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퀴네에 제작 (2)
어둠이 어스름하게 깔린 밤.
“궁상맞게 여기서 뭘 하고 있나?”
녹턴은 트와이스와 함께 모닥불을 쬐고 있던 중, 갑자기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형님, 오시었수? 안 그래도 마침 술도 따끈하게 데웠던 차였는데. 하하! 딱 맞게 오시었소.”
트와이스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옹하기 위해 양팔을 뻗었다. 한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빙왕은 그런 트와이스와 술병을 번갈아 보더니, 혀를 차면서 포옹 대신에 트와이스의 이마를 검지로 밀었다.
“그 징그러운 얼굴부터 치우려무나. 목소리를 일부러 그렇게 쥐어짜면 정말 목소리가 바뀐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칫. 꼰대 같은 소리 하시기는.”
트와이스는 탐탁지 않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근엄한 중년인의 인상으로 도저히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콰드득, 콰득-
곧 얼굴과 골격이 이리저리 틀어지더니 키와 덩치가 왜소하게 변했다. 짙은 주름살이 있던 얼굴도 어느새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를 가진 젊은 여성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많이 잡아 봐야 이십 대 중반이나 넘겼을까? 조금 앳된 인상도 섞인 얼굴이었다. 중년인의 얼굴에서는 어울리지 않던 인상이, 지금은 귀엽게만 보였다.
차가운 살귀(殺鬼)로 유명한 S급 용병 트와이스가, 사실 이렇게 말 많은 여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여간 재미없어.”
“재미없는 건 나다만. 대체 왜 그 어울리지 않은 징그러운 아저씨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
“음! 나 같은 미소녀가 혼자서 돌아다니면 위험하니까?”
빙왕은 뻔뻔하게 대답하는 트와이스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잔재주가 많고, 살가운 성격인 트와이스는 이따금 손녀처럼 느껴졌다.
“오셨습니까?”
적당히 빈자리에 앉으니, 녹턴이 고개를 숙였다.
빙왕도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트와이스가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쫑알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또 왜 그러느냐?”
“녹턴 아저씨 좀 혼내 주세요.”
역시나 익숙한 광경.
빙왕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또 너 버리고 가던?”
“그렇다니까요. 글쎄.”
전투가 벌어지면서 자신만 버리고 쏙 가 버렸다나 뭐라나. 그 때문에 이상한 아저씨들과 같이 돌아다니고, 덕분에 뜻하지 않게 도와주느라 고생만 죽어라 했다는 내용이었다.
발푸르기스 밤의 공방전이 끝난 후. 아트란의 고용 용병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 세 사람은 이상하게 같이 뭉쳐 다니기 시작했다.
셋 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 용병 신분인 데다가, 딱히 일거리도 없어서 굳이 떨어질 필요가 없어서였다.
게다가 의외로 성격도 잘 맞았다.
빙왕은 타인을 잘 배려해 줄 줄 아는 연장자였고, 녹턴은 말이 없어도 자기 할 일은 묵묵히 알아서 잘 처리하는 성격이었다. 트와이스가 조금 성격이 가볍긴 했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크게 간섭하는 바 없이, 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여행을 좋아하고,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미식가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더더욱 유대감이 잘 형성되었다.
여태 자신의 정체를 잘 노출하지 않던 트와이스가 거리낌 없이 본 모습을 드러낸 게 그 증거였다.
그렇게 이뤄진 팀은 탑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빙왕의 사정 때문에 20층에 흘러온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빙왕은 연우와 함께하게 되고, 녹턴은 강자와 겨뤄 보겠답시고 훌쩍 솔로 플레이를 떠나 버렸으니.
트와이스가 억울하다면서 징징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빙왕은 자신도 저지른 죄가 있으니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생 많았다면서 잘 달랬다.
“칫.”
