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미후왕의 후예들 (14)
현재 연우는 유체 상태이기 때문에 물리적 접촉으로 킨드레드의 숨통을 끊은 건 아니었다. 아직도 폭주 중인 허물의 힘을 강제로 쑤셔 넣어 폭발시킨 것이다.
『또 분신인가? 세포 분열하는 아메바도 아니고.』
연우는 죽은 킨드레드의 시체가 흩어지는 것을 보고 가볍게 혀를 찼다. 이 녀석은 만날 때마다 분신이 아닐 때가 없었던 것 같았다.
[00:26:49_78]
연우는 카운트를 확인하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그곳에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일이 보였다.
『이제 돌아가자.』
* * *
쿠쿠쿠쿠-
중앙 공동에서부터 시작된 지진은 곧 궁전 전체를 따라 퍼져 나갔다.
공허가 더 크게 출렁거리고, 천장에서부터는 돌가루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습에. 가장 먼저 긴장한 것은 궁전으로 계속 투입되던 용병들이었다.
『제기랄! 크악!』
『살려……! 컥!』
용병들은 이 위험한 상황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공허에 유리되어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은 요원하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언데드 군단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 그들을 짓뭉개 놓으니. 코끼리가 지나간 곳에 개미 무리가 짓밟히는 것과 똑같은 형국이었다.
[올림포스의 신, ‘타나토스’가 크게 기꺼워합니다.]
[천교의 신, ‘태산부군’이 고요한 눈빛으로 죽은 영혼들을 살핍니다.]
[에아의 신, ‘네르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필멸자이지만 생각보다 힘을 잘 다룬다는 사실에 만족한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데바의 신, ‘크시티가르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상황을 예의 주시합니다.]
……
[니플헤임의 악마, ‘헬’이 붉은 혀로 입술을 적십니다. 기쁜 마음에 몸을 부르르 떱니다.]
[‘아이쉬마-다이바’가 자신에게 배당될 영혼이 없는지 확인합니다. 이렇게 많은 수확을 두고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
[죽음의 신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합니다.]
[메시지: 그의.]
[죽음의 악마들이 기뻐합니다. 축제를 한껏 즐기면서 공통된 메시지를 내립니다.]
[메시지: 후계자.]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이 상황이 기꺼워 죽겠다는 듯, 자신들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용병들은 자신들의 죽음이 신과 악마들에게 한낱 유희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해야만 했다.
[아테나가 슬픈 눈으로 바라봅니다.]
전장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신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필두로,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신과 악마들이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올림포스의 신, ‘아레스’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천교의 신, ‘나타태자’가 소식을 듣고 찾아와 가만히 상황을 살핍니다.]
전쟁.
전투와 투사를 신위로 삼은 신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죽음이 퍼지는 것과 동시에 전쟁도 한창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저 단순한 싸움이었다면, 탑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전쟁 중 하나라 치부하고 그들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을 테지만.
[아스가르드의 신, ‘티르’가 법전을 천천히 내립니다. 공정한 눈으로 사태를 파악합니다.]
문제는 현재 연우가 혼자서 이 많은 병력들을 홀로 상대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정확하게는 연우가 거느린 권속들이 싸움을 벌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많은 인력들을 수용하고, 양성해서 압도적인 화력을 보이는 것은 어느 군주들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아주 오랜 과거에 흡혈군주 바토리나 이런 신위를 뽐냈을까?
그렇다 보니 전쟁과 관련된 신과 악마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살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왕 이후로, 처음으로 그들의 관심을 가져가는 존재였다.
[절교의 악마, ‘비마질다라’가 마음에 든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혼자서 이렇게 많은 군단을 상대하는 플레이어 ###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비마질다라가 권능, ‘구비타라’를 제안합니다.]
[아가레스가 자신의 것에 눈독 들이지 말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모든 신들이 무시합니다.]
[모든 악마들이 무시합니다.]
[케르눈노스가 침묵합니다.]
연우의 권능 목록 수도 그만큼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이 미친 신들이!』
콰아앙-
닥터 둠은 커다란 폭발과 함께 크게 튕겨 나고 말았다. 이미 몸을 보호하던 배리어는 내구도가 다했기 때문에 단단한 벽에 부딪히면서 받은 충격으로 척추가 박살 났다.
그는 이제 피를 토할 여력도 없었다.
