다는 점이다.”
아나스타샤는 수거한 아다만틴 노바를 확인한 순간,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아다만틴 노바에 각인 주문이 단단히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물건의 귀속 계약. 만약 아다만틴 노바가 아나스타샤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경우, 곧바로 폭발하도록 만든 것이다. 게다가 ‘귀속’이라는 단서가 붙어 버린 탓에 해제를 하는 데도 한세월이 걸릴 터였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지금 저 꼬락서니가 되고 나서도, 계속 칸인지 뭔지 하는 놈팡이를 돕겠다는 것이겠지.’
아나스타샤는 그녀에게 한 소리를 하려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면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후우-
새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나왔다.
“…….”
“…….”
두 사제지간은 한참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나스타샤는 한참 동안 곰방대만 묵묵히 입에 물었다. 그러다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래서.”
“……예?”
빅토리아의 반문. 아나스타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서 그렇게 실컷 부림을 당하고 나니 속이 풀리느냐고 묻는 것이다!”
빅토리아는 쓰게 웃었다.
“조금은…….”
“하아. 호구 같은 년.”
연기가 아나스타샤를 감싸고 돌다가 흩어졌다.
“그래도 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이 이상은 안 돼.”
“하지만, 스승님.”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아나스타샤는 딱 잘라서 말했다. 더 이상의 반항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말을 듣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속박을 걸 것처럼 보였다.
빅토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원하는 대로 시간은 끌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여전히 칸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상태. 그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다른 누군가들과 싸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빅토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아다만틴 노바에 향했다.
아나스타샤는 귀속 각인이 이뤄져서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 말은 당장 저것을 다룰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단 뜻이었다. 아무리 아나스타샤라고 해도 저것을 든 자신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잠깐. 그렇다면 카인의 권속은 저걸 어떻게 다룬 거지……?’
처음에는 귀속 각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강한 의문이 들었지만, 빅토리아는 잠시 의문을 뒤로 하고 저것을 어떻게 해야 발동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우선 몸부터 내뺀 뒤에 임시 단말을 제작할 수 있다면……!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제자를 보면서 도끼눈을 뜨려 했다.
그때.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연우가 방문을 열면서 불쑥 나타났다. 뒤따라 빙왕이 조금 어색한 미소를 흘리면서 따라왔다.
“그놈은 왜 안 죽이고 데리고 온 거지? 분명히 목을 잘라서 철사자단이 있는 쪽으로 보내라 했을 텐데?”
아나스타샤의 힐난.
빙왕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불쾌해하든 말든 아나스타샤는 연우가 빙왕을 데리고 온 것을 보고 버럭 화를 냈다. 사실 빅토리아를 가장 크게 다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빙왕이었으니까. 그녀로서는 이가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저희에게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무엇을 믿고?”
“맹약을 맺었습니다.”
악마의 이름을 두고 맺은 영혼 서약을 말하는 것이다. 계약 내용을 위반할 시에 영혼이 악마에게 팔린다는 내용의 서약.
빙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목이 달아날 기세였으니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표정에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잔뜩 묻어났지만.
“여하튼. 그래서?”
“이번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말?”
아나스타샤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빙왕은 했던 말을 또 똑같이 해야 하냐는 생각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앞으로 나서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선술묘학을 둘러싼 쟁탈전의 이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의봉’과 ‘미후왕의 후예’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아나스타샤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천 년을 살아온 만큼, 탑이 가진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그녀도 언젠가 한 번쯤 여의봉의 조각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미후왕이 남긴 별 이상한 유희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 아나스타샤는 아까 전부터 한쪽 구석에 잠자코 서 있는 프레지아를 돌아봤다. 저 말이 전부 맞냐는 무언의 질문.
프레지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다는 듯 계속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이 못난 년만 당한 셈이로군?”
빅토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대답한 것은 연우였다.
“그건 아닐 겁니다.”
“조각인지 뭔지를 모으기 위해서 혈검 녀석이 함정을 판 거라며? 이년은 거기에 놀아난 거고.”
“칸은 이용당하고 있는 겁니다.”
연우는 빙왕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부 들은 뒤, 여태껏 칸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
첫 번째 단서는 편지가 소각되고 나서 남은 재가 그리던 글씨. 그 모양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도와줘.
