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미후왕의 후예들 (13)
연우는 손바닥을 미후왕의 허물에다 갖다 댔다.
허물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퍼석-
마치 파도에 모래성이 쓸리듯이. 허물을 이루고 있던 입자들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바토리의 흡혈검 안쪽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후왕의 허물이 사라지면서 구속구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손목을 타고 흘러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신력 때문이었다.
‘양이 많을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아무리 영락을 거듭했어도 신격은 신격. 어마어마한 양의 인자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것을 통째로 삼키려 하니 힘들 수밖에.
콰드득, 콰득-
육체가 벌써부터 삐거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현자의 돌이 맹렬하게 돌아가면서 모든 가능성을 활짝 열었지만, 쏟아지는 양이 너무 방대하다 보니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었다.
장독대의 물을 채우려고 댐의 문을 활짝 연격이었으니. 깨지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름여왕을 흡수하면서, ‘용’으로서의 가능성이 활짝 열렸다는 것.
비록 하계에 묶이긴 했어도, 한때 용종은 신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던 초월종.
그 가능성을 일부 획득한 것만으로도 연우에게는 큰 도움이었다.
드드드득-
허물을 이루던 입자에 이어, 이제는 심상 세계까지 무너지면서 와류에 쓸려 왔다. 심상 세계도 원래는 허물을 이루는 몸의 일부였으니.
[‘마신룡체’가 구성됩니다. 92, 93%…… 95%…….]
하지만 그래도 힘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결국 연우는 흔들리는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면서 스킬을 발동시켰다.
[시차 괴리]
한껏 느려진 세상 속에서,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이것도 할 짓은 못 되는구나.’
사고가 가속되고 있다고 해서 육체적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신력에 정신없이 휩쓸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부분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정신은 또렷하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연우는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텨 내면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허물을 완전히 흡수하는 건 힘들어.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하겠지만…….’
[00:01:29_68]
‘남은 시간은 최대한 버텨도 고작 1분 남짓. 그 안에 어떻게든 허물을 삼켜야 해. 그렇다면.’
연우는 방대하게 쏟아지는 사념 정보의 홍수 속에서 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허물의 핵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2할 정도만 취하고 남은 8할을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깝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아직 초월에 근접하지도 못한 연우에게는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어쩌면 이 중에서도 상당수는 여름여왕의 힘처럼 ‘잠재력’으로 치환해서 영혼 한쪽에다가 모아 둬야 할지도 몰랐다.
화아아-
물론, 이렇게 많은 사념 정보 속에서 허물의 ‘존재’를 이루는 핵만 골라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포기하지 않고 시간 배속을 최대로 늘리면서, 감각을 세밀화해 정보를 일일이 가려 흡수했다.
그 속에는 미후왕의 허물이, 아니, 미후왕이 살아 왔던 생애가 담겨 있었다.
원숭이들의 왕으로 태어나 신이 되고, 다시 영락하였다가 부처가 되었던 존재.
천계와 싸우기도 하고, 의형제들과 함께 마왕들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기도 했던. 그러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미후왕의 성장기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겼다.
연우는 마치 자신이 진짜 미후왕이라도 된 것처럼 생생하게 많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우는 여태 자신이 익히고 있던 72선술을 다시 한 번 더 되짚을 수 있었다.
미후왕은 스승 수보리조사로부터 배운 72선술을 단순히 선술로만 썼던 게 아니었다.
때로는 마술(魔術)로, 때로는 투법(鬪法)으로, 또 때로는 무공(武功)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섞고, 합치고, 비틀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고쳐 나갔던 것이다.
덕분에 아직 72선술에 대한 깊은 이해도가 부족했던 연우는 아주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여태껏 머릿속에 담아 두기만 하고, 제대로 열어 볼 생각도 못 했던 제천대성의 유산, 제천류에 대한 단초도 어느 정도 익힐 수 있었다.
연우는 수많은 묘리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면서 필요한 부분들을 머릿속에 담았다. 이대로 있으면 72선술을 완전히 터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우는 서서히 미후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격에 동화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쾅!
