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미후왕의 후예들 (11)
짜악!
칸은 뺨이 날아갈 것 같은 고통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바로잡았다. 다행히 손에 들고 있던 조각들은 바닥에 쏟아지지 않았다.
킨드레드는 그런 칸을 보면서 비웃음을 던졌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줄 아느냐? 내가 너의 속내를 모를 줄 알고?』
『……오해이십니다.』
『오해? 오해라.』
킨드레드는 피식 웃더니.
짜악-
반대쪽 뺨을 세게 때렸다. 이번에는 정말 목이 돌아갈 정도로 아파서 칸도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입 안이 찢어져 피비린내가 났다.
『난 참 그 단어가 거슬려.』
그러거나 말거나. 킨드레드의 눈빛은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에다 다 갖다 붙일 수 있는 말이거든. 오해입니다, 오해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등등. 그 단어만 붙으면, 뭘 꾸미든지 간에 그럴듯한 변명이 되니까 말이야. 안 그래?』
『……역시나, 오해이십니다.』
『정말이지. 만능의 단어가 따로 없군.』
킨드레드는 손가락을 가볍게 까닥였다. 그러자 칸의 손바닥 위에 있던 여의봉의 조각들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면서 뱅그르르 와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 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간에 해 보아라. 그런 자잘한 시도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여흥으로는 제격이지.』
킨드레드의 뒤에서 시립해 있던 사내가 조용히 앞으로 나서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구체(球體).
지이이잉-
구체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풍을 그리던 조각들이 그 쪽으로 몰리면서 곳곳에 비어 있는 자리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찰칵, 찰칵-
제자리를 찾아가듯. 수백 개의 조각이 모여 이제 더 이상 조각이라고 하기 힘든 ‘그릇’이 된 제기는 그렇게 모습을 갖춰 나갔다.
칸은 이를 악물며 그것을 바라봤다.
저 중에는 원래 마군이 보유하고 있던 조각도 있었지만, 그래도 4할 정도는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얻은 것들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그는 사실 마군의 자객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마군이 그동안 알아낸 후예들을 일일이 찾아가 죽이고,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 얻은 것들.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킨드레드는 오히려 더 기뻐했다. 피가 묻은 조각이라면 그만큼 원한도 짙게 어리기 마련. 제기를 완성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가 된다고.
자신도 악마였지만, 눈앞에 있는 킨드레드는 더 큰 악마였다.
천마? 저들이 모신다는 신적인 존재가 왜 갑자기 깊은 잠에 들어, 그들의 응답에 부응하지 않는지도 알 것 같았다.
저런 미치광이들이 있는 곳을 누가 좋아할까?
지금의 대주교는 전대 대주교였던 검은 새벽과 여러 주교들을 한꺼번에 쓸어 내면서 성좌(聖座)에 앉은 자라고 했다.
그렇다 보니 정통성이 취약했고, 더더욱 천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단이라고 내몰려도, 천마의 총애를 받는다면 그 사람이 곧 정통이었으니까.
하지만 천마는 그런 대주교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주교는 다른 편법을 써야만 했다.
천마가 부응하지 않는다면, 천마의 다른 얼굴들을 찾아 모시면 되지 않겠는가?
단순한 칼잡이에 불과한 칸은 아직 마군의 정확한 교리를 알지 못했다.
다만, 천마가 윤환전생을 통해 새로운 일세(一世)가 열릴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세상에 큰 가르침을 내리거나,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다 종국에 큰 깨달음을 얻어 영혼을 완성시켰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을 두고, 마군에서는 천마의 ‘또 다른 얼굴’이라 부른다는 것도.
이를테면, 천마의 전생들을 가리키는 용어인 셈이었다.
미후왕은 그런 여러 전생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강하다고 분류되는 인물.
당연히 대주교도 그런 미후왕이 탐났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미후왕은 천마의 잠과 함께 사라졌으니, 그가 남긴 허물을 데려오는 것이 그들로서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시도가 바로 이번 제사 의식이었다.
이미 만반의 준비는 갖춰진 상태였다.
한사코 궁전에서 떠나기를 거부하던 허물은 마군이 부린 술수에 의해 신진철에 단단히 구속이 된 상태였고, 강신을 위한 제물은 오행산 전체에 걸쳐 고루 뿌려져 있었다.
