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퀴네에 제작 (5)
“……이것으로 5개 마탑과 125개 학파들의 의견을 총합하여, 마법 연합은 독식자 카인을 공적(公敵)으로 선포하며, 이 시각 이후로 그를 척살하기 위한 추격조를 편성할 것이다.”
땅, 땅, 땅-
법봉이 두들겨지는 순간, 회의장에 있던 모든 마법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법 연합의 독식자 공적 선포.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절대 작지 않았다.
원래 마탑과 여러 학파들은 대대로 절대 융화될 수가 없었다. 서로 걷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푸르기스 밤의 공방전을 기점으로 연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시범적으로 출범했던 것이 네크로폴리스였다.
그리고 네크로폴리스의 궤멸은 새로운 위기감을 가져다주면서 연합의 창설 속도에 기름을 한껏 끼얹었다.
아홉 왕도 되지 못한 애송이 플레이어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동안 콧대가 높았던 학계의 장로들도 냉정하게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진행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독식자의 배후에 있는 존재 때문이었다.
“검무신처럼 파문되었다면 또 모를까…… 독식자와 외뿔부족의 관계는 아주 좋다고 소문이 나 있었지.”
“차기 왕 후보로 거론된다는 청람가의 남매와도 사이가 좋고.”
“큰 파란이 일겠구나.”
무왕과 외뿔부족.
여름여왕과 레드 드래곤을 쓰러뜨리면서 명실상부한 탑 내의 최강 존재로 거론되는 그들이 나선다면.
과연 마법사들이 당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여러 의논과 갈등이 있었지만. 그래도 법봉은 두들겨졌고, 의제는 가결되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 물러날 곳은 없었다.
어수선한 회의장을 내려다보던 마탑의 다섯 수장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따라 출구로 향했다.
그들의 얼굴도 앞으로 드리울 전운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이 빌어먹을 놈이 여길 어디라고 와!”
대장간을 방문하면 망치가 날아오지 않을까 하던 연우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망치 대신에 날아온 건 모루였다.
물론, 연우는 고개를 까닥거리는 것으로 아주 가볍게 피했지만.
“저거 비싼 거 아닙니까? 괜히 망가져서 나중에 고치겠답시고 또 고생하실 텐데요. 그럼 모양새만 안 좋…….”
“닥치고 좀 꺼져!”
헤노바는 깐족대는 연우의 말에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헤노바의 성격은 똑같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좋다고 쪼개?”
헤노바는 그런 연우의 태도가 탐탁지 않다는 듯이 더 크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튼 실례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들……!”
헤노바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연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서 대장간에 발을 들였다. 뒤따라 칸과 도일, 빅토리아는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은 얼굴로, ‘실례하겠습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들어섰다. 크로이츠는 묘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입장했다.
“이, 이……!”
헤노바는 얼굴이 대추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망치를 들고 있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도 마저 던질 태세였다.
“우선 화부터 가라앉히십시오. 나이도 많이 드셨으면서 그러다 정말 고혈압으로 쓰러지십니다.”
“네놈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만!”
“안타깝군요.”
“이 새끼가……!”
헤노바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말 한마디 지지 않고 대꾸를 해 대는 꼴에 정말 망치로 저 머리통을 크게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또 재주 좋게 피하고서 이죽대겠지.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더 화를 뻗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칸과 도일은 그런 연우와 헤노바를 충격먹은 얼굴로 번갈아 보았다.
‘뭐야, 이거? 카인 녀석이 저런 농담도 할 줄 알았어?’
‘우와. 말도 안 돼…….’
여태껏 두 사람이 겪었던 연우는 언제나 차갑고 고고한 존재였다. 전장에 홀로 위태롭게 꽂혀 있는 검처럼, 피를 잔뜩 머금으며 날카롭게 서 있지만 언제든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게 보였다.
물론, 차가운 태도와 다르게, 속에 잔정이 많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색다른 모습을 보니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조금 놀랍기도 하고. 연우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크로이츠도 마찬가지였다. 데리고 왔던 환영기사단을 도로 본부로 돌려보낸 뒤로, 여태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뒤만 따르고 있던 그도 연우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어 내심 만족스러웠다.
‘연대장과도 저런 관계이려나? 음. 쉽게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데.’
