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34화 (334/862)

9화. 미후왕의 후예들 (9)

『칸!』

빅토리아가 다급하게 뛰어 와락 칸에게 안겨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그대로 칸의 몸을 지나치고 말았다.

『이건……?』

『환영입니다. 녀석이 남긴.』

연우는 흐릿해지는 칸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72선술을 이용한 환영술이라. 편지에 남겼던 트릭도 그렇고, 선술에 있어서만큼은 칸이 이룬 성취가 연우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았다.

칸의 환영은 쓰게 웃으면서 자세를 낮춰 빅토리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괜찮아, 누님?』

『너……!』

『그때는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서 미안. 그래도 내가 정말 인복은 타고났나 봐? 도와 달라는 말 한마디에 발 벗고 나서 주는 친구들도 있고.』

칸은 평소의 녀석처럼 밝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연우를 돌아봤다.

『일단. 킨드레드 녀석이 금방 눈치챌 수 있을 테니, 용건만 간단하게 말한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니케를 통해서 들었지?』

『그래.』

니케는 현재 칸과 같이 있었다. 연우는 그런 니케를 통해 칸이 처한 상황과 내막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제기(祭器). ‘그릇’을 둘러싼 여러 이면의 싸움. 도일이 마군에 의해 억류되어 있고, 칸이 녀석을 구하기 위해 그동안 열심히 뛰어다녔던 내용들까지.

여태껏 말 못 할 사정들로 인해, 칸은 너무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니케를 통해 몇 가지 계획을 입안해 둔 상태였다.

『이렇게 환영을 남긴 건, 부탁 할 게 있어서야.』

『뭐지?』

『그건…….』

칸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 * *

『여기란 말이지.』

아이반은 동굴 입구에 서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무저갱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할 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곳. 의념을 쏘아 넣어도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예. 분명히 이곳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조나단이 옆에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은 아이반의 지휘 아래, 곳곳으로 분산되어 있던 인력을 전원 철수시켜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연우가 칸의 소재지에 나타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연우의 목적이 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두 사람이 한자리에서 만났을 때에 들이쳐서 단숨에 신병을 확보하는 게 옳다고 여긴 것이다.

여기에 대해 페이스리스나 닥터 둠 등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로서는 선두에 나서서 전력을 이끌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녹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반은 협조를 하는 것도,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닌 무성의한 그들의 태도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럼, 진입한다.』

그래도 아직 책잡힐 일을 하지는 않았기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런 건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연우와 칸을 모두 잡는 데 집중해야만 했다.

때마침 알아서 자기들끼리 좁은 우리에 갇혀 줬으니 잡기도 쉬울 터였다.

아이반의 지시에 따라, 최정예로 선발된 삼백여 명의 플레이어들이 전열을 갖추면서 동굴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츠츠츠-

『꽤 불길한데.』

『이런 곳이 있었던가?』

플레이어들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의념으로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곳. ‘나’나 가까이에 있는 동료 외에는 감지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마치 깊은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공포심을 절대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그들이었건만.

왠지 모르게 가슴 속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수장, 괜찮겠습니까?』

그때, 닥터 둠의 뒤쪽으로 로브를 깊게 눌러쓴 마법사가 조용히 다가와 입술을 달싹였다.

현재 아이반이 추린 최정예 중에는 마법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네크로폴리스 소속의 흑마법사뿐만 아니라, 각 마탑에서 보낸 최고 전력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마법사가 가진 약점인 기습이나 근접전에까지 강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런 어둠이 가득한 히든 스테이지에서는 크게 움직이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을 정도였다.

지금 마법사들이 봤을 때, 연우와 칸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이 동굴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탐지 마법을 아무리 뿌려 봐도 허공에서 사라지기만 할 뿐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동굴 깊숙한 곳은 이따금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계속 이대로 의념을 쏘아 보냈다가는 영혼까지 송두리째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세상의 근원을 탐구하는 마법사이기에, 그들은 저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공허.

혹은 허무라고 불리는 공간.

아니, 그건 공간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집어삼키기만 하는 곳이니.

어째서 연우와 칸이 저곳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대로 계속 공허 쪽으로 다가가서는 그들도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늘의 패에 악운은 없었다.』

『그럼…….』

『하지만 그렇다고 복행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닥터 둠의 눈동자가 강렬한 안광을 뿌렸다.

『결국 오늘의 괘는 우리가 뜻한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술이 없으면 앞으로는 그런 괘도 없다.』

『……예.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법 학계는 학파에 따라서 갈라졌다가 합쳐지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여기에 따라 각광을 받는 곳은 마탑으로 거듭나게 되니,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걷는 길이 진정한 ‘진리의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마탑들은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힘을 하나로 합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근자에 벌어진 여러 사건에서 마탑이 계속 큰 피해를 입으면서, 새로운 세력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결과였다.

