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퀴네에 제작 (1)
“……철사자단.”
“너희들은 아군이냐, 아니면 적군?”
크로이츠와 환영기사단은 비룡군단을 이끌고 20층 스테이지의 하늘을 가로지르던 중, 패잔병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부상자들로 가득한 무리. 입고 있는 갑옷은 죄다 부서지고, 플레이어들도 자신들처럼 크게 다친 다른 동료들에게 서로 의지한 채로 겨우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고행의 산 전체에 걸쳐서 그런 이들을 숱하게 봤기 때문에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뒤늦게 그들의 머리 위로 힘없이 펄럭이는 깃발을 발견하고,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최강의 용병 집단이라 불리던 철사자단이 엉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가진 전력은 환상기사단도 쉽게 상대하기 힘들다. 만약 저들의 수장인 철사자가 조직의 성질을 용병이 아닌 클랜으로 규정지었다면, 진즉에 신흥 거대 클랜으로 꼽혔을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참혹한 꼴이라니.
꽤 많은 병력을 데리고 간 것을 감안한다면. 머릿수도 8할가량이 사라진 것 같았다. 전멸이나 다름 없는 수준이었다.
철사자 아이반은 예리한 눈길로 크로이츠 등을 노려봤다. 여차하면 칼을 빼 들 기세였다.
크로이츠는 침음을 삼켰다. 아무리 다쳤어도 맹수는 맹수인 모양이었다. 아이반의 살기가 여전히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 그만큼 다쳤으니 더 예민한 것인가.’
그렇다면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크로이츠는 존경하는 선배이기도 한 아이반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원래는 적으로 만날 것이었으나, 굳이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아이반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환상연대가 독식자와 함께하려 한다는 소문은 듣긴 했지만. 사실이었나 보지?”
“굳이 우리들의 방향성을 말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드오.”
크로이츠의 대답은 꼿꼿했다. 언제나 바르다는 인상을 줄 만한 사람의 태도였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없지. 단, 이건 알아 둬라.”
그런 크로이츠를 보면서.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다음부터는 너희도, 나의 먹잇감이란 것.”
화아악-
살벌한 투기가 퍼져 나갔다.
자신의 영역을 넘어온 자를 노려보는 맹수의 눈길.
하지만 크로이츠 역시 아이반만큼은 아니더라도 숱하게 전장을 누벼 온 용장. 이 정도 살기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궁금한 건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손발이 좀 오그라들진 않소?”
“…….”
“여하간 철사자단의 스탠스는 알겠소. 그 말씀, 연대장께 그대로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소.”
아이반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찡그리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콰르르릉-
갑자기 저 먼 산등성이 너머로, 수십 개의 우레가 한꺼번에 터진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하늘이 샛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보군.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소. 그럼.”
크로이츠는 비룡의 고삐를 잡아 당기면서 다시 비행을 시작했다. 환영기사단이 곧바로 뒤따랐다. 백여 개가 넘는 와이번이 편대를 형성하면서 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이반은 그쪽을 보며 이를 바득 갈다가, 다시 수하들을 독촉했다.
“우리도…… 빨리 본단으로 복귀하도록 한다.”
* * *
크로이츠가 오행산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것은 이제 수련의 명소로 불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망가진 산자락과.
거친 격전의 흔적, 그리고 강렬한 신력을 내뿜으면서 쓰러지고 있는 연우의 모습이었다.
『카인!』
『이보게! 정신 차려!』
빅토리아와 빙왕이 다급하게 연우에게 뛰어가고 있었다. 칸은 도일을 부축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 판단을 내리지 못해 방황했다.
크로이츠는 비룡을 착륙시키지도 않고, 곧장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렸다.
『잘못 건드리면 위험하오. 잠시민 비켜 주시오.』
치유 마법을 발동시키려던 빅토리아는 갑작스러운 크로이츠의 난입에 얼굴을 굳혔다.
빙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크로이츠의 앞을 가로막았다. 싸늘한 기운이 그를 따라 감돌았다. 갑작스레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크로이츠를 경계한 것이다. 혹시 칸을 노리는 연합일지도 모르니.
『환영기사단, 아니, 환상연대가 여긴 무슨 일이지?』
『오해가 있는 것 같소만, 우린 연합이 아니오. 연대장과 독식자는 친우 사이오. 혹시 듣지 못하시었소?』
『환상연대장과 카인이?』
물론 들었을 리가 없었다. 연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절대 남들에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결국 빙왕이 더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자, 정작 답답해진 쪽은 크로이츠였다.