튜토리얼에서, 위기에 빠질 걸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아랑단으로 향했던 게 칸이었다. 그런 녀석이 말했다. 도와달라고.
사실 지금 돌이켜 보면, 칸은 미후왕의 궁전에서부터 그에게 꾸준히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72선술이 새겨진 석비를 봤을 때. 칸은 그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사람처럼. 무언가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몇 번이나 연우에게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고개를 털며 돌아섰다.
연우는 그걸 알면서도 내버려 뒀다. 아직은 아닌가 보다 하고 여겨서. 언젠가 칸이 속마음을 털어놓아 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자신의 무른 태도가 너무 안일한 짓이었다면.
그렇다면. 칸이 말하는 ‘도와달라’는 대상은 그가 아닐 것이다.
-나, 그놈이랑 갈라선 지 꽤 오래됐어.
오래전에 헤어진 동생 같은 녀석.
‘도일.’
그 아이를 도와달라는 것이 아닐까.
[아테나가 슬픈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때, 타르타로스를 나오고 나서 오랜만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동정하지 마십시오.’
연우는 그런 시선을 거부했다.
[아테나가 슬픈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연우는 아테나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가진 생각을 털어놓았다.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뭘 믿으란…….”
“안 믿으셔도 됩니다.”
아나스타샤의 한쪽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어이없다는 눈빛.
“뭐?”
“이해하시라고 한 말이 아니니까요. 전 빅토리아를 설득하러 왔을 뿐입니다.”
연우는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노려보건 말건 간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빅토리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제가 한 추론은 추론일 뿐입니다. 하지만 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빅토리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맞…… 다고 생각해.”
“그리고 아마 칸을 겁박하고 있는 곳은 마군일 겁니다.”
빅토리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칸은 그녀를 만났을 때 도와달라는 말만 했을 뿐,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아는 칸은, 소중한 이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칸을 도우려면 지금 여기 있는 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군과도 싸워야 합니다. 어쩌면 여기 있는 랭커들의 배후와도 계속 척을 져야 할지도 모르죠.”
아홉 왕이 아니고서야, 거대 클랜인 마군과 전쟁을 치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서겠다고 한다.
빅토리아는 재빨리 자신에게 남은 마력을 검토했다. 다행히 아나스타샤가 심어 준 요력 덕분에 회복이 꽤 많이 된 상태.
다시 싸우기엔 버겁긴 했지만, 그래도 보조를 할 정도는 되었다. 그녀는 연우가 당연히 도와달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나스타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쌍심지를 켜면서 곰방대에서 입술을 떼려는데.
“빅토리아는 여기에 남아 주십시오.”
“……뭐?”
전혀 뜻밖의 말.
“지금 다친 몸인 빅토리아가 나선다면 오히려 더 위험해집니다.”
쉽게 말해 방해가 되니 여기에 남아 있으란 의미였다. 연우가 이걸 굳이 언급하는 이유도 간단했다. 연우가 조용히 사라진다면, 분명 미련이 남아 뒤를 쫓으려 할 테니.
“…….”
빅토리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방해만 될 거란 사실이. 무력하기만 했던 오행산에서의 일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며 자취를 감췄다. 금방 칸을 데리고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 * *
“……스승님.”
“멍청한 년.”
연우가 떠난 자리.
빅토리아는 이를 악물면서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별다른 말 없이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하나밖에 없는 수제자였기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빅토리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빅토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윗도리를 걸쳤다. 힘차게 뛰어나가는 그녀를 따라 아다만틴 노바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가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그 모습이 마치 궤적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는 것 같았다.
“저렇게 보내도 되겠어? 네가 처음으로 정을 준 아이잖아.”
여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던 프레지아가 물었다. 나무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 표정을 알 수 없지만, 눈동자가 둥근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프레지아의 태도에 영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와락 구기면서 신경질적으로 곰방대를 깊게 빨았다.
“제 놈 일은 제 놈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언제까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해?”
“많이 달라졌어, 아나스타샤.”
“누굴 닮아서 저렇게 멍청한 건지. 쯧! 사두니 뭐니 하는 이상한 짓거리를 한다고 할 때부터 말렸어야 했어.”
하지만 거친 말투와 다르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제자 이기는 스승 없는 법이지.”
후우-
자욱하게 퍼지는 연기 사이로. 아나스타샤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애정에 눈이 먼 여자만큼 무서운 것도 없는 법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