연우는 갑자기 뭔가에 세게 부딪쳤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곳에 아테나가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커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슬픈 눈을 하고서.
“먹히지 마라.”
아테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손을 뻗어 연우를 꼭 끌어안았다.
“네게는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으냐.”
연우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새 상체를 따라 잔뜩 돋아난 용의 비늘은 금색으로 빛나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서 어깨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두 눈 역시 불타는 듯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금색과 백색은 미후왕의 상징. 아무래도 허물을 삼키려다가, 도리어 자신이 먹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힘에 완전히 취했던 것이다.
만약 아테나가 나타나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연우는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테나는 어느새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간 걸까? 아니. 애당초 천계에 있을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잠깐이나마 현신할 수 있었던 걸까?
[아테나가 침묵합니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연우는 머리를 털면서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미후왕의 흔적이었던 백발과 금색 비늘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유체에서 여태껏 느낄 수 없었던 강한 힘이 느껴졌다.
격.
엄청난 상승을 이룬 것이다.
어쩌면 여름여왕의 영혼을 삼키면서 얻기만 했지, 그동안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가능성이 모두 온전히 드러난 게 아닐까 싶었다.
무엇보다.
‘72선술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을 줄이야.’
[‘72선술’의 스킬 이해도가 깊어졌습니다.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수(水) 속성이 깊어졌습니다.]
[금(金) 속성이 깊어졌습니다.]
[목(木) 속성이 깊어졌습니다.]
……
[상위 속성, ‘오행(五行)’에 대한 이해도가 생겼습니다.]
[칭호 ‘미후왕의 후예’가 ‘제천대성의 후계(後繼)’로 변경되었습니다.]
[여러 조건을 충족하여, ‘제천대성의 유산’에 대한 단서를 획득했습니다.]
연우는 미후왕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72선술을 재조립하면서, 비로소 제천대성의 유산을 제대로 열어 볼 수 있었다.
미후왕이 투전승불이라는 칭호를 얻고, 은퇴 뒤에 자신의 모든 깨달음을 정리하면서 완성시킨 다섯 가지의 기예, 제천류.
뇌벽세.
유수행.
신목령.
화염륜.
금강포.
72선술의 근간이 된다는 오행을 분리시켜, 선술과 무학의 영역을 넘어 법칙을 구현한다는 기예들.
연우는 제천류의 다섯 기예가 무엇인지 여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아직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선에서는 다루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용의 지식을 바탕으로 천천히 접근한다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쾌재를 외쳤다.
연우는 황금색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위로 들었다.
[00:42:11_25]
조금 빠듯한 시간.
그래도 서두르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문득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보다는 다른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주변에는 허물이 남긴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것들을 그냥 날려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조금 더 잘 활용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연우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다가, 천천히 유체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현재 각성률: 98%]
* * *
『드디어, 드디어 신께서 강림하신다……! 바로 이곳에!』
쿠쿠쿠-
궁전의 중앙 공동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킨드레드의 환호성과 함께, 같이 진언을 외고 있던 다른 주교들과 교구장들의 의념도 점차 커졌다.
『마할바타, 타마하…….』
『마할바타, 타마하…….』
정확하게는 긴고아주였다. 심상 세계에 있는 미후왕의 허물을 완전히 끌어 올릴 수 있는 힘.
사실 긴고아를 다루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았다. 킨드레드를 비롯해 여러 주교와 교구장 등, 수뇌들이 대거 나서야 겨우 움직일 수준이 되었다.
모든 수뇌들의 의식이 연결된 집단 무의식이 긴고아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금쯤, 심상 세계에서는 긴고아가 팽팽하게 조여들어 허물이 받는 압박은 엄청날 것이다.
실제로 제기에 쏟아지는 내용물도 어마어마했다.
저것이 바로 신력……!
킨드레드는 자신도 모르게 황홀경에 취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교가 되고도 여태 권능을 허락받지 못해, 신력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진짜’ 신력을 보게 되니 얼마나 기쁜가.