『자세한 건 이따 상세하게 설명드리겠소. 다만, 지금은 한시가 급하오. 독식자가 지금 앓고 있는 병, 신열(神熱)인 것 같은데 지금 잡지 못한다면 정말 위험해진단 말이오! 제발 비켜 주시오!』
크로이츠는 연우에게서 풍기는 열을 보고 인상을 굳혔다. 연우를 따라 튀는 스파크는 갈수록 심해져서 빅토리아도 접근하기 힘들 정도였다. 파생되는 열도 어마어마해서 몸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빙왕도 사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강하게 막아서지 못하고, 빅토리아를 힐끗 쳐다봤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눈빛. 빅토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으로서는 힘들다는 뜻이었다.
결국 빙왕은 기운을 거둬들이면서 옆으로 물러섰다.
크로이츠는 단번에 연우에게 뛰어가 상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런. 벌써 마력 기관에까지 미쳤나……!』
9백여 개나 되는 권능을 한꺼번에 수용한 대가는 너무 컸다.
권능은 단순한 스킬이 아니다. 권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의 의지를 몸에 심는다는 뜻이다.
그런 것을 한 개만 담아도 힘들 판국에, 수백 개를 담는다? 일개 필멸자가 할 행동이 절대 아니었다. 영혼이 짜부라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만약 연우도 미후왕의 허물을 흡수하면서 잠재력을 크게 개화시키지 않았다면, 절대 시도조차 못 했을 테지.
그래서 여차여차 어떻게든 버티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래도 후유증까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신들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 그런 흔적들이 뒤엉키다 보니 몸에 잔뜩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육체에서 발화된 신열이 어느새 내장 기관은 물론, 마력 기관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빨리 열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마력을 영구히 상실하거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었다.
크로이츠는 성검 줄피카르를 뽑아 바닥에다 꽂았다. 그리고 중앙에 박힌 보석에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눈을 감으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보석이 연한 노란빛을 띠면서 호박석으로 변했다.
호박석의 상징은 건강. 연우의 몸 위로 성력이 내려앉으면서 뜨겁게 달아오르던 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빙왕과 빅토리아는 엄숙하다 못해 신비로워 보이는 광경을 놀란 눈으로 지켜봤다.
『무엇을…… 한 거지? 열이 가라앉고 있어.』
빙왕은 연우의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의 기운을 써 보았었다. 옆의 빅토리아 역시 치유 마법을 걸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연우의 열은 낫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졌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기한 힘으로 낫고 있으니 놀라웠다.
『성력(聖力)인 듯해요.』
빅토리아가 그것을 가만히 살피면서 대신 대답했다.
『성력?』
『예. 풀이하자면 ‘성스러운 힘’, 뭐, 그런 뜻인데. 자강과 활력에 큰 보탬이 되도록 해요. 마기와는 상반되고요.』
『신력과 비슷한 건가?』
『비슷하지만 개념이 조금 달라요. 신력은 신들에게서 허락받아 내려받는 힘이고, 성력은 발산하는 힘이니까요. 마기와 요력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과 같아요.』
빙왕이 쓰게 웃었다.
『더 모르겠군.』
천생 무도가인 그가 상세하게 알고 있는 힘은 사실 마력밖엔 없었다. 속성을 부여하고, 무도를 발전시키는 보조적인 힘.
『힘의 세세한 구분은 사실 저 같은 마법사나 연금술사들이 주로 다루는 분야이니까요. 다만, 성력을 품고 있는 물건은 좀처럼 보기 드문데…… 신기하네요.』
빅토리아는 아나스타샤의 만병천고에 박혀 있는 귀물과 요병을 떠올렸다. 요력을 품고 있어 언제든 요괴로 변할 수 있는 것들.
하지만 크로이츠가 쥐고 있는 성검 줄피카르는 그것들과 전혀 반대된 속성과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저 성검을 보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일단 급한 불은 껐소.』
그때, 크로이츠가 연우에게서 천천히 손을 떼면서 빙왕과 빅토리아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신열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이 아니오. 요양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 곳이 필요한데. 혹시 상위 치유사를 알고 있소?』
빅토리아는 가장 먼저 연우의 권속인 부를 떠올렸다. 소유주가 아니고서도 아다만틴 노바를 사용해서 치료를 하던 그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까 전부터 계속 모습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대주교에게 당한 상처가 컸던 것일까.
그러다 다른 사람에 생각이 미쳤다. 아나스타샤. 천 년을 묵으면서 갖가지 주술에 능통한 스승이라면 뭔가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칸도 도일의 임시 치료가 끝났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누가 보면 도일은 편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절 따라오세요.』
빅토리아가 앞장서기 시작했다.
