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미후왕의 후예들 (8)
칸은 앞으로 달리다 말고 갑자기 눈앞으로 뭔가가 홱 하고 떨어지자,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처음에는 적의 공격이라고 생각해 검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지
『안녕?』
나타난 것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붉은색 바탕에 검은 깃털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신조(神鳥), 11층에서나 볼 수 있을 환수였다.
하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말투가 많이 어렸다.
『난 니케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주인…… 아니 아니, 연, 아니지. 카인의 전언을 들고 왔는데 들어 볼래?』
뜻밖의 이름. 칸의 눈동자가 저절로 커졌다.
* * *
“폐관 수련이 조금 더 길어질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런가.”
크로이츠는 1단에서 돌아온 대답을 듣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연대장이 겪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벽.
그 하나의 차이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또는 좌절과 절망을 겪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수월하게 통과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평생을 붙잡아도 결국 그것을 뛰어넘지 못한 채 눈을 감기도 했다.
벽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크로이츠도 뛰어넘고자 몇 번씩이나 애썼지만, 결국 넘지 못했던 것.
하지만 저 위대한 ‘아홉 왕’들은 한 번씩, 많게는 서너 번씩 뛰어넘은 것이기도 했다.
‘초월(超越)’이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컸다.
그래서 연대장은 곧 폐관 수련을 끝낼 수 있을 거라던 기존의 발언을 철회하고,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보내왔다.
아마 실마리를 더듬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제대로 닿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대신에 답변으로 이것을 보내 오셨습니다.”
“고맙군.”
“전 그럼.”
1단에서 보낸 플레이어는 크로이츠에게 편지를 전해 주고, 고개를 숙이면서 조용히 사라졌다.
크로이츠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 안쪽에 담겨 있는 종이를 꺼내 활짝 펼쳤다.
뜻한 대로
오랜 기다림 끝에 받은 답장치고는 너무 짤막한 대답.
크로이츠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여전하시군.”
하지만 덕분에 크로이츠는 그동안 복잡했던 머릿속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사실 크로이츠가 연대장에게 물은 질문이 있었다.
-계속 이대로 독식자의 뒤를 따라야만 하는가?
크로이츠가 봤을 때, 연우는 너무 위험한 자였다.
벤티케와의 싸움은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신흥 강자들 간의 신경전이 세력전으로 비화된 경우였으니. 먼저 시비를 건 것도 벤티케와 트리톤 쪽이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알 수 없는 이유로 30층의 히든 스테이지를 통과하더니, 결국 타르타로스까지 다다라 하데스를 만나는 기괴한 짓을 벌였다.
식탐황제를 만나서는 화이트 드래곤과 전쟁을 치르겠다는 약조를 나누기도 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새 20층에서 커다란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란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독식자가 있다더니. 그런 소문이 절대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몸소 체감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다.
본래 떠오르는 신흥 강자는 주변으로부터 여러 견제를 받기 마련이고, 강함을 추구하는 플레이어라면 보통 가만히 있지 않고 충돌을 벌이는 법이니.
문제는.
‘그가 가진 힘.’
크로이츠는 줄곧 연우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가 가진 힘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이상한 그림자를 부리고, 망령을 다루는 군주로서의 자질.
무왕으로부터 무공을 배워 명인 급에 달하는 검술 실력을 자랑하는 초인으로서의 재능.
또한, 여러 신들로부터 한꺼번에 총애를 받는 사도의 가능성까지.
군주, 초인, 사도. ‘초월’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척해야 한다는 세 가지 특성 중,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 안에는. 여태껏 크로이츠도 보지 못했던 죽음의 힘이 담겨 있었다. 필멸자인 플레이어가 정말 다룰 수 있는 것이 맞는가 싶은 힘이.
위험해도 너무 위험한 것이다.
‘가까이하기에는.’
크로이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닐 거란 말이지. 독식자는, 위험해.’
