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43화 (343/862)

18화. 퀴네에 제작 (3)

신과 악마는 대체 뭘까.

그들은 왜 모든 것을 ‘초월’했다고 하면서 98층에 억류되어 있는 걸까.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고, 해답을 찾고자 했지만. 언제나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난제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98층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거나, 하계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이들보다 훨씬 많은 신과 악마들이 여러 무리를 이루면서 살아간다는 점이고.

탑 속에 있는 존재들 외에도, 우리가 타계 혹은 이계(異界)라고 부르는 다른 세상에 머무는 신들이 이따금 이곳의 문을 두들긴다는 점이었다.

98층에 억류되어 있는 신과 악마에 대한 비밀은 풀린 게 전혀 없었다.

겨우 알아낸 건, 77층에서 천계와 하계를 단절시키고 있는 올포원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탑에 들어서지 못한 타계의 신에 대한 정보는 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아니. 하나가 더 있긴 하지.’

연우는 희미했던 연결 고리가 다시 또렷해지고 있는 부가 떠올랐다.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를 통해, 타계의 신이 준 정보를 바탕으로 에메랄드 타블렛을 제작하여 현자의 돌을 만들고자 했던 대마도사.

타계의 신과 처음으로 접촉을 한 플레이어란 뜻이었다.

다만, 부는 현재 자신이 누군지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 대부분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 그래서 타계의 신과 어떻게 거래를 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기억이 빠른 속도로 복원되는 중이니 머지않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 뿐.

그런데 타계의 신이 접근을 했다?

‘메시지 중에 분명히 그런 내용이 있긴 했었다. 어렴풋하지만 이질적인 것도 느껴졌었고.’

그럼 타계의 신은 부를 통해서 자신에게 접근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우불이 흉흉하게 떠다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연우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 * *

연우가 눈을 떴다는 소식은 금세 일행들에게 전해졌다.

“야! 일어났다며?”

“몸은 괜찮아?”

칸과 빅토리아가 자다 말고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나타났다. 뒤이어 크로이츠가 조용히 따라왔다.

“고맙다. 정말로. 그리고 미안했다.”

칸은 연우와 마주한 상황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빅토리아가 놀라서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칸은 고개를 저으면서 굽힌 무릎을 펴지 않았다.

“네가 아니었으면 우린 지금쯤…….”

“도일은?”

“어? 도일도 방금 전에 일어났어. 의식도 있고, 우리도 알아봐.”

“그럼 됐다. 일어나.”

“하지만…….”

“그럼 계속 그렇게 있던가. 빅토리아, 빙왕 어르신은 가셨습니까?”

연우는 뚱한 말투로 말하고 빅토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졸지에 연우에게 이런저런 감사와 사과의 인사를 하려던 칸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엉거주춤하게 있어야만 했다.

빅토리아도 살짝 당황해하다가, 연우의 노림수를 깨닫고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 먼저 가셨어. 여기서 이제 당신이 하실 일은 없으시다고. 대신에 일어나면 몸 정양 잘하라고 전해 달라 하셨어.”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빙왕은 억지로 끌려다닌 경향이 컸으니.

하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 꾸릴 자신의 클랜으로 초빙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인연이 된다면 또다시 만나겠지.’

탑의 세계는 아주 넓은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좁으니까 말이다.

그때, 칸은 여전히 화제가 자신에게로 오지 않자,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면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험험!”

뻘쭘했던지 괜히 헛기침을 하는 동안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런데 카인.”

“왜?”

“어쩌다 보니 네 사정을 들었는데.”

“……?”

“이번에는 내가 돕고 싶어서. 뭐 시킬 거 없냐?”

칸은 깊게 가라앉은 얼굴로 연우를 바라봤다.

연우는 순간 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니케를 바라봤다. 니케는 눈에 띄게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면서 새삼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쭈뼛 선 깃털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딱 봐도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 무슨 말을 했을지 불에 보듯 뻔하게 그려졌다.

연우는 다시 칸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재촉할 필요 없다. 어차피 하기 싫다고 해도 실컷 부려 먹을 생각이었으니까.”

“……응?”

