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46화 (346/862)

21화. 퀴네에 제작 (6)

연우는 잠시 벙찐 표정이 되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의문과 말들이 맴돌았다. 그러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헤노바는 연우를 약 올리기라도 하려는 듯, 대답 대신에 여유롭게 곰방대를 입에다 물었다.

후우-

“네놈 갑옷과 가면을 만들어 준 게 나다. 그러고도 모른다면 그게 등신이지.”

“……!”

연우의 눈이 커졌다. 마장과 가면. 과연 두 개 모두 헤노바가 특별히 그를 위해서 만들어 준 물건이었으니까.

그의 말마따나, 갑옷과 가면까지 만들어 줬다는 것은 상대의 체격에 대해서 소상하게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이전에 연우가 자신의 정보창을 공유한 적이 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섬세한 부분까지 집어내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라도.

지금 돌이켜보면, 헤노바는 분명히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간간이 자신에게 보여 주던 눈빛이며 태도들에 따뜻함이 섞여 있었으니.

“처음에는 죽은 아이가 돌아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땐 얼마나 기뻤던지……. 다만, 주변에 보는 눈들이 많고, 정체를 보여서 좋을 게 없으니 숨기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새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알겠더구나. 그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 아이의 얼굴과, 몸과, 눈빛과,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전혀 다른 녀석이었어. 말투도, 성격도.”

헤노바의 시선은 불씨만 남은 아궁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타닥. 타닥. 땔감이 조금씩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어떤 놈이 날 떠보려 장난을 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지. 그러다 납득이 되더군. 흐흐. 예전에 스쳐 가듯이 했던 말이 있었거든.”

-영감님. 영감님.

죽은 녀석의 목소리가 헤노바의 귓가를 왱왱 울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 미친 듯이 쇠를 두들기고 있을 때, 허락도 없이 작업으로 들어와서는 부산스럽게 떠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또 정신 사납게, 왜? 옆에서 거치적거릴 거면 저기 가서 망치나 들어!

-영감님은 가족 있어요?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묻는 것만 대답해 봐요.

-흥! 나는 한평생 다른 곳으로 절대 한눈팔지 않고, 대장장이 인생 외길을 달려온 것만을 긍지로 삼는 블랙 드워프다! 그딴 거추장스러운 게 있을 리가 없잖으냐. 이 모루가 내 아들이고, 망치가 내 마누…….

-뭐야, 그게. 재미없게.

-이놈이? 그럼 넌?

-재미없는 인생인 영감님보단 제가 나을걸요?

녀석의 웃음은 지금도 그려질 정도였다.

-전 그래도 싸가지 없는 형은 한 명 있거든요.

헤노바의 시선은 연우의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서늘한 기운을 뿌려 대는 마장대검이 보였다.

당시에 두들기던 쇠는…… 녀석이 스쳐 지나가듯이 말하던 ‘형’의 손에 들려 있었다.

“사실 네가 언제쯤이면 말할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캐묻는다고 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아직은 마음을 가다듬는 중이라고 생각했었지.”

“…….”

“그런데 이제야 조금 그럴 마음이 든 거냐? 아니지. 뭔가 시킬 일은 있는데, 그래도 주제에 양심은 있으니 동정심에 기대려는 전략, 뭐 그런 거 아니냐?”

헤노바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연우를 노려봤다.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네놈 머리 꼭대기에 있다. 평소 네 행실을 보면 몰라?”

「우리 영감님이 주인의 인성을 더 잘 아는 거 같은데? 너무 많이 겪어 보셔서 그런가.」

샤논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작게 울렸다.

‘샤논.’

「응?」

‘제발 좀 닥쳐.’

헤노바는 곰방대를 더 깊숙하게 흡입했다. 둘 사이에 소리 없는 적막이 흘렀다.

연우는 아주 잠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동안 숨겨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녀석은 저에 대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연우는 차정우와 똑같은 얼굴을 하며 물었다.

“싸가지 없는 형이라고 했지.”

‘이 새끼가…….’

“끌끌끌. 지금 생각해 보면 딱 맞는 말이지. 안 그러느냐?”

헤노바는 기분 좋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 짜증이 섞여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너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연우도 그런 그를 보면서 따라서 웃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전에 왜 퀴네에를 제작해야 하냐고 여쭈셨죠?”

“그랬지.”

“정우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순간, 잔잔한 미소가 흐르던 헤노바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헤노바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연우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퀴네에를 제작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칠흑왕의 형틀 세트. 키클롭스 3형제와의 약속. 그리고 어떤 비밀이 있을 회중시계까지.

“내게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연우는 회중시계를 헤노바에게 건넸다. 헤노바는 한참 동안이나 회중시계를 매만지면서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다 인상을 찡그리면서 돌려줬다.

“너무 강한 봉인이 걸려 있어. 수리를 하려면 단순히 야금술만으로는 안 돼. 게다가…… 영혼석이라고 했었지?”

“예.”

“그딴 게 들어있다면 더 확실하다. 나로서도 손대기가 어려운 물건이야. 그리고 아마 힘들지도 모른다.”

