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미후왕의 후예들 (10)
[아테나가 침묵합니다.]
연우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메시지를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던전 개방.
여태껏 부를 통해서 준비해 놓기만 했지,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던 던전이 이번 기회에 드디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네메시스가 끌어온 공허를 바탕으로 적들은 단체로 패닉 상태에 빠졌고, 괴이들이 날뛰면서 공포에 더 크게 부채질했다.
여기에 던전이 더해졌으니. 커다란 폭탄을 머리 위에다 투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골 병사들은 삽시간에 적들을 밀어 내면서 죽이고, 또 죽였다.
절벽까지 내몰린 용병들이 내뿜는 마이너스 에너지는 고스란히 공허에 녹아들고, 부의 에너지로 치환된다.
그럼 부는 더 많은 해골 병사를 뽑아내어 적들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니.
가장 걱정했던 아이반도 본 드래곤이 착실하게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 위에 샤논이 올라타고, 망령 군단이 뒤를 따르면서 마력이 부족해질 때마다 더해지니 지구전으로 간다면 이쪽이 유리했다.
‘아직 미완성이라 우려하기도 했었는데. 이 정도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성과야.’
[망령을 획득했습니다.]
[망령을 획득했습니다.]
소모된 망령 수만큼 새로운 망령들이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사실상, 전장 전체가 부의 손바닥 위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반을 비롯한 연합이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어 이런 함정을 파 뒀던 것인데. 그동안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주지 않고 있었던 것도 주효했던 셈이다.
‘권능의 목록 수도 부쩍 늘어났고. 대부분이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보낸 건가? 나중에 천천히 확인해 봐야겠어.’
이미 4개의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숙련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추가적으로 더 권능을 알아볼 때가 되었다.
사실 그동안 연우는 이 이상으로 권능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목록 수가 조금씩 늘어나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들을 전부 수용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권능을 받아들이면 원주인의 간섭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재능이 깊어지고, 육체도 탄탄해진 이때. 이제는 추가적으로 권능을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권능에는 신과 악마의 정체성이 담겨 있으니까.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큰 성장에 다가갈 수 있다. 원주인의 간섭이 있긴 하지만.
‘차라리 더 많은 권능을 받아들여서 다른 신과 악마들이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이미 칠흑왕이라는 존재로 인해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관심을 두고 있다.
권능이 있건 없건 간에 자유로운 행동에는 일부 제약이 걸린 셈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된 마당에 저 모든 것들을 다 받아들여서, 서로 견제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누구 하나가 나서려 한다면 다른 신과 악마들이 나서서 막아 줄 테니.
따지자면, 발상의 전환인 셈이었다.
그렇게 500개도 훨씬 넘는 권능 목록을 확인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역시 이쪽에 선 게 현명했어.』
빙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이었다. 그가 연우를 보자마자 꼬리를 말았던 이유.
사실 따지고 보면 빙왕은 연우와 실력 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을지 몰랐다. 하지만 적으로 돌아서면 어떻게 될지 짐작하고 있었다. 녀석의 사부, 무왕이 딱 저랬으니까.
‘아니. 소싯적의 무왕보다 더 독하다고 해야겠지.’
적으로 삼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인 셈이었다. 여태 끌고 다니던 괴이만 해도 끔찍한데, 망령과 해골까지 다룰 줄이야. 특히 본 드래곤은 그도 입을 쩍 벌릴 정도였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저 본 드래곤의 정체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가, 빙왕은 고개를 털었다. 이런 건 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았다. 한평생을 용병으로 살아오면서 터득한 진리였다.
빅토리아는 고요한 눈빛으로 동굴 쪽을 바라봤다. 아다만틴 노바가 돌아가면서 공허를 내쫓는 틈 너머로, 빠르게 죽어 나가는 용병들이 얼핏 보였다.
문제는 학살이 여기서 그치지 않을 거란 점이었다.
지금 투입된 삼백여 명은 스테이지에 포진한 플레이어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2차, 3차로 추가 투입될 인원까지 생각해 본다면. 지금 스테이지에 있는 대부분의 용병이며 마법사, 현상금 사냥꾼 등 플레이어들이 죄다 갈려 나갈 거라고 봐야만 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과연 독식자 앞에는 이제 어떤 악명이 붙게 될까?
