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37화 (337/862)

12화. 미후왕의 후예들 (12)

“뭐냐, 그 눈깔은? 뒈질래?”

미후왕의 허물은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으르렁거렸다.

연우도 내심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으로 움찔했지만, 어차피 속내를 들킨 건 아니기 때문에 뻔뻔하게 나갔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 새끼고 저 새끼고 간에, 죄다 통수 칠 생각만 하고 있지. 어휴.”

허물은 정말 단단히 짜증이 났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되신 겁니까?』

“그러게. 진짜 쪽팔리게 난 왜 이딴…… 잠깐. 야, 이따 이야기하자.”

연우는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반문하려다가, 이쪽으로 뭔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기척을 지우면서 허물의 뒤쪽 기둥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곧 동굴 안쪽으로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가 누군지 알아챈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킨드레드.’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군의 두 번째 주교가 익살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도 문안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천마의 또 다른 얼굴이시여. 어떠하셨습니까, 밤새 잠자리는 평안하셨습니까?”

“네놈 면상만 안 보면 참 평안할 것 같은데.”

“이런. 안타깝습니다. 저도 그렇게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여기에 와서 천마의 또 다른 얼굴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는지라…….”

“그러니까,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까 이거나 좀 풀라고.”

미후왕의 허물은 자신의 팔다리를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보였다.

철컹, 철컹!

손으로 잡아당길 때마다 벽에 연결된 쇠사슬이 빳빳해졌다 풀어지며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내가 너희들이 모시는 신 중 하나라며? 너희는 신을 이렇게 모시냐?”

“저도 그렇게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킨드레드가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시면 절 죽이려 하실 거잖습니까?”

“아냐. 내가 널 왜 죽여?”

“정말입니까?”

“그럼. 그냥 안 죽이지. 찢어 죽이지.”

허물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화아악-

그가 내뿜는 매서운 살기가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아무리 영락을 거듭했다고 해도, 허물은 허물. 위대한 천마가 남긴 잔상다운 투기였다.

킨드레드는 미간에 식은땀이 살짝 맺혔지만, 그래도 웃음기는 지우지 않았다.

“그것 보십시오. 저도 살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조금만 참아 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달라질 것도 없다고?”

“예. 그저 오랫동안 머물러 이제 염증이 생길 곳에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간다고만 생각하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역시 너의 그 주둥이부터 찢어 버려야겠어.”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말이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킨드레드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머리통도 부숴 버리고 싶고.”

그래 봤자 돌아오는 것은 허물의 코웃음과 살의뿐이었지만.

하지만 킨드레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미후왕의 허물을 이런 꼴로 만들었을 때부터, 아니, 첫 만남에서 모시려 했던 것이 불발되었을 때부터 이미 이런 것쯤은 각오했었다.

신을 모시는 사제로서 신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 속이 쓰린 일이었으나, 그를 찾기 위해 십 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갖다 바친 킨드레드의 광신(狂信)을 꺾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면 결국 끝까지 마음에 변화는 없으신 것인지요?”

“말했지만. 내가 여길 나갈 때는 딱 한 가지를 위해서야.”

허물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네 주둥이를 찢을 때.”

킨드레드는 인상을 굳혔다. 결국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강제로 이행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이제 곧 의식이 시작될 것입니다. 불편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만, 그래도 아주 잠깐 힘드실 수 있으니 준비를 해 주십시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홀연히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둥, 둥, 두웅-

세상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절의 범종을 타종하듯. 세상이 위아래로 들썩이면서 요란한 종소리가 대기를 타고 잔잔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떨림이 점차 심해지면서. 공간이 이리저리 왜곡되었다.

『이건…….』

연우가 모퉁이에서 나오면서 물었다.

“뭐겠어? 저 죽일 놈들이 의식을 시작했다는 거겠지. 미친놈들. 신도라는 놈들이 자기 모시는 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뭐? 영광? 웃긴 지랄이지.”