제단은 갖춰졌다. 청동화로는 천마의 첫 얼굴이었다는 존재가 내린 불길로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여러 주교, 교구장, 상급 사제부터 평사제, 그리고 명예 신도에 이르기까지. 대주교를 제외한 마군의 수뇌들이 대부분 여기에 모여 있었다.
이제는 기도식만 남았다.
그릇으로의 강신이 성공한 순간. 그들은 곧장 오행산을 나가 여태껏 성역을 더럽혔던 모든 벌레들을 일소할 테지.
그리고 그 뒤에는…….
‘다른 생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칸은 아주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들의 기도식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건 그것 나름대로 큰 소란이 될 테지만, 되도록 그 뒤는 생각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성지로 들어온 벌레들이 너와 무관하다고 했겠다?』
킨드레드는 어느덧 조립이 끝나 다시 환한 빛을 내는 제기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칸은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서 고개를 숙였다.
『예』
성지. 그건 이곳, 미후왕의 궁전을 뜻했다.
그런 성지로 감히 더러운 발을 들인 연우 일행과 추격대는 마땅히 치워야만 할 벌레였다.
『그렇다면 그들을 모두 치우고 와라. 그래야만 네가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킨드레드의 비릿한 시선이 제단 쪽으로 쏠렸다.
청동화로가 좌우로 놓인 제단 바로 앞. 로브를 푹 뒤집어쓴 사내가 경건한 자세로 꿇어앉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살짝 드러난 로브 사이로 앳된 얼굴이 보였다.
그를 따라 은은하게 후광도 비쳐졌다. 흔히 말하는 성자를 보는 듯했다.
칸은 이를 악물며 더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희 셋, 따라가라.』
사, 오, 육. 세 명의 사도가 칸의 뒤에 섰다. 칸은 그들을 대동하여 중앙 공동을 떠났다.
킨드레드는 그런 칸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치다가, 완성된 제기를 쥐고 천천히 움직였다. 남아 있던 세 번째 주교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왜 살려 두시는 것입니까? 이미 효용이 다 끝난 사냥개가 아닙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마군은 칸이 조건을 다 이행해도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절대 없었다. 도일은 교단의 새로운 시대를 열 중요한 열쇠였으니까.
그래서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조용히 처리를 해야 할 테지만.
『누가 살려 둔다던가?』
킨드레드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곳은 신성한 제단 앞. 공양도 충분히 주어졌는데, 굳이 더러워진 피를 가까이 둘 필요가 어디 있는가. 오히려 액만 탈 뿐이지.』
『생각이 짧았습니다.』
세 번째 주교는 킨드레드의 생각을 뒤늦게 깨달았다. 벌레들을 모두 치우고 나면 다른 주교들이 즉각 칸을 치울 예정인 것이다. 그때는 크게 지쳤을 테니 피할 수도 없겠지.
『그럼 의식을 시작하지.』
킨드레드는 엄숙한 발걸음으로 다섯 개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완성된 제기를 제단에 올렸다.
이번 기도식의 주체는 그가 아니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원활한 의식 진행을 옆에서 돕는 집사일 뿐. 주체는 따로 있었다.
『…….』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도일은 검은 동공이 사라져 흰자위만 남은 눈으로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답해 주십시오. 천마의 또 다른 얼굴이시여.』
* * *
『힝. 괜찮아?』
입구 쪽으로 나가는 길.
칸은 머릿속으로 울리는 니케의 목소리를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한 행동이라, 옆에 있던 다른 주교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괜찮으니까 걱정 마.’
니케는 그동안 칸의 체내에 스며들어 조용히 잠복해 있었다. 참 순수하고 마음씨가 착한 아이였다.
연우 같은 녀석이 어떻게 이런 아이를 만났는지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새 성화가 작동했던지 찢어졌던 입 안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데, 니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있잖아.』
‘어.’
『도일이라는 친구는 어떤 친구야?』
니케는 혹시 묻지 않아야 할 걸 물었나 싶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칸은 가볍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미운 새끼.’
『미…… 워?』
알 수 없다는 듯한 태도. 미운데 왜 구하느냐는 물음이 전해졌다. 칸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어. 밉지. 말은 죽어라 안 듣고, 형한테 떽떽거리기나 하고. 쥐어박을 수도 없고. 으휴.’
칸은 그렇게 도일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사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금 지루할 텐데 들어 볼래?’