『이걸로 일단 시간은 벌었습니다만, 아직 전부 끝난 건 아닙니다.』
연우가 입을 열자, 빅토리아와 빙왕의 시선도 상념에서 깨어나 그쪽으로 돌아갔다.
『빅토리아.』
『어. 지금부터 미후왕의 허물…… 을 찾으러 가려는 거지?』
빅토리아는 칸의 환영과 연우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렇게 환영을 남긴 건, 부탁할 게 있어서야.
-뭐지?
-그건……. 후! 도일을.
칸의 환영은 잠시 말을 끊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도일을 구해 줘.
그 말과 함께 시작된 대화에는 칸이 처한 입장과 현재 동굴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미후왕의 궁전 내에 얼마나 많은 마군의 병사들이 주둔해 있는지도.
-지금 궁전의 중앙 공동에는 총 다섯 명의 주교가 몰려 있어. ‘때’만 기다리고 있거든.
-놈들의 목표는 제기의 완성.
-이곳 공동 너머에, 심상 결계를 구축하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는 미후왕의 허물을 담기 위한 그릇이지. 그리고 천마의 권속이었다던 용신도 같이 데려갈 생각이고.
-재료는 여의봉의 조각이지. 그래서 나에게 그동안 모아 오도록 시켰던 거고.
-다만, 허물을 그릇에 담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식을 필요로 해서…… 오행산 전체에 걸쳐 인신 공양을 벌였어. 죽은 플레이어들을 제물로 삼은 거지. 조각도 편하게 모을 겸 해서.
하나하나가 쉽게 믿기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그릇. 허물. 의식. 인신 공양.
하지만 어떻게 보면 마군으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들은 천마라는 존재를 신봉하는 종교 집단, 아니, 광신도 집단이었으니. 그런 제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도일은 거기 안에 있어. 정신을 잃은 채로. 제사가 시작되면 킨드레드 같은 놈들은 어떻게든 내가 막을 테니까. 그동안, 도일을 구해 줘.
결국 편지 속에 담겨 있던 도와달라는 말은 도일을 구해 달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여기에 대해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마군이 도일을 데리고 있는 이유가 뭐지, 대체?
칸의 환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일은. 대주교의 새로운 육체 후보군이야.
환영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본체가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공허에 가려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연우는 한참 동안이나 깊게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고민하듯.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움직이자고 말했었다. 곧 뒤따라올 연합의 추격을 막을 준비를 남겨 놓고서.
‘뭘 하려는 걸까?’
빅토리아는 연우가 어떤 계획을 짰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여길 지켜 주십시오.』
연우는 그렇게 말하고, 가만히 바닥에 앉더니 눈을 감았다.
연우가 미리 부탁한 대로, 빅토리아는 결계를 구축해 혹시 있을지 모를 외부의 충격을 대비했다. 빙왕은 번을 서면서 눈빛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바람이 뭉치면서 레베카가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휘이이-
그 순간, 연우는 의식을 깊게 가라앉혔다. 외부로 방출시키던 의념을 전부 안쪽으로 돌리면서, 감각을 세밀하게 짚어 나갔다.
연우는 자신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궁전에서 제천류와 72선술을 얻고 나올 당시에 흔적들이나 사념을 모두 지운다고 지웠건만. 아직도 자잘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악념(惡念)이라고 할 만한 것들.
그중에서 가장 또렷하게 느껴지는 것을 붙잡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자 순간 연우는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유체 이탈에 성공했습니다.]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납니다. 달라진 상태로 인해 능력치에 제약이 더해집니다.]
[현재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당신은 산 자입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육체로 돌아오지 않거나, 거리가 너무 멀어질 경우 사망할 수 있습니다.]
[00:30:00]
[00:29:59_99]
[00:29:59_98]
……
[영혼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졌습니다.]
실제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자신과 주변을 지키는 빅토리아, 빙왕이 보였다.
‘이렇게 내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군.’