그래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트와이스는 살짝 토라져 이내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빙왕은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트와이스는 쫑알쫑알 떠드는 내내 녹턴이 어떤 반응을 보이길 기대하면서 힐끔힐끔 그를 훔쳐봤다. 하지만 녹턴은 끝까지 무반응이었다. 그러니 짜증이 날 수밖에.
눈치 없는 남자만큼 속 썩이는 것도 없지. 빙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녹턴은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빙왕을 보면서 말했다.
“어르신.”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나?”
녹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것참. 어렵구만.”
녹턴은 스승이었던 무왕에게 파문 선언을 듣고 마을을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늘 마음속에 공허를 안고 지내 왔다.
‘자극’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도, 관광 명소를 찾아다니는 것도. 그리고 강자를 찾아 일부러 격한 싸움을 벌이는 것도.
뭔가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있다면 텅 빈 마음을 잠깐이나마 채워 주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녹턴은 단 한 번도 어떤 것으로도 충족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고아였다고 했었지?”
“예. 정확하게는 기억이 없는 것이지만요.”
녹턴은 열 살 이전의 기억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외뿔부족 마을 앞에 있었고, 우연히 자신을 발견한 무왕의 호기심에 거둬져 제자가 되었다.
“그럼 혹 과거를 찾아보는 건 어떻겠나? 자네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는지를 안다면. 그리고 자네가 누군지를 안다면 뭔가 나아지지 않을까? 결여된 기억이, 자네의 마음을 자꾸만 좀먹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잖나.”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만…….”
“찾을 수 없었나 보군.”
“그런 세상이니까요.”
“하긴. 그도 그렇지.”
빙왕, 자신도 고아 출신이었으니. 탑의 세계에선 그런 과거를 가진 자들이 아주 많았다.
“대신에 어르신의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내 이야기? 아, 자네 사제를 이야기해 달라는 거지?”
녹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옛 스승에게 새로운 제자가 생겼다는 말은 들었었다. 그리고 스치듯이 보기도 했었고. 그때 느낀 감정은 ‘저놈은 사형이나 나와는 다르다’였다.
사형인 검무신은 욕심이 많아 쫓겨났고, 자신은 갈피를 잡지 못해 버려졌다. 그렇다면 새로운 제자는? 불타고 있었다. 스스로를 불구덩이에 집어넣어, 혼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건 자멸이었을까. 아니면 빛나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둘 다였을까.
여하튼 녹턴이 새로운 사제에게 받았던 인상은 아주 강했고, 떨어져서도 이따금 그의 소식을 일부러 알아봤다.
여섯 신성이 된 이야기. 트리톤과 전쟁을 치른 이야기 등등.
그리고 때마침 빙왕이 사제와 함께하기도 했으니, 궁금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는지.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혹시 도움이 될까 싶었다.
“카인. 참 재미난 친구긴 하지.”
빙왕은 연우를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아주 잠깐 함께했지만, 제 스승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준 사람이었다. 여차하면 계속 같이 다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비록 깨어난 모습은 보지 못하고 나서야만 했지만. 곧 얼마 안 있어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빙왕은 어느새 녹턴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 트와이스를 보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천천히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 * *
[네르갈이 자신을 모시라고 조언합니다. 죽음은 자신만이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며 충고합니다.]
[오시리스가 손을 내밉니다.]
[아레스가 자신의 종이 될 것을 강권합니다.]
[아몬이 당신을 보며 군침을 삼킵니다.]
[비마질다라가 속삭입니다.]
[케르눈노스가 침묵합니다.]
……
[이름을 모르는 타계(他界)의 신이 당신을 탐합니다.]
너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연우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어느 유혹에도 넘어가지 마라. 넌. 너는 나의 것이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나, 동부의 대공! 아가레스의 권속이 될 운명이란 말이다! 대답해!]
어떻게 크기를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것들이 귓가에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날 받아들이라고. 나의 종이 되라고. 또 어떤 것은 크게 외치며 윽박지르기도 하고, 강제로 손을 뻗어 그를 끌어오려는 것도 있었다.