칸은 벙찐 표정이 되고 말았다. 보통 이럴 때는 친구 사이에 서로 돕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면서 어깨를 두들겨 주고, 의기투합하고, 우정을 재확인하면서 서로 술 한잔을 기울이고…… 뭐, 그런 감동적인 레퍼토리로 가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째 연우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계속 뭔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칸은 문득 연우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무안해질까 봐 저러는 것이다.

“역시 그런 거였구만.”

으흐흐. 칸은 실실 웃으면서 연우에게 다가갔다.

“……오지 마라.”

“부끄러워하긴.”

“그런 거 아니다.”

“천하의 독식자가 이럴 때도 다 있네? 크.”

“그런 거 아니래도!”

“이 형한테 사실대로 말해 봐봐. 너 지금 얼굴 빨갛지? 그 가면 좀 벗어 봐.”

“저리 가!”

익살맞게 웃으면서 다가오는 칸과 슬쩍 엉덩이를 뒤로 빼는 연우. 칸이 와락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방 안은 둘의 몸싸움으로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빅토리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나이를 먹어도 애라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언젠가 보고 싶었던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 * *

결국 연우와 칸의 몸싸움(?)은 연우가 이기는 것으로 끝났다.

“……개새끼. 진짜 그렇다고 주먹을 쓰냐?”

칸은 시퍼렇게 멍든 눈덩이를 계란으로 문대면서 중얼거렸다. 제 딴에는 막아 본다고 막은 건데, 이미 하이 랭커 급에 다다른 연우의 주먹질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연우는 말없이 비뚤어진 가면을 고쳐 썼다. 이 가면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칸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가면 안쪽의 얼굴은 대체 어떨까? 가면을 쓰는 건 평소 연우가 둘러대는 변명처럼 얼굴이 추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사연이 있는 걸까? 어쩌면 잃어버린 동생을 되찾겠다는 사연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연우가 한창 신열을 치료받고 있을 때, 가면을 벗기려 하는 아나스타샤와 빅토리아의 손길을 제지한 사람이 칸이었다.

분명히 가면을 벗지 않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 본인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놔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그런 사정을 니케로부터 듣고, 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겉으로는 경망스럽게 보여도, 속이 깊은 녀석이었다. 늘 생각했던 것처럼 함께해도 괜찮을 녀석이었다.

‘다만, 판트나 에도라에게 자격지심을 갖고 있던 게 조금 걸리는데…… 시간이 그만큼 지났으니 그때의 감정도 사라졌으려나?’

튜토리얼 때 칸과 도일이 가장 경계하던 사람들이 바로 판트와 에도라였으니.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는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칸도 그만큼 강해졌고.’

칸이 부리는 72선술은 연우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아주 깊었으니까.

연우도 미후왕의 허물을 삼키면서 선술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졌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투에만 특화된 것일 뿐. 선술도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에, 칸이 이룬 경지는 그와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칸.”

“왜?”

칸은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계란이 눈두덩이 위를 구르고 있었다.

“내가 어디로 갈 건지는 들었지?”

“어.”

“한번 들어가게 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위험하기도 하고. 신격들이 싸워 대는 전장이니까. 탑과는 달라.”

칸은 연우의 목소리가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계란을 내리고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도일의 병간호는 어떻게 하려고? 마군의 선술을 물리치려면 네가 있어야 하지 않나?”

도일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해도, 오랫동안 대주교의 그릇으로 쓰이면서 마기에 깊게 침식된 상태. 물리치기 위해서는 칸의 선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아, 그건 빅토리아가 도와주기로 했…….”

탁!

칸이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연우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도일이 서 있었다. 조금 지친 기색이었지만, 또렷한 눈을 하고서.

“저도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카인 형.”

“이제 정신이 드나 보구나.”

“예. 덕분에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 말은 칸에게 해.”

“칸 형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고요. 오히려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쳤으니 혼나야 하지 않을까요?”

칸처럼 도일도 여전했다. 연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아까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안 돼.”

“저도 같이 타르타로스로 데려가 주세요.”

“야! 너 지금 그 상태로 뭘 하겠단…….”