미후왕의 허물과 가까운 독특한 지형이기 때문에 가능한 체험. 연우는 그러다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주어진 시간은 30분. 그 안에 어떻게든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저 멀리서, 어렴풋이 자신을 부르는 뭔가가 있었다.
마치 호랑이를 피해 동아줄을 타고 하늘 위로 오르는 동화 속 오누이처럼, 연우는 그 신호를 붙잡아 올라갔다.
그러자 발아래 더 많은 것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서서히 작아진다 싶더니, 한참 부 등과 싸우고 있는 연합이 보이고,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얽힌 여러 통로들이 나타나다가, 입구로 진입하기 시작한 후발 추격대도 보였다.
마치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듯, 미후왕의 궁전 전체가 한눈에 쏙 담겼다.
그러다 연우는 유체가 다른 어딘가에 스며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이 반전되었다.
화아악!
『…….』
연우가 다시 나타난 곳은 익숙한 장소였다.
과일나무와 소귀나무가 잔뜩 우거진 산. 따스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도원경.
화과산이었다.
『미후왕! 미후왕! 계십니까?』
연우는 미후왕의 허물을 찾기 시작했다.
칸은 자신이 제사 의식을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고 말했었다. 그동안에 도일을 구해 달라고. 양동 작전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연우가 봤을 때 그건 위험했다.
마군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칸이 제안한 작전은 그의 희생을 바탕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도일을 구하자고 칸을 희생하라고? 칸에게는 당연한 희생일지 몰라도, 연우에게는 칸을 그냥 버리자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연우는 칸의 계획을 뒤집고자 했다.
‘가장 좋은 건, 애당초 제사 의식 자체가 불발되게 하는 거다.’
미후왕의 허물을 그릇에 담기기 전에 빼돌릴 수 있다면? 마군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런다면 적잖은 소요가 일어날 테고, 도일뿐만 아니라, 칸을 무사히 구할 방법도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없어.’
연우의 인상이 굳었다.
‘어디로 갔지?’
연우는 불의 날개로 화과산 곳곳을 뒤지고 다녔지만, 어디에서도 미후왕의 허물을 찾을 수 없었다. 흔적도 없었다.
마치 버려진 세상처럼 조용했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 허물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던 심상 세계. 그런 곳에서 주체인 허물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세계도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벌써 그릇으로 옮겨졌나? 아냐. 아직 제사 의식은 시작되지 않았어.’
그랬다면 니케가 다급하게 연락을 줬을 것이다.
‘청룡도 보이지 않고.’
원래 천마의 권속이었다던 용신, 성. 단순한 권속이라기에는 너무 강대했던 신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도 보이질 않았다.
[00:12:29_41]
그동안에도 카운트는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찾아보고 없다 싶으면 빠르게 돌아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팟!
갑자기 연우 앞으로 무언가 큰 빛이 터지더니 작은 구체 같은 게 둥둥 떠올랐다. 그 속에 담겨 있는 힘은 웅혼했다. 익숙한 힘이었다.
『성?』
용신의 힘.
구체는 맞다는 듯이 잘게 떨리더니, 갑자기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했다.
연우는 어떻게 붙잡을 새도 없이 불의 날개를 펼쳐 구체의 뒤를 쫓았다. 속도가 너무 빨라 바람길-질풍과 블링크까지 잇달아 전개한 후에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구체가 도착한 곳은 화과산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작은 동굴이었다.
『여기로 들어가란 겁니까?』
우웅, 웅-
구체가 다시 크게 출렁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히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미후왕의 궁전과는 다른 의미로 눅눅한 곳이었다.
다만, 통로는 아주 짧아 금세 끄트머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 거 참 안 한다고! 귀찮은데 뭘 자꾸 하라는……!”
『미후왕?』
“어? 뭐야, 너였어?”
그곳에는 이상한 쇠사슬로 사지가 단단히 구속된 채, 바닥에 앉아 있는 미후왕이 있었다.
아니, 정말 맞기나 한 걸까.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한없이 영락을 거듭한 모습이었다.
미후왕의 허물은 축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연우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개 같네. 쪽팔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