미후왕의 허물의 얼굴에서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금방이라도 일그러지는 게 아닐까 싶었던 공간은 어느새 온전한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 강제로 심상 세계를 봉인시키려는 외부의 압력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것이겠지.

그래도 연우는 결국 이 싸움이 마군 측이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처음에 마군이 제기를 만든다고 하였을 때, 당신도 허락한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허물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하나만 말해 주지. 애송이는…… 그러니까 저들이 천마라 부르는 놈은 절대 저런 걸 바란 적이 없다. 그놈은 나보다 더한 새끼라서 저런 거추장스러운 것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거든.”

연우는 그 말이 천마가 마군을 버린 지 오래되었다는 말로 들렸다.

천마가 깨지 않을 깊은 잠에 빠진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검은 새벽이 떨어지던 날, 대주교를 포함한 주교 9좌가 모두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졌을 무렵이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지만. 현재 마군의 주교들은 절대 천마의 권능을 허락받지 못하는 반편이들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주에 씐 반편이들.

그래서 그들은 신물에 기대어, 천마의 다른 영육신의 힘을 빌리는 게 고작이었다.

일기장 속에도 마군에 대한 내용은 어느 정도 적혀 있었다.

당시 그들이 썼던 신물이 여의봉의 조각이라는 건, 연우도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그리고 권능도 없이 전대 대주교와 아홉 주교를 전부 처치한 지금의 대주교는…… 진짜 괴물인 거고.’

아홉 왕 내에서도 서열은 있기 마련. 당연한 말이지만, 최고는 무왕과 여름여왕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는 자가 바로 대주교였다.

만약 권능도 쓰지 못한 대주교가 권능마저 허락받는다면?

그때는 어떤 사달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마군이 이 상황을 벌인 이유이기도 했다. 허물을 통해 미후왕을 제대로 깨울 수 있다면, 그때는 우회적으로라도 권능을 획득할 수 있을 테니.

‘더불어서 육체도 바꿀 수 있다면 저주도 씻을 수 있을 테니.’

더구나 현재 대주교는 천마로부터 저주까지 받은 상태.

하지만 새로운 육체로 갈아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도일은 그것을 위한 도구였다.

과거에 킨드레드가 세샤를 강탈하려 했던 것도, 사실은 대주교에게 뛰어난 후보군을 제공하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이다.

현자의 돌을 획득하기 위해 발푸르기스의 밤 공방전에 나타났던 이유도 그런 목적의 연장선이었고.

그래서 연우로서는 어떻게든 이번 일을 깨뜨리고 싶었다.

그가 진행하는 일에 번번이 개입해서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것부터가, 애당초 그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수순이었던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보면 몰라? 빌어먹을 것에 걸려서 그렇지.”

미후왕의 허물은 양팔을 들어 쇠사슬을 자세히 보였다. 연우는 재질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침음을 삼켰다. 그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쇠였다.

『신진철입니까?』

“그래. 정확하게는 긴고아다.”

『……!』

긴고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제천대성의 머리에 씌워져 강제로 구속시키던 신물을 이야기했다.

천계가 내린 모든 임무를 수행한 뒤에 긴고아를 벗긴 했다지만, 그래도 그것을 어떻게 구해서 강제로 덧씌웠다면?

“거기다 긴고아주까지 불러 대니. 염병,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

결국 마군은 작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끝낸 채, 미후왕의 허물을 잡으려 했단 뜻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저렇게 강한 신격을 구속할 수 있냐고도 할 수 있을 테지만. 어쩌면 심상 세계에 갇힌 제약이 있기에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덕분에 성아 녀석도 튕겨나 버리고…… 젠장.”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제 용신은 더 이상 이곳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것으로 들렸다.

“뭐, 하여간. 너는 여기 왜 왔어? 보니까 밖에서 신나게 깽판 치고 다니는 것 같더니. 여기도 그러려고 왔냐?”

『알고 계셨습니까?』

“야. 여긴 내 궁전이야. 자기 집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일도 모르면 그게 등신 천치지, 어디 사람이냐?”