크로이츠는 무뚝뚝하기로는 연우에 못지않은 연대장을 떠올리다가, 피식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뒤에 달고 온 꼬리는 또 뭐냐? 뭘 그렇게 주렁주렁 매달고 왔어?”
헤노바는 그런 세 사람을 도끼눈으로 번갈아 봤다. 이따금 연우와 함께 찾아오던 판트 남매도 소란스러웠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눈에는 골칫거리 넷이 더 추가된 것으로 보였다.
그때, 빅토리아가 살짝 웃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헤노바, 오랜만이네요.”
“넌 또 뭔…… 응? 빅토리아?”
“예.”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두 사람은 같은 5대 명장으로서, 자주는 아니더라도 이따금 교류를 갖고 있었다.
“아. 저놈이 가져왔던 룬 마법학이 어디서 나왔던 건가 싶었더니. 그게 자네였던 거군.”
헤노바는 현자의 돌을 만들 당시에 연우가 가지고 있던 논문을 떠올리고 혀를 가볍게 찼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가 자네를 위해서 한마디 해 줄까?”
“헤노바가 말씀하시는 거라면 생각해 볼게요.”
“저놈, 피해. 대가리 속에 능구렁이가 여러 마리는 들어 있는 놈이야. 지금 탈출 못 하면 코 단단히 꿰일걸?”
빅토리아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헤노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혀를 찼다.
“이미 단단히 꿰인 모양이구만. 아무튼, 뭐, 그래. 스승님은 잘 계시고?”
“덕분에요.”
“그럼 됐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우가 살짝 놀랐다.
“아나스타샤를 알고 계셨습니까?”
헤노바는 망치를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던지고, 뚱한 표정으로 잠깐 연우를 바라봤다. 저놈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 싶은 갈등이 어린 얼굴. 그러다 그는 옆에 뒀던 곰방대를 들어 입에다 갖다 댔다.
후우-
하얀 연기가 새어 나왔다.
“그분도 이런 곰방대를 쓰지 않던?”
“그렇긴 했습니다만.”
“그거 내가 만들어 준 거다. 내가 피우고 있는 걸 보니 자기도 당긴다면서 하나 만들어 달라기에 만들어 줬었지.”
순간, 연우는 아나스타샤의 손에 두 동강 나던 곰방대를 떠올렸다. 자신이 이죽거리면서 그렇게 됐었지. 괜히 말했다가는 망치도 날아올 것 같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빅토리아도 슬쩍 연우의 눈치를 봤다.
“만병천고라고, 이상한 무기들을 수집하는 취미도 있어서 그거 보관할 장소를 만들어 주기도 했었고. 손상이 된 게 있으면 대신 수리를 해 주기도 했었지.”
“…….”
만병천고는 연우의 손에 무너졌었다. 무기들이 죄다 박살 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언급은 하지 않았다.
“머물던 별장 같은 걸 지어 주기도 했었고.”
연우는 자신이 날려 버렸던 아나스타샤의 거처를 떠올렸다.
「저런 명장의 작품을 대체 몇 개나 박살 낸 거야? 그거 다 부르는 게 돈이라고. 평소에 그렇게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말하더니. 그런 분의 작품을 이렇게 날리고…… 역시 인성……!」
샤논이 이죽거렸지만.
‘닥쳐.’
연우는 속으로 한 마디 쏘아붙이고, 겉으로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럴 때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빅토리아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지만.
“뭐, 오랜 거래처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끌끌. 뭐 하여간 그런 건 됐고. 그래서? 이번엔 뭐 시키려고 왔어?”
헤노바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연우에게 물었다. 수증기만큼이나 새하얀 연기가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제가 무슨 부탁할 게 있을 때만 온다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섭섭합니다.”
“당연히 그랬지, 언제는 안 그랬냐? 하여간 쓸데없는 말 말고! 또 뭔데?”
연우는 쓰게 웃고 말았다. 역시 헤노바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따지고 보면 헤노바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지하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헤노바도 연우의 마음을 읽었던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곰방대를 뒤집어 바닥에다 쳤다.
탁!
* * *
안쪽 방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헤노바는 뚱한 얼굴이었다.