칸이 크게 놀라면서 도일을 말리기 위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파지직-

칸은 얼마 접근하지도 못하고 주춤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도일을 따라 시커먼 마기가 스파크처럼 튀어 오르고 있었다.

도일은 그걸로도 모자라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튀어 오르던 마기가 선풍을 그리면서 손바닥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 자그마한 구체를 형성했다. 능숙한 마기 제어였다.

칸은 놀란 눈으로 도일을 바라봤다. 용마안으로 구체를 살핀 연우만 어떻게 된 건지 눈치채고 가볍게 혀를 찼다.

“대주교의 잔재로군.”

“맞아요.”

도일의 몸 곳곳에는 마기가 남아 있었다. 대주교의 그릇으로 있으면서 쌓였던 마기가, 대주교가 쫓겨나면서 고스란히 남아 버린 것이다.

“거기다 대주교의 지식도 상당히 남았고요.”

정확하게는 대주교의 사념일 것이다. 녀석이 했던 사고, 생각, 지식 등등 여러 정보들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기연이라고 볼 수도, 도일에게는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대주교의 심득이라면 분명 앞으로의 성장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게다가 대주교가 쌓은 순도 높은 마기도 있지 않은가. 재료는 충분했다.

“사실 이런 게 가능한 건, 페르세포네 님 덕분이기도 해요.”

“페르세포네가?”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

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교의 영압에 밀려서 저승으로 갈 뻔했던 저를 그동안 이승에 묶어 주셨어요. 곧 깰 수 있을 테니 마음 편하게 먹고 있으라고 하시면서…….”

대주교의 감각을 피해 어떻게 그동안 살 수 있었나 싶었더니. 페르세포네가 힘을 썼다면 말이 되었다.

“하지만 신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개입하려면 사도가 아니면 힘들 텐데?”

“저…… 이미 페르세포네 님의 사도가 된 지 좀 되었어요.”

칸과 빅토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연우에게도 너무 뜻밖의 말이었다. 이미 페르세포네에게는 사도가 있지 않았던가. 그것도 유명한 랭커였다. 녹음의 보디.

“그쪽까지는 저도 잘 알지 못해요. 다만, 페르세포네 님의 말씀으로는 영령(英靈)이 되었다고만.”

연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페르세포네는 기존에 있던 사도를 치우고, 도일을 새롭게 삼을 정도로 초강수를 두었다. 사도직 임명이 신들에게도 아주 버겁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건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그만큼 하루라도 빨리 남편을 만나 타르타로스의 분란을 끝내고 싶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연우는 문득 페르세포네의 편지를 갖고 왔다고 했을 때, 하데스가 짓던 쓴웃음을 떠올렸다. 냉소적이고 피로해 보이던 그가 처음으로 드러내던 감정.

그러다 연우는 머리를 털었다. 섣부른 판단은 금지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신들의 행보는 그에게도 골칫거리이기만 했으니까.

무엇보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결국 신과 악마들의 노름에 놀아난 꼴인 건가.’

연우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아테나부터 페르세포네까지, 결국 모든 신과 악마들은 이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단 뜻이었다.

아테나는 사건이 벌어지는 내내 그를 슬프게 바라봤고, 페르세포네는 더 직접적으로 나서서 도일을 권속으로 삼았다. 대주교의 의식이 성공했다면 위험했을 테지만, 결국 그녀의 도박은 크게 성공했다. 천마의 힘을 다루는 사도. 여태 어느 신과 악마들도 해 내지 못한 업적이지 않은가.

연우는 순간 자신이 마치 신과 악마들이 다루는 체스판 위의 장기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었건만. 역시 하계는 천계에 있어 장난치기 좋은 무대밖에 되지 않았다.

[아테나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페르세포네가 침묵합니다.]

“그리고 페르세포네 님이 형에게 전언도 하나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뭐라고?”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요.”

결국 독촉인 셈이었다.

“며칠만 주신다면 몸을 회복해 놓을게요. 심득도 정리하구요. 무엇보다 페르세포네 님의 힘이 있다면 타르타로스에서도 도움이 될 테죠. 이 정도면 카인 형이 하려는 일에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연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여정을 위한 파티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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