계속된 공세를 막다 보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주변에는 그를 따르던 마법사들의 시체들만 가득했으니. 눈가에는 절망이 넘실거렸다.
그런 와중에 계속 메시지를 띄우는 신과 악마들의 모습은…… 그의 복장을 터지게 만들었다.
본래 마법사는 법칙을 추구하는 자들. 그래서 개중에는 무신론자들이 많았다. 98층에 있는 신과 악마들은 격이 높아져 초월성을 얻었을 뿐, 사실 근본을 따지고 보면 일반 플레이어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학설을 신봉했다.
닥터 둠이 그런 신봉론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마치 동물원 원숭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다만, 그가 신처럼 여기면서 추앙하는 옛 선배는 있었다.
마도술의 창시자이며, 드 로이와 함께 악마학을 열었던 시조. 현자의 돌에 접근할 수 있는 에메랄드 타블렛을 만들어 손에 쥐었다던 절대자.
파우스트.
문제는 그를 적으로 만났다는 점이었다.
「끈질. 기군.」
허공에 지펴진 두 개의 인페르노 사이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수록 닥터 둠이 받는 암담함은 더 커져만 갔다. 사실 부는 그가 알고 있는 파우스트만큼 강하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한때 여름여왕과도 대적했다던 자. 그의 마법은 고작 이런 수준이 아니라,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분명 기억에 결여가 많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모든 것을 압도하고, 짓누르는 힘.
악마마저 집어삼킬 것 같은 저 푸른 눈.
시그니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주인. 님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 라.」
공허가 열리면서 거대한 손이 나타나 닥터 둠을 덮어 왔다. 그에겐 더 이상 저항할 힘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왜 파우스트가 한낱 플레이어의 종복이 되어 있는지, 이해가 안 갈 뿐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나오지 않았던 괘는. 사실 그에게 할당된 미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스승, 님…….’
닥터 둠의 생각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퍼걱!
스스스-
닥터 둠의 영혼까지 삼키면서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지식과 기억을 회복시킨 부는 천천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동굴이 무너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위대한 주인님이 명령하신 대로, 마지막 남은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다.
「일어. 나라.」
그의 부름에 따라, 부와 연결된 모든 언데드들이 일제히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츠츠츠-
부가 사라진 자리로, 공허가 다시 내려앉으면서 닥터 둠의 시체를 지웠다. 그 위로 낙석이 와르르 쏟아졌다.
쿠쿠쿠!
* * *
[오시리스가 전장을 살핍니다.]
동굴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끝까지 남아 싸움을 벌이려던 플레이어들도 이제는 위기감을 느껴야만 했다.
칸과 아이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챙!
두 사람은 정말 부자지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검격을 나누다가, 강한 쇳소리와 함께 몸을 반대로 돌리면서 각자 다른 곳으로 오러를 날렸다.
스걱-
촤악!
칸을 감시하고 있던 두 주교는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목이 달아나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작스럽게 의식이 불발되면서 그들의 정신도 아주 잠깐 그쪽으로 쏠린 사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칸은 손에 맺힌 블러드 소드를 거두면서 몸을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칸!』
아이반은 싸늘한 아들의 어조에 울컥해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칸의 싸늘한 눈빛이었다.
『그 역겨운 입으로 제 이름을 담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그럴 자격 따윈 없지 않습니까?』
『아직도…… 내가 원망스러운 것이냐?』
『원망이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습니다.』
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당초 기대할 것이 있어야 원망이라도 하죠.』
『칸…….』
칸의 이름을 부르는 아이반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여태껏 철사자라며 전장에서 명성을 떨치던 그였지만, 아들 앞에서는 한없이 어깨가 움츠러드는 못난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칸은 불쾌하기만 했다.
『연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어머니를 버린 순간부터, 이런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 구는 것은 불쾌하기만 하다. 칸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공허가 내려앉으면서 그의 자취를 감췄다. 샤논과 본 드래곤도 조용히 물러섰다.
아이반은 차마 사라지는 아들을 붙잡지 못한 채, 멍하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가 이내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아직 동굴 곳곳에 수하들이 많이 남아 있을 터였다. 몇 명이라도 구해야만 했다.