* * *
“……아무래도 올해 점을 쳐 보면 ‘제자 때문에 골칫거리가 가득하다’는 말이 꼭 나올 것 같단 말이지.”
아나스타샤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곰방대를 깊숙하게 빨아들였다.
간만에 스트레스도 풀 겸해서 미동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에 다짜고짜 난입한 제자는, 이제 꼴도 보기 싫은 놈과 별 이상한 놈팡이를 치료해 달라고 강짜를 부려 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꺼지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스승님.”
무릎까지 꿇고 고개를 숙이는 제자를 보니 또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아무리 한심해 보여도, 그래도 정을 준 제자였으니까.
“제자 부탁, 들어줘.”
“넌 또 무슨 자격으로 지……!”
“대가는 내가 지불할 테니.”
여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프레지아가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아나스타샤의 주변을 맴돌면서 바이 더 테이블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으렷다?”
“신의는 장사꾼의 생명이지.”
“흥! 한 번 그걸 꺾었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겠지.”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빅토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내놔.”
빅토리아는 순순히 아다만틴 노바를 건넸다.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아다만틴 노바에 박혀 있는 귀속 계약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원래대로라면 이것을 해제하는 데 한참 세월이 걸리겠지만.
슥-
손바닥으로 겉면을 살짝 어루만지자, 한 겹이 깎이면서 귀속 계약도 저절로 사라졌다. 강제로 뜯어낸 것이다.
우우웅!
아나스타샤의 요력을 받은 아다만틴 노바가 시퍼런 빛을 토해 냈다. 빅토리아가 다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광채가 일어나면서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화아아-
바닥에 나란히 누운 연우와 도일의 머리 위로 새하얀 광채가 내려앉았다.
아나스타샤는 곰방대를 입에 물면서 가만히 경과를 지켜봤다. 뻐끔뻐끔, 하얀 연기가 방을 가득 채웠다.
칸은 프레지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
“고맙다는 인사는 넣어 두세요. 칸과 마찬가지로, 카인도 저에게는 중요한 후원 대상이니까요. 그가 잘못된다면 저희로서도 손해가 막심할 뿐입니다. 그리고 폭시 테일은 저희도 늘 주시하고 있었으니, 투자를 한다고 생각하면 되고요.”
아나스타샤가 옆에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재주는 내가 부리는데, 수금은 네년이 하는구나.”
“그러니 평소의 인망이 중요한 거야.”
프레지아는 아나스타샤에게 일침을 날리고, 다시 칸을 돌아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리고 사실 저희가 잘못한 부분도 있고 말이죠.”
“……?”
칸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프레지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엷은 미소만 띨 뿐.
그때.
“으으음.”
도일이 몸을 조금씩 뒤척이기 시작했다.
칸이 재빨리 도일에게 다가갔다.
뒤따라 아나스타샤의 설명이 따라붙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아주 오랫동안 영혼이 가사 상태에 빠져 있어 많이 약해진 상태다. 일단 회복과 더불어 보신하는 방향으로 치료법을 찾을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눈을 뜨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흥. 그걸 알면 내가 대라신선질이나 하고 있지, 이런 궁벽한 곳에서 오입질이나 하고 있을까?”
“…….”
“스승님!”
빅토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아나스타샤는 짜증 섞인 어투로 대답해야 했다.
“길어야 닷새. 짧으면 이틀.”
그러고는 더 이상 있기 지루한지 방을 훌쩍 나섰다.
칸은 아나스타샤에게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혈색이 돌아 살짝 붉어진 도일의 손을 꽉 잡았다. 힘을 내라는 듯이. 어떻게든 이겨 내라는 듯이.
빅토리아도 말했었다. 도일이 살아 있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대주교의 거대한 영혼이 자리 잡고 있는 동안에 영혼이 짜부라지거나, 육체에서 튕겨 나지 않았던 게 신기할 정도라고.
하지만 칸은 그게 도일의 노림수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폭시 테일. 여우의 꼬리라는 별칭이 있는 만큼, 도일은 어렸을 때부터 아주 똑똑한 아이였다. 아마 대주교의 그릇으로 점지되었을 때부터 진즉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미래를 기약하며. 언젠가는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 믿었겠지.
그만큼 형을 믿었단 뜻이 아닐까?
‘이겨라. 어떻게든.’
이제 칸이 도일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옆에 나란히 누운 연우를 바라봤다. 여전히 열이 조금씩 감돌고 있는 그를 보는 내내, 칸의 눈동자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너도 어서 일어나. 그래야, 네 종이 되든 말이 되든 할 거 아냐.”
내가 동생을 찾은 것처럼, 너도 어서 동생을 찾으러 가야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