연대장은 독식자가 자신의 절친한 벗이며 은인이라고 말하면서, 되도록 그가 하는 일들을 긍정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당부했다. 크로이츠도 그동안 연우가 환상연대의 수뇌가 되거나, 아니더라도 굳건한 동맹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여태 파악한 대로라면. 연우와 손을 잡았을 때, 환상연대가 받을 압박이나 피해는 너무나 클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고층 구간으로 가지 않고 저층 구간에 머물렀던 이유가 무엇인가.
8대 클랜의 이목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비밀리에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단 한 사람 때문에 그런 기조를 깰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환상연대는 연대장을 중심으로 뭉쳐진 세력이었고, 크로이츠는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연대장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라고 하면, 진짜 그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의견을 구할 겸 해서, 폐관 수련에 몰두하고 있을 연대장에게 연통을 넣은 것이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이 바로 저것이었다. 뜻한 대로.
자신의 의견을 굳이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동료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고, 다른 의미에서 보면 책임을 미루는 조금 무책임할 수도 있는 듯한 태도. 크로이츠가 평소 보던 연대장, 그대로였다.
그래서 크로이츠는 편지를 붙잡으면서 다시 깊게 생각에 잠겼다.
원래 자신이 뜻하던 대로라면, 더 이상 연우에 대한 지원을 끊어야 했지만.
‘그래도.’
섣불리 결정을 내리려니 그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들이 떠올랐다. 망자의 강에서부터 타르타로스까지. 그의 역정은 험난하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끌어당기고 휘어잡는 강한 뭔가가 있었다. 흔히 말하는 ‘왕’의 자질이랄까.
그러면서도 하데스 앞에서 간절히 퀴네에를 바랄 때에는 말 못할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는 듯했다.
불을 품은 사내라.
그런 사람이라면 따라가서 그 뒷모습까지 보고 싶기 마련이니. 설사 불나방처럼 타오르는 자리라 해도 말이다.
가까이하기엔 두렵지만, 그렇다고 멀리하기엔 가까이서 보고 싶은 자.
그런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소름 끼치게 연대장과 똑같군.’
아니,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연대장의 노림수가 아니었을는지.
결국 모든 생각을 정리한 크로이츠는 편지를 곱게 접어 품속에 넣고, 밖에 있는 수하를 불렀다.
“쿤!”
“예. 부르셨습니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독식자는 아직 20층에 있나?”
“그렇습니다.”
“기사단을 전원 모아라. 20층으로 간다.”
“예!”
그렇게. 환상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시뻘건 피가 낭자한 산등성이.
널브러진 시체들이며 곳곳에 파괴된 흔적들이 거친 격전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괴물 같으니.”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도무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괴물이라는 단어에 그들은 모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는 두려움마저 감돌고 있었다.
하아.
하아.
연우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몰골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많은 플레이어들을 상대하다 보니 체력과 마력이 거의 방전되다시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기세는 여전히 살벌했다.
누구든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오면 바로 목이 달아날 것 같은 분위기.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압도적인 머릿수를 자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연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연우가 보여 줬던 무용은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발을 꽁꽁 묶고 있는 중이었다.
연우의 기습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클랜이 몇 개이며, 쓰러진 사람이 몇이던가. 거기다 여러 개의 산등성이를 넘는 추격전 동안에 기백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야만 했다.
더구나 이따금 그림자를 열고 나타나는 괴상망측한 괴물들은 더더욱 그들을 궁지로 몰았으니.
어쩌면 독식자가 이미 ‘군주’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진실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고 말았다.
혼자서 일인 군단을 형성해 웬만한 클랜들은 쉽게 압도한다는 군주.
거기다 독식자는 무왕의 제자로서 ‘초인’의 반열도 노려본다고 알려져 있으니.
일대일로 승부를 걸든 아니면 협공을 하는 어떻게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뭔가가 더 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연우가 아직 본신의 힘을 전부 다 드러낸 게 아니란 것을.