칸은 어둠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렇게 사라지는 아이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없이 작은 어깨. 굽은 듯한 등. 어린 시절, 언제나 커다란 우산이 되어 그를 보호해 주고, 무등을 태워 주던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칸…….』
그리고 그런 착잡한 칸의 마음을 짐작한 듯, 어느새 니케가 나타나 조심스럽게 두 날개로 그를 안았다. 따뜻한 불길이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어떻게 카인 같은 녀석에게 너 같은 아이가 있을 수 있었던 걸까?』
칸은 농담을 던지면서 바쁘게 발을 놀렸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연우가 거느린 다른 권속이라던 리치가 틈틈이 메시지를 보내 주고 있어 탈출로는 이미 확보되어 있었다.
‘카인은 대체 그동안 얼마나 힘을 기른 걸까? 이렇게 많은 언데드를 양성하려면 분명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텐데.’
군주로의 각성을 노리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초인이 될 가능성도 높아 보였었는데. 게다가 아까 전부터 동굴을 가득 메우던 신과 악마들의 메시지들은 그에게 사도가 되라고 종용하는 중이었다.
‘여러모로 대단한데.’
그렇게 묘한 느낌이 들 무렵.
어느덧 갑자기 공허가 확 사라지고, 밝은 빛이 느껴졌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동굴이 그대로 내려앉으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여진이 산자락을 울리는 가운데.
칸은 저 멀리, 이미 밖에 도착해 있던 연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안겨서 잠을 자고 있는 도일까지도.
『도일!』
칸은 재빨리 연우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마침 빅토리아가 그를 발견하고 반색하면서 와락 안겼지만, 칸은 자기도 모르게 그 걸 피해 연우에게 다다랐다.
『야!』
졸지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안게 된 빅토리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칸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도일을 바라봤다.
녀석은 여태껏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처럼 조용히 잠에 빠져 있었다.
칸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자신이 알고 있는 72선술을 빠르게 되짚었다. 도일을 망혼인(亡魂人, 꼭두각시 상태)으로 만든 것도 선술이었으니, 같은 선술이면 해제할 방법이 있겠다 싶어서였다.
파르르-
그때, 갑자기 도일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리고 조금씩 떠지면서 칸을 시야에 담았다.
『……형?』
『너!』
칸은 도일을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이 사무쳤다. 이렇게까지 고생시킨 것에 미안했고, 이렇게 다시 눈을 떠 준 것이 감사했다.
『아 씨, 징그럽게 왜 이래, 갑자기?』
도일은 그런 칸의 행동이 낯선 나머지 어떻게든 밀쳐 내려고 아등바등했지만.
칸은 포옹을 절대 풀지 않았다.
여전히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던 빅토리아도 어느새 다가와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빙왕도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었다.
그렇게.
모든 소란이 끝났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 * *
『흑흑!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 주인?』
니케는 날갯죽지로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훔치다가, 이상하게 연우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아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주인?』
연우의 시선은 칸과 도일이 아닌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테나가 슬픈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쪽을 보고 있는 신과 악마들의 시선은 많았다.
이번에도 큰 활약을 펼치면서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이제 조금씩 그를 칠흑왕의 후계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고, 추가로 전쟁과 관련된 신과 악마들도 호의를 갖기 시작하면서 권능 예정 목록도 800여 개로 부쩍 늘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유독 한 개의 시선만은 달랐다. 탐욕이나 욕심에 찬 시선이 아닌, 슬픈 시선.
대체 왜?
연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마군은 물리쳤고, 칸과 도일도 구했다. 이제 모든 일을 정리했으니 다시 타르타로스로 넘어가 하데스를 돕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왜 아테나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혹시 타르타로스에 다른 변고가 벌어졌나? 하지만 타르타로스는 천계의 시선이 차단되기 때문에 아테나가 상황을 알 수 없을 텐데?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절대 가정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칸.』
『왜?』
칸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도일을 달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연우를 돌아봤다. 이상하게 연우의 목소리가 싸늘했던 것이다.
『물러서.』
『무슨……!』
『물러서!』
연우는 그답지 않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칸은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일어나 도일에게서 떨어졌다. 빅토리아와 빙왕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멀찍이 물러섰다.
도일은 홀로 가만히 앉아 연우를 바라봤다. 입가에 미소는 짓고 있지만, 이상하게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인형처럼.
『언제까지 연기할 생각이지?』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도일을 노려봤다.
『대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