허물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연우의 주변 공간이 일렁이더니 다양한 광경들을 순서대로 비추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나를. 모방한다는. 장난. 감이. 고작. 이것밖엔. 되지 않나?

닥터 둠은 부가 계속 쏘아 대는 마법과 공간을 굴절시키는 공허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마법진이 발동할 때마다 족족 부서져 나가고, 아티팩트도 대부분 기능이 정지하고 있었으니.

이미 그가 끌고 온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스켈레톤 더미에 무참히 학살되어 버린 상태였다.

마탑에서도 손꼽힌다는 정예들은 장렬하게 산화되었고, 영혼은 연우의 허락에 따라 자연스레 부에게로 흡수되어 결여된 지식들을 자동적으로 채웠다.

-당신 같은 분이 어떻게 한낱 인간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의 운명은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와중에 용케 부의 정체를 알아챈 모양인지, 닥터 둠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울부짖었다.

-파우스트!

장면이 바뀌었다.

-본 드래곤에 데스 노블? 이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카인!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내 아들을 내놓으란 말이다!

아이반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림자를 넘나들면서 시작되는 샤논의 연속된 공세에 손이 묶이고, 하늘을 유영하면서 포이즌 브레스(Poison Breath)를 뿌려 대는 본 드래곤에 의해 발이 붙들린 상태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 내는 모습은 전장의 사자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았으니.

샤논은 그럴수록 공격을 더 멈추지 않았다. 아직까지 본 드래곤이 미완성인 상태라 제 위력을 다할 수가 없어서, 그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그러던 중에 샤논이 뒤로 떨어질 때가 있었다.

갑자기 어둠을 가르며 등장한 인물 때문이었다. 아이반은 또 적들이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지 몰라 인상을 찡그리다가.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곧 나타난 아들, 칸의 얼굴을 보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음? 너 꽤나 신기한 기예를 부리는구나. 좀 익숙한데? 하지만 녀석은 분명히 죽었고…… 아니, 죽었으니 이런 모습인 건가?

-설마, 너……?

다음 장면에서는 페이스리스와 한령이 한창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페이스리스는 늘 벌이던 대로 갖가지 목소리를 내면서 붕대로 이리저리 싸우다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리고 아홉 자루의 칼을 차례대로 풀어내면서 격전에 임하던 한령도, 뭔가 페이스리스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허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나의 절친한 벗이여!

그러다 페이스리스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뚝뚝하지만 살의가 가득 넘치는 목소리.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였다.

동시에 페이스리스를 둘러싸던 공기도 확 변질되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여태 숨어 있던 절대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붕대를 휘두르던 손속도 더더욱 정교해지고 날카로워졌다. 여태껏 보였던 모습들이 다 자유분방했다면, 지금은 뛰어난 경지에 오른 검사의 기예였다. 아이반도 결코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쾅-

검격을 밀어내면서, 한령이 씹어 삼키듯이 외쳤다.

-설마 페이스리스의 몸을…… 아니, 그를 삼킨 것이냐?

그 외에도 다른 광경들이 순서대로 지나갔다.

추가로 추입되는 추격대와 그들을 압도적인 물량으로 짓밟는 언데드 군단. 그리고 괴이들은 영혼들을 마구잡이로 씹어 삼키면서 계속된 강화를 시도했다. 칠흑왕 형틀의 제약이 풀리면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허로부터 연우의 육체를 지키고 있는 빅토리아와 빙왕도 보였다.

장면은 거기서 끝났다.

연우는 더 이상 용건을 숨길 필요가 없겠다 싶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처럼 여기도 깽판을 치기 위해서 왔습니다.』

미후왕의 허물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사고 치는 것만 따지면 넌 애송이 녀석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아. 인성질도 그렇고.”

덕분에 여기에 묶여 있으면서도 전혀 심심한 게 없었지만 말이야. 미후왕의 허물은 그렇게 뒷말을 덧붙이면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깽판을 치려고? 내가 지금 이렇게 여유롭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힘들어 뒈지겠거든?”