너무 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기에. 그리고 저마다 하고 싶은 말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통에 벌 떼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명까지 들릴 정도였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활짝 열린 채널링을 통해 들어온 신과 악마들의 간섭은 그만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냉혈 특성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남아 있는 정신마저 붕괴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마저도 태양 앞에 놓인 반딧불처럼 너무 작아서 언제 바스러질지 몰랐다.
연우의 육체를 태우고 있는 신열도 그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수많은 신들이 오고 가면서 남긴 상처들이 누적되어 육체를 좀먹어 가는 중이었다. 아니, 정신을 흩어 놓고 있었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되면서 헤븐윙의 형이라고 했던 것이냐? 그리고 날 삼켰나? 하! 우습구나. 이따위로 할 것이라면 그냥 죽는 게 낫겠어.』
그때, 이명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누구의 것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지?
설마…… 여름여왕?
『얌마. 어서 일어나. 게을러 빠져서는 안 일어나? 난 노는 게 좋지만 넌 그럼 안 되지? 약속 지켜야지?』
그다음 이어지는 목소리는 분명 미후왕 허물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분명 세상에서 사라지고, 자신이 흡수한 존재들이었다. 절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냥 단순한 환청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름 없는 누군가가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신들의 목소리를 차단하기 시작합니다.]
[다수의 신들이 항의합니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코웃음을 칩니다.]
[이름 없는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노려보는 악마들에게 중지를 날립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협박합니다.]
[이름 모를 다른 누군가가 꼬우면 덤비라고 도발합니다.]
[대다수의 채널링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현재 연결된 채널링 수: 4개]
1. 헤르메스(신, 올림포스)
2. 아테나 (신, 올림포스)
3. 아가레스(악마, 르 인페르날)
4. 혼돈(악마, 절교)
[비마질다라가 재연결되었습니다. (악마, 무소속)]
[케르눈노스가 재연결되었습니다. (신, 무소속)]
[현재 연결된 채널링은 총 6개입니다.]
연우는 찢어질 것 같던 두통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한순간에 착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멋대로 요동치던 신의 인자들이 얌전해지면서 신열도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점차 정신도 또렷해졌다.
‘누구지?’
연우는 누군가가 도와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시지의 내용만 봐서는 두 명인 것 같은데. 부산스럽던 채널링을 강제로 끊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 거지?
순간, 어렴풋하게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떠올랐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궁금증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추가로 연결된 건……. 비마질다라와 케르눈노스밖에 없나?’
비마질다라는 절교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왕이었다. 오로지 인생을 투쟁으로만 점철한다는 종족, 아수라의 왕 중 왕(王中王).
데바에서 가장 유명한 번개의 신, 인드라와도 전쟁을 치렀다는 신화를 품고 있기도 했다.
최근 들어 그에게 부쩍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채널링이 강제 종료된 상태에서도 다시 재연결을 하면서까지 모습을 비췄다.
다만,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예전에는 소속이 ‘절교’라고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었으면서, 지금은 무소속으로 분류되었다는 점이었다.
기존 사회에서 격리될 경우, 적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 텐데. 갑자기 왜 나온 것일까?
그리고 그건 케르눈노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레베카를 되살린 것에 대해 짙은 원념을 품고 있던 그는 한동안 모습을 비치지 않고 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직접적인 연결을 하면서까지. 레베카가 최근 들어 말이 부쩍 없어진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연우는 그런 생각과 함께.
화아악!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자신의 바로 앞에는 한쪽 무릎을 세우며 불량한 자세로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워 대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고요하게.
등 뒤로, 아홉 개의 여우불을 잔뜩 피우면서.
“쉿. 모두 자고 있으니 떠들진 말고.”
연우는 인사를 하려다가 뒤늦게 해가 진 밤이란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아나스타샤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연우가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아나스타샤의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신과 악마들이 함께할 수 있는 거지? 그것도 이 세상에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타계의 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