그래서 각 마탑들은 각각 정예를 차출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네크로폴리스. 그리고 수장 자리에 모든 마법을 두루 익힌 닥터 둠을 앉혔다.

‘하지만 오히려 새롭게 발돋움하려는 지금이 더 위험하다.’

이미 세분화된 마법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건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체계도 지식도 기반도, 전부 다 달랐다. 공동 전인인 자신마저도 주력 마법을 흑마법으로 둔 이유가 그것이었다.

이런 한계점을 넘으려면 새로운 지식을 필요로 했다.

닥터 둠이 봤을 때는 그게 선술이었다. 한계점에 부딪친 마법을 다시 도약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카드.

‘파우스트의 마도술(魔道術)이라도 돌아오면 또 모를까.’

드 로이의 악마학과 함께 마법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전해지는 체계.

악마이자, 괴물왕이었다던 메피스토펠레스까지 집어삼켰다는 내력이 있지만, 지금은 그의 갑작스러운 실종과 함께 과장된 전설로만 전해지는 힘.

닥터 둠이 수시로 체크하는 ‘괘’의 원형이자, 언젠가 이루리라 다짐한 비원(悲願)이기도 했다.

『설사 선술을 놓친다고 해도, 저들에게 내어 줄 수도 없는 노릇.』

닥터 둠은 뭐가 그리 좋은지 아까 전부터 나사 빠진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는 페이스리스와, 여전히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녹턴을 번갈아 봤다.

보통 연합에 가담한 플레이어들이 선술을 원하거나 명예를 추구하는 데 반해, 저 둘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알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더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수많은 인격을 강제로 욱여넣은 듯한 페이스리스는 닥터 둠이 생각하는 가장 경계해야 할 요주의 인물이었다.

『음?』

닥터 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동굴 안쪽을 탐색해 볼 요량으로 마법을 전개하려다가, 크게 눈을 뜨고 말았다.

『……뭐지?』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 어디에도.

『괘에 이런 것은 없었을 텐데?』

분명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수하도 사라지고 없었다. 감지되는 것은 온통 짙은 어둠뿐. 동굴 안쪽에서부터 줄줄 새어 나온 공허가 그의 주변을 가득 맴돌고 있었다.

그 순간.

『흡!』

닥터 둠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반대로 돌렸다. 허공에 마법진이 잇달아 그려지면서 어둠을 타고 날아오던 공세를 파훼시켰다.

퍼어엉-

하지만 너무 충격파가 대단한 나머지, 닥터 둠은 피해를 모두 막아 내지 못하고 단번에 튕겨 나고 말았다.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입가를 따라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력이 빠르게 돌면서 늑골이 달라붙고, 뒤로 돌아갔던 팔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닥터 둠의 얼굴에는 경악이 스쳤다. 대체 어느 새?

「그걸. 그새. 읽었나? 제법. 이군.」

그때, 아무것도 없을 허공 한가운데에 두 개의 사선이 쭉 그어지더니, 활짝 열리면서 푸른 눈이 드러났다.

「타종(他種)의. 심. 장 각인과. 세피로트 카발라. 신비연학. 종. 의 역기원. 위천. 을. 이용한. 무영창. 인가. 그것.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 다니. 세상이. 발전. 했나?」

닥터 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방금 전 언급된 것들은 전부 그의 시그니처 스킬인 무영창 마방진을 가능케 하는 구성 원리였다. 그런데 그것을 단번에 알아봤다고?

게다가. 저 하늘에 맺힌 인페르노 사이트를 마주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이 새하얗게 세고 말았다.

‘그것’이었다.

30층에서 연우의 싸움에 난입했을 무렵. 그의 마력과 마방진, 그리고 괘를 전부 강제로 구속시키던 그 눈!

그 순간 깨달았다.

삼백여 명도 넘는 인원들을 공허에 유폐시키고, 지금 자신을 격리시킨 장본인이 저 괴물이란 것을.

『너, 대체 뭐지……?』

「아닌. 가. 그렇군. 너. 돌연변이. 로구나.」

역시나 비밀을 또 들켰다. 닥터 둠은 떨리는 손을 다잡으면서 억지로 손가락을 튕겼다. 화려한 이펙트가 터지면서 그를 중심으로 십여 개의 마방진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인페르노 사이트는 가늘게 좁혀지면서 중얼거렸다. 마치 재미나게 개미 집을 살펴보려는 아이처럼.