『미후왕은 지금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허물의 비틀린 입술 끝이 더 크게 말려 올라갔다.

“결국 너도 저놈들과 똑같은 놈이 되겠단 뜻이잖아?”

두우웅-

때마침 세계가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의식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

[00:04:21_36]

연우에게 남은 카운트도 얼마 되지 않는 상태. 돌아갈 시간도 감안한다면 3분도 채 남지 않은 것이다.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저들보다는 낫겠죠.』

“뭘 봐서?”

『저들이 가진 노림수, 아시지 않습니까?』

“…….”

『저들은 미후왕도 같이 삼키려 들 겁니다. 자기들이 천마의 새로운 얼굴이 되려 하겠죠.』

마군이 현자의 돌을 필요로 했던 이유? 미후왕을 새롭게 모시니 뭐니 하면서 포장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허물을 강제로 예속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진짜’ 계획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미후왕의 허물을 성공적으로 삼키는 것. 대주교는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신격(神格)으로 깨어날 생각이었다.

미후왕의 허물도 그걸 알고 있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다고 해서 네 졸개가 되라는 거냐?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미후왕의 허물은 연우에게도 순순히 자신을 내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연우가 착용하고 있는 칠흑왕의 절망과 비탄을 정확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칠흑왕의 구속구.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

이번엔 연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마군이 손을 쓰기 전에, 허물을 형틀에 예속시키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키클롭스 3형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허물은 그들과 다르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쿠쿠쿠-

세계의 진동이 이제는 격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공간의 굴절도 점차 커졌다. 이대로는 언제 금세 사라질지 몰랐다.

[00:02:56_08]

‘어떻게 해야 하지?’

연우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허물은 절대 설득에 넘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속박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영락했어도 신격. 동의 없이는 힘들다. 그렇다면 정말 바토리의 흡혈검으로 흡수를? 하지만 유체 상태로 스킬 전개가 제대로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하자.”

그때,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던 허물이 다시 적막을 깨뜨렸다.

연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냥 삼켜. 나를.”

뜻밖의 말.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라지겠지. 물론.”

허물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하지만 난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질질 끌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해. 결정도 내가 한다.”

해와 달의 정기를 받아 세상에 태어난 돌원숭이. 그는 처음부터 왕으로 태어났고, 여러 제약을 극복해 내며 끝내 신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부처가 되어 세상을 오시했다.

운명 따윈, 그에게 있어 부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누울 자리도 내가 결정한다. 어차피 추가로 주어진 인생이잖아? 죽어도 억울하거나 한 건 없다.”

연우는 허물이 내뱉는 기백에 완전히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 저것이 진짜 ‘왕’이자 ‘신’의 모습이 아닐까? 그것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 조건이 두 개 있다.”

미후왕의 허물은 손가락을 두 개 꼽았다.

『말씀하십시오.』

“하나. 날 이딴 꼴로 만든 저 개새끼들, 다 밟아 버려.”

『하겠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키지 않아도 할 일이었다.

“둘. 나중에 깨워.”

『하지만…….』

“그래. 존재가 사라지는 거니 불가능하다 싶겠지. 나도 죽는 게 억울하지 않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더 살고 싶다면 살고 싶거든?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다시 부를 방법이 없지 않을 테니까.”

연우는 칠흑왕의 형틀에 추가되었던 옵션을 떠올렸다.

사자 소환.

비록 ‘죽은 자’라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만약 그것을 비틀 방법이 있다면?

“어때? 할 수 있겠어?”

『예.』

“하여간 주둥이는.”

미후왕의 허물은 처음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오연한 자세로, 양팔을 활짝 펼치면서 말했다.

“좋아. 삼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평생 못 볼 것처럼 말하기는.”

허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연우는 그에게로 다가가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검은 멍울을 따라 톱니 이빨이 드러났다.

찰칵, 찰칵-

[‘바토리의 흡혈검’이 개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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