아무리 실력의 3할은 숨겨야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격전이 벌어졌는데도 숨긴 게 확실하다면. 계속 싸움을 벌여 봤자 불리한 건 그들이었다.
거기다 연우를 돕는 붉은 신목과 빙왕도 손꼽히는 강자들. 어떻게 저들 사이를 꿰뚫을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공격하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한참 동안 대치 상태를 유지하는데.
“오지 않는다면.”
연우가 살벌하게 눈빛을 폈다.
“내가 가지.”
어느 정도 숨이 돌아왔는지 조금 편한 목소리로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주춤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피식.
빙왕이 그 모습을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웃기기보다는 안쓰러운 감정에 가까운 웃음.
선봉에 서 있던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만회하고자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때.
피유웅, 퍼엉-
갑자기 하늘을 따라 폭죽이 터졌다. 붉은색 폭죽.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후퇴 명령이었다.
리더들은 이렇게 자리를 떠야 하나 잠시 갈등 어린 얼굴이 되었지만, 이대로 있어 봤자 남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전원, 철수한다!”
플레이어들은 물러나는 동안에도 혹시 연우 등이 달려들까 싶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빙왕은 그들이 모두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갑자기 왜 물러난 걸까? 나야 이제 좀 쉴 수 있으니 좋긴 하네만.”
빙왕은 잘게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온통 피투성이에 자잘한 상처가 많은 손. 이렇게 거칠게 싸움을 벌여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분명히 은퇴를 하기 전, 그러니까 처음 무왕과 만났던 때 이후로 없었던 것 같은데.
늙은이를 참 잘도 부려 먹는구만. 빙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쓰게 웃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연우의 편을 들긴 했지만, 그래도 간만에 이렇게 날뛰니 기분이 상쾌했다. 나이를 먹어도 무인이긴 무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나이를 먹은 만큼 빨리 지친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여기서 더 싸움이 길어졌다면? 가장 먼저 쓰러진 건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안색이 좋지 않은 건, 빅토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부상이 덜 나은 몸으로, 아다만틴 노바에만 의지한 채 룬 마법을 계속 펼쳐야 했던 그녀로서는 부담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마력도 바닥이 나 잠력을 끌어 올리면서 싸우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녀도 갑작스러운 저들의 후퇴가 내심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싸움이 길어졌으면 정말 위험한 건 자신들이었으니.
빅토리아와 빙왕은 연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연우도 지친 것은 마찬가지라,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으면서 숨을 골랐다. 과열된 현자의 돌이 가라앉으면서 마력을 공급했다. 그러면서 내뱉은 말은 두 사람을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저들이 물러나는 건, 칸을 찾아서일 겁니다.”
“칸을 찾았다고?”
빅토리아가 화들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짧게만 보고 스쳐 지나야 했던 얼굴. 그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희망이 가슴 속에서 부쩍 자라났다.
“예. 일단은.”
“어디야, 거기가?”
“빅토리아도 잘 알고 있는 곳입니다.”
“내가?”
빅토리아는 그런 곳이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행의 산 자체가 그녀에게는 아주 익숙한 장소이긴 했다. 하지만 연우가 말할 곳이라면?
“설마?”
어느 곳에 생각이 미친 빅토리아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연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후왕의 궁전입니다.”
“……!”
지잉, 지이잉-
아다만틴 노바를 쥐고 있는 빅토리아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아다만틴 노바가 놓으라며 길게 몸을 떨었지만, 빅토리아는 도무지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당시에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위압적이던 거대 석상의 움직임. 레베카의 죽음. 연우의 희생. 칸과의 도주. 그리고 혼자만 남은 도망.
그녀에게 심마를 안겨 줬던, 그곳이 목적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꽈악.
빅토리아는 잘게 떨리던 아다만틴 노바를 다시 고쳐 쥐었다.