저 하나하나가 전부 미후왕이 살아 왔던 흔적이며 발자취였다. 단순히 엿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압도될 정도인데, 제대로 살펴본다면 얼마나 강렬할 것인가.
무엇보다 저건 허물, 일종의 껍질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미후왕은 얼마나 강할까? 그리고 그것을 전생으로 둔 천마는?
98층에 있는 것들은 전부 가짜이며, 진짜 신은 오롯이 천마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한 그였다.
그리고.
‘저 허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얼굴로 태어나실 대주교님이야말로…… 우리 마군의 영원한 영도자일지니……!’
킨드레드의 눈가에 광기가 잔뜩 맺혔다. 그의 광신은 천마에 대한 것임과 동시에 오로지 대주교를 위한 것이었다.
천계에 천마가 있다면, 하계에는 대주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잇는 영광은 자신에게 내릴 것이니. 곧 쏟아질 신의 은총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아직 끝나질 않는 거지?’
킨드레드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여전히 제기로 쏟아지는 내용물은 잔재일 뿐, 허물의 핵은 보이질 않았다. 저항이 생각보다 큰 걸까? 하지만 그렇게 다친 상태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텐데?
이대로 시간이 길어지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
킨드레드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의식을 집단 무의식에게로 접촉시켰다. 직접 이들을 도와 허물을 잡아당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뭐지?’
집단 무의식이 너무 조용했다. 원래 이런 건 아니었다. 한창 긴고아주를 크게 외면서 긴고아를 세게 잡아당기고 있어야 할 텐데……?
그때. 킨드레드의 눈에 다른 뭔가가 보였다. 녀석도 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곧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왔나 보군.』
새카만 가면과 옷, 그리고 등에 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자. 익숙한 얼굴이었다. 킨드레드가 몇 번이고 씹어 삼키고 싶었던 얼굴. 다만,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가면 사이로.
두 눈이 황금색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화안금정(火眼金晴).
미후왕의 후예들 중에서도, 72선술을 깊이 터득해 ‘후계(後繼)’의 칭호를 터득한 자들만이 얻을 수 있다는 힘.
『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킨드레드가 경악한 순간.
콰아앙!
갑자기 그의 의식이 집단 무의식에서 세게 튕겨 났다.
킨드레드는 어지러운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 했다. 중앙 공동을 중심으로 거센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균형을 잡기도,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얼굴로 뭔가가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끈적끈적 하면서도 불쾌한 것. 반사적으로 손으로 훔쳐서 확인했다.
『피?』
정확하게는 질척한 피가 섞인 살점이었다. 불안감에 주변을 둘러본 순간.
퍼퍼펑-
기다렸다는 듯이 주교며 교구장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킨드레드는 아주 잠깐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절규를 내뱉었다.
『카인!』
제기에 담으려던 허물의 힘이 역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벌였는지 몰라도, 핵이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갈 길을 잃은 힘들이 폭주를 일으킨 것이다.
당연히 힘을 제어하려던 집단 무의식이 곧바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신도들은 그대로 휩쓸려 폭발하고 말았다.
주교, 교구장, 상급 사제……. 죽는 데 그런 계급은 필요 없었다. 버티지 못하면 죽고, 버텨도 신력에 오염이 되어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잠겨야만 했다.
그러다 끝내 제기까지 폭발하면서, 부서진 여의봉의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카이이인!』
킨드레드의 정신도 그 순간 똑같이 터졌다. 지난 십여 년간 바라 왔던 순간이, 노력이, 광신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휘몰아치는 힘의 격류 속에서 겨우 제 한 몸 지탱하는 게 전부였다. 그 역시 육체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미후왕이 부탁하던데.』
그런 녀석 앞으로. 어느새 거짓 말처럼 연우가 나타났다. 화안금정을 살벌하게 피우면서.
『나가면 먼저 네 주둥이부터 찢어 달라고.』
『카이이이이이인!』
연우는 고함을 지르는 녀석의 입에다가 마장대검을 꽂고, 그대로 돌렸다.
퍽!
촤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