여태껏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던 녀석이 또 뭐 부탁할 게 생긴 뒤에야 나타났으니 심통이 날 수밖에.
그런 와중에도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우와! 이거 뭐야? 손만 갖다 대도 베일 거 같은데. 어떻게 만든 거지?”
“역시 ‘철혈 명인’……. 소문에 듣던 대로야.”
“하나 달라고 하면 안 되나?”
“혼나지 않을까?”
“아니면 하나 슬쩍……?”
“형, 부탁인데 제발 철 좀 들어라.”
칸과 도일은 대장간 내부를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전열된 병장기와 무구를 이리저리 살피기에 바빴고.
“대단해. 정말. 그새 기술이 더 발전하셨네? 이건 또 뭘 도입하신 거지?”
빅토리아는 작업장을 살피면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두 눈은 오랜만에 총기로 가득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헤노바가 도입한 신기술이 유독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크로이츠는.
“…….”
한쪽 구석에 숨겨져 있던 술 창고를 발견하고 멀뚱히 서 있었다. 평소 수하들과 기분 좋게 대작하는 것을 즐겨 하던 그였기에 오크통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군침이 돌았다. 무엇보다 드워프가 담근 맥주는 부르는 게 값이라 하지 않는가.
졸지에 대장간을 무뢰배(?)들에게 점거당한 신세가 된 헤노바는 참지 못하고, 문을 열어 도로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 이것들아! 나가서 떠들어!”
쾅!
헤노바는 문을 세게 닫고, 씩씩대면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네가 데리고 다니는 애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은 컨셉이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기에 청람가 녀석들도 더해지면…… 끄응.”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딱 그 꼴이로군. 헤노바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졌던지,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왜 자꾸 자신의 대장간이 연우 등의 아지트 신세가 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조용해지나 싶었던 바깥은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시끄러워졌다.
어차피 헤노바도 녀석들이 말을 잘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곰방대를 다시 입에다 물면서 물었다.
후우우-
“그래. 할 이야기는 뭔데? 뭐, 또, 현자의 돌 같은, 그런 이상한 거 만들어야 하냐?”
“비슷합니다.”
“역시 골치 아픈 걸 가져왔구만.”
“이번에 만들어야 할 건, 퀴네에입니다.”
“퀴네에?”
헤노바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무엇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저 기억 깊숙한 곳에 박힌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하데스의 대신물을 말하는 것이냐? 올림포스의 명왕이 썼다던 투구?”
“예.”
“하! 이젠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그건 또 왜 만들게 되었어?”
헤노바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 되었다. 연우가 할 일을 들고 올 때마다 조용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연우는 여기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는 몇 번씩이나 고민을 해야만 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그는 헤노바의 손길을 빌렸고, 헤노바는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도와주었다.
궁금한 점이 아주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를 믿어 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유를 묻고 있어도, ‘필요해서’라는 답변을 한다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그동안 너무 헤노바의 배려와 편의에 기댔던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이번 일은 평소처럼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에 헤노바를 깊이 끌어들이는 일이었고, 여태 우려했던 ‘위험’에 노출시킬 수도 있었다.
그리고. 헤노바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동생의 행방으로 이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것을 부탁하면서 전반의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헤노바는 괜찮다고 할지언정, 그를 기만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연우는 몇 번씩이나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고. 결국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헤노바의 선택에 맡기자고.
“됐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만들기 어려운 게, 네놈 입을 열 도구가 아닌가 싶으니. 그래서. 이젠 뭘 도와달라는 것이냐? 설마 같이 타르타로스, 뭐, 그런 데라도 같이 가자는 건 아니겠……?”
헤노바는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말꼬리를 흐려야만 했다. 갑자기 연우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가면으로 손을 가져갔던 것이다.
그리고.
찰칵-
연우는 얼굴을 덮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오랜만에 벗어서 그런지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속은 긴장감으로 크게 울렁거렸다.
자신의 맨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헤노바가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으니까. 원망은 하지 않을지, 아니면 우울해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헤노바도 갑자기 연우가 가면을 벗을 줄은 몰랐던지, 잠깐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 얼굴이 훤히 드러났을 때. 커졌던 두 눈이 살짝 가늘어지더니.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입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 빨리도 말해 주는구나. 못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