「나를. 모방하려 한. 장난감. 이구나. 재미있군. 건방. 진 것들.」

『……!』

뭐?

누구를 모방해?

「주인. 님의 행사를. 방해한 죄를. 물으려 한 것에. 그 건방의. 대가까지. 더하마.」

인페르노 사이트가 몇 배나 크고 거칠게 타올랐다.

「어디. 한번 볼까?」

콰아아앙-

닥터 둠은 자신을 둘러싼 공간이 강제로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이미 사지가 죄다 뒤틀려서 튕겨 나가고 있었다. 그를 둘러싸던 마방진은 모조리 부서져 작은 입자로 변해 있었다.

‘저건…… 아니 저분은, 분명……!’

부의 정체를 눈치챈 뒤, 육체가 받은 고통보다 정신적 타격을 더 크게 입은 닥터 둠이 부에게 한껏 유린되는 동안.

비슷한 광경은 동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꿈이…… 저문다.』

상공에 올라선 네메시스의 시동어에 따라.

공허가 짙게 내려앉으면서 적들을 모두 유폐시키고, 별도로 격리해 각개 격파를 노렸다.

이곳은 미후왕의 궁전. 입구부터 중앙 공동까지 전부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건 연우가 유일했다. 이곳에 공허가 항상 감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파 놓은 함정이었다.

『크아아악!』

『이게 뭐야!』

『아악! 살려 줘!』

가뜩이나 갑작스러운 격리로 방황하던 플레이어들은 어둠을 뚫고, 괴이들이 잔뜩 쏟아지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콰드득, 콰득-

플레이어들이 삽시간에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저항을 해 보려 해도, 공허 속으로 숨었다가 다시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고 달려드는 괴이를 잡을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었다. 상처를 입는 순간, 중독으로 인해 사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달그락, 달그락-

딱딱딱!

크허허헝-

갑자기 곳곳에서 무저갱이 열리기 시작했다. 잿빛 안개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싶더니, 뒤따라 음울한 뭔가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스켈레톤과 구울, 좀비 등으로 이뤄진 여러 언데드들. 그것도 단단한 창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사자 군단(死者 軍團:群團)이었다.

[던전 개방]

여태껏 비밀리에 숨겨 두고만 있던 부의 던전이, 드디어 입구를 활짝 연 것이다.

『이게 대체 무엇이야……!』

아이반은 끈적끈적하고 집요하게 달라붙는 빌어먹을 어둠을 강제로 찢어 버렸다. 하지만 그 뒤에 나타난 것은 기괴하게 날뛰는 괴이들과 도저히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동굴을 가득 채운 언데드 해일이었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 인상을 굳히면서 오레를 터뜨리려 했지만.

츠츠츠-

그때, 찢겼던 공허의 파편들이 한데 뭉치더니 한껏 크기를 부풀리면서 거대한 형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드러난 모습은 여러 전장을 전전한 아이반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쿵!

검고 붉은 반점이 얼룩덜룩하게 묻어 있는 앞발이 지면을 세게 내려찍자 동굴이 들썩였다. 뼈마디 몇 개와 찢어진 피막으로 이뤄진 앙상한 날개가 활짝 펼쳐지자 지독한 독기가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비록 뼈밖에 남지 않은 초라한 몰골이었지만, 기세만큼은 생전의 위용을 쏙 빼닮아 있었다.

크롸롸롸!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본 드래곤이 크게 포효를 내질렀다. 드래곤 피어가 퍼졌다.

* * *

[주변 지역이 권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상태: 공허(네메시스)]

[‘저주: 방황’이 성공했습니다.]

[‘저주: 공포’가 성공했습니다.]

[‘저주: 광기’가 성공했습니다.]

[‘저주: 환영’이 성공했습니다.]

……

[권능 ‘무면목 법서’가 발동하였습니다.]

[혼돈이 크게 기뻐합니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역시. 넌 달라!]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내 것도 한번 써 보라고. 더 괜찮은 그림이 나올걸?]

[권능 ‘흉신악살’이 발동하였습니다.]

[저주가 강화되었습니다.]

[저주가 강화되었습니다.]

……

[모든 죽음의 신들이 당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당신을 보며 휘파람을 봅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당신에게 깊은 호의를 드러냅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기꺼워합니다.]

[‘절교’의 비마질다라가 당신을 유심히 살펴봅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당신을 다시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기존보다 훨씬 더 많은 악마들이 당신에게 권능을 제시합니다.]

[권능 예정 목록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현재 가능한 권능 수: 5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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