『응! 나 이런 이야기 되게 좋아해.』
딱 꼰대들이 좋아할 아이네. 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옛일을 짚어 나갔다.
칸이 도일을 처음 만난 건 열네 살 무렵이었다. 당시 칸은 아버지 철사자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 있던 상태였다. 그러던 중에 의뢰자로 찾아왔던 랭커, ‘레드 스컬’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도일은 그를 따라온 열 살배기 아이였다.
『레드 스컬?』
‘있어. 엄청 음흉한 영감탱이. 세 번째 주교, 그놈이야.’
『……!』
니케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아들을 대주교에게 바쳤다는 뜻일 텐데?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돼. 저 광신도들한테는. 오히려 자식을 팔아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면 싸게 먹혔다고 할 텐데?’
『말도 안 돼.』
어머니 피닉스와의 좋은 추억만 간직하고 있는 니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이긴 하지, 이곳이.’
칸의 목소리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는 칸과 가문에 환멸을 품은 도일. 두 아이가 우연히 만나, 단 몇 시간 만에 의기투합을 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아이는 찾지 말라는 종이 하나만 딸랑 남기고 집을 떠났다.
‘별거 없지 않냐?’
칸이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니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런 것 같다고 칸은 느꼈다.
『꼭 나랑 주인 보는 거 같아.』
‘너희들?’
『응응!』
칸은 묘한 기분에 잠겼다.
『우리도 비슷했거든. 그리고 칸, 주인이랑 닮았어.』
‘내가? 그놈이랑? 에이. 그렇게 감정이 메마른 인간이랑 나를 비교하면 쓰나. 그래도 내가 좀 더 잘생기지 않았냐?’
칸은 가볍게 농담을 던졌지만.
『아냐. 닮았어. 무지무지.』
니케는 단호하게 말했다.
『주인도 칸이랑 똑같은걸. 동생을 구하고 싶어 하는 건. 난 그게 부러워. 난 형들을 못 구해 줬거든.』
순간, 칸의 발걸음이 멈췄다.
『뭐냐?』
『왜 갑자기 멈추지?』
조용히 칸의 뒤를 따르고 있던 주교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칸의 귀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등골을 따라 위화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아니. 카인.’
칸의 목소리가 짙게 깔렸다.
‘녀석에게 동생이 있었어?’
『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니케는 잠깐 망설였지만, 반드시 숨겨야 하는 부분은 숨기면서 연우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갇혀 있을 동생. 그를 찾기 위해 타르타로스까지 건너야만 했던 외로운 여정. 그러다 동생을 되찾을 중요한 단서를 찾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일들까지.
『주인은 그러다가 여기로 온 거야. 칸의 편지를 받고.』
‘……!’
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뒷머리를 커다란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동생을 구하러 왔다고? 녀석이? 순간, 연우와 겪었던 여러 일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따금 부러워. 너희들이.
튜토리얼에서. 연우는 자신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가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분명 우수에 차 있었다. 그리움도.
오행산에서. 연우는 자신들이 찢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를 냈었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는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으면 꼭 말을 하라며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동안에는 몰랐다.
그저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여긴 게 전부였다. 녀석은 개인사를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을까? 그리움? 안타까움? 어떤 것이든지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담겼을 터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연우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녀석에게…… 겨우 동생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녀석을, 강제로 끌고 온 거였다고?’
그것도 비슷한 일로.
충격은 죄책감이 되었다. 죄책감은 온몸을 흠뻑 적시며 익사 직전까지 몰아갔다. 그것은 곧 자기 혐오가 되었다.
‘난…….’
칸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시각이 닫혀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두 손은 분명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 * *
『왜 이런 몰골이 된 겁니까?』
연우의 기억 속에 있는 미후왕의 허물은 위풍당당한 존재였다. 허세라고 느껴질 정도로 항상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기세만으로도 헤르메스를 능가하는 존재감을 뽐내던 신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피투성이가 되어, 영락에 영락을 거듭해서 존재감마저 희미하게 느껴졌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사지를 구속하고 있는 저 쇠사슬들은 또 뭐고.
“몰라. 씨발. 묻지 마.”
그래도 자존심은 여전한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리면서 투덜거렸다. 그런 그를 보다가, 문득 연우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태면.’
가만히 왼손을 내려다봤다.
‘바토리의 흡혈검이 먹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