여전히 그곳에 가는 것이 두렵긴 하지만, 그래도 칸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가야만 했다. 굳건한 신념이, 그녀의 눈가에 깃들었다.
연우는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에도 그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면 가차 없이 내칠 생각이었다. 여차하면 아다만틴 노바를 빼앗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 여러 격전을 치르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이 흐트러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다만, 이야기의 화제를 따라가지 못하는 빙왕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후왕의 궁전? 그곳은 또 무엇인가?”
연우는 자신이 겪은 미후왕의 궁전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빙왕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72선술이 나온 곳이다?”
“예. 제가 여의봉의 조각을 얻은 곳이기도 합니다.”
“미후왕의 사당과 비슷하군.”
미후왕의 사당?
빙왕의 혼잣말에 연우가 의문을 떴다. 빙왕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런 곳이 있네. 탑 외 지역에 위치한 사당이지. 정확하게는 칠대성의 사당이었지만, 그냥 후예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불린다네. 평소에는 외부인들더러 들어오지 말라고 결계에 싸여 있지.”
연우는 처음 칸의 흔적을 찾았던 곳을 떠올렸다.
“혹시 칠대성의 석상이 서 있는 허름한 곳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만. 그곳을 알고 있나?”
“예.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만…….”
“그야, 거긴 이미 털릴 대로 털렸으니까. 유명하기도 하고. 남아 있는 건 거의 없을 걸세. 있다 해도, 사실 연자에게나 열리는 법이라.”
연우는 어째서인지 빙왕이 씁쓸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쪽짜리 후예. 거기서 받는 자괴감인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역시 미후왕은 자신의 거처를 한두 군데에다 놔둔 게 아니야.’
미후왕의 궁전을 나올 때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었다.
미후왕의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이곳만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 허물도 말하지 않았던가. 미후왕은 자신의 후계를 두기 위해 곳곳에 은밀히 손을 써 두었다고.
연우는 나중에 사당을 제대로 다시 한번 들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들렀을 때에는 그냥 쫓기듯이 간 게 전부였으니. 놓치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었다.
“하여간.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런 곳이 있다면, 혈검은 왜 굳이 거기로 가려는 걸까?”
“그야 이유는 간단합니다.”
“……?”
“그곳이 이번 일을 꾸민 마군의 본거지일 테니까요.”
여태 은밀하게 움직이던 칸이 드러내 놓고 움직인 이유는 딱 하나. 그곳이 최종 목적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곳은.
‘도일이 있는 곳이기도 하겠지.’
연우의 안광이 예리하게 빛났다.
* * *
연우 일행은 짧은 휴식을 뒤로 하고, 곧장 다섯 번째 산인 오행산으로 이동했다.
연합이 먼저 도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그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포위망이 구축되기 전이었다. 아니, 포위망을 구축하기도 힘드리라. 이곳은 랭커들도 접근하기 힘들어하는 장소였으니.
모든 감각이 닫혀서 의념만 열어야 하는 곳.
연우는 모든 의념을 활짝 열어 미후왕의 궁전으로 향하는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이전에 찾았던 입구는 연우가 궁전에서 유산을 얻고 나오면서 남들이 다시는 접근할 수 없도록 고의로 무너뜨린 까닭에, 새로운 입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때 벌였던 인성질이 이런 수고로 돌아온 거지. 암, 그렇고 말고.」
‘좀 닥쳐.’
깐족대는 샤논에게 한 소리를 하던 중, 연우는 칸의 뒤를 쫓았던 니케의 도움을 받아 입구를 찾을 수가 있었다.
[히든 스테이지, ‘미후왕의 궁전’에 입장했습니다.]
던전이 아닌 히든 스테이지.
바뀐 명칭에 연우가 눈을 크게 뜰 무렵.
저벅.
기다렸다는 듯이 입구 안쪽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걸어 나와 연우 일행을 맞았다.
『너……?』
『오랜만이야, 카인.』
칸이 반갑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