헤노바는 뒷말에 주어를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는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키클롭스들이라고 해서 봉인을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대장장이의 신이라 불리는 키클롭스 3형제에 대한 예우인 것이다.

또한, 그만큼 영혼석을 다루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 저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그래도 신이 셋이나 달라붙고, 빅토리아와 브라함이 돕는다면 어떻게든 해결책이 생기지 않을까요? 거기다 헤노바가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흥. 얼굴에 금칠을 해 준다고 떡이라도 생길 줄 아느냐?”

헤노바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던지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실패한다고 해도, 그 뒤에 하데스를 돕고 퀴네에를 다시 양도받기로 하였으니…….”

“그때는 칠흑왕의 힘을 깨우쳐서 새로운 해법을 찾으면 된다, 이 말이로군?”

“예.”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힘.

신과 악마들이 경외하고, 포세이돈이 경계를 하는 그 권능을 제대로 손에 쥘 수 있다면. 연우는 저절로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헤노바는 팔짱을 끼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가장 먼저 퀴네에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거군.”

“예.”

“그리고 타르타로스로 넘어가야 하고?”

연우는 말없이 웃었다.

헤노바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말년에 이상한 형제를 만나서 허구한 날 고생만 해 대는구나. 대체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건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헤노바의 두 눈은 아들 같았던 녀석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화로 속의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대주교는 천천히 눈을 뜨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익숙한 광경이 눈에 보였다.

엄숙한 느낌으로 가득한 실내. 이것만 봐서도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지만.

“…….”

역시나 주름이 잔뜩 진 손이었다. 앙상하게 말라 핏줄과 뼈마디가 고스란히 보이는 손. 검버섯까지 펴서 힘도 없어 보였다.

실제로 그에게는 남아 있는 힘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력 기관은 메말랐고, 근육은 망가져 더 이상 수복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이렇게 버티는 것도 뛰어난 영력을 바탕으로 육체를 지탱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육체가 완전히 붕괴하고 난다면 부질없어질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저주가 영혼을 침범한다면 끝장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육체를 바랐던 것이건만.

더 높은 존재로 태어나 모든 역경을 극복할 생각이었건만.

“……결국 이번에도 실패인가.”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성공에 가까워졌다 생각했는데.”

빌어먹을 저주.

빌어먹을 천마.

대주교는 제사장이자 사도로서 절대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신도의 이런 불경 어린 짓을 보고도, 지상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신은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천벌이라도 내려 줬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조차 따라오지 않았다.

아니, 벌 같은 것 따위 내릴 필요도 없다는 뜻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귀찮다는 것일까.

그게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 간에. 대주교로서는 정말이지 속이 뒤집힐 일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때 일어나지 말 걸 그랬었나?’

전대 대주교, 검은 새벽은 한때 외뿔부족의 핏빛 현자와 함께 탑의 정점으로 군림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주교들도 역대최강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패악도 그에 못지않았다는 점이었다.

검은 새벽의 통치 아래에 있는 마군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마(魔). 그 단어만이 교단의 진정한 정체성이라는 선언과 함께, 하루가 멀다 하고 신도들이 계속 죽어 나갔다.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신이 마음에 안 들어 하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신이 원한다는 이유로. 신이 먹고 싶다는 이유로. 신이, 신이, 신이……!

그들은 패악을 부릴 때마다 ‘천마께서 바라신다’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마구 휘둘러댔고, 신도들은 그게 정말 신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쁘게 죽어 나갔다.

그가 봤을 때는 위아래 할 것 없이 온통 미친놈투성이었다.

원래 마군이 외부로부터는 광신도 집단이라 손가락질을 받는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 속에는 따뜻한 잔정이 흐르는 사회였다.

본디 천마께서 내리신 교리는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밝음(明)’이었으니까. 마라는 어둠으로 다른 어둠을 물리쳐, 밝음을 좇는다는 것이 교리의 진정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온통 어둠으로 탁하게 물드는 교단의 꼴이 보기 싫어서 모든 것을 뒤집어 버렸다.

10년을 주기로 천마에게 제사를 지내는 봉선 의식 때, 모두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동안 혼자서 일어나 제단을 오르고, 무엄하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검은 새벽과 다른 아홉 주교들을 모두 찢어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피로 물든 옥관(玉冠)을 스스로 머리에 쓰면서 새롭게 대주교가 되었노라고 선언했다.

신도들은 모두 기함을 터뜨렸지만, 검은 새벽 등을 죽인 그를 감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봉선 의식은 그렇게 끝이 났고, 저주도 대주교의 영혼에 단단히 아로새겨졌다.

언제나 교단의 성세를 이끌어 주던 천마의 권능이 모두 닫힌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이번 사건에서 여러 주교나 교구장 급의 높은 인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줄줄이 죽어 나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천마의 권능이 허락되질 않으니, 사제들이 가질 수 있는 힘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바.

선대에 비해 전력이 무참할 정도로 깎인 것이다.

그나마 여태 세간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건, 대주교가 가진 힘이 워낙에 뛰어난 데다가, 이주교인 킨드레드의 고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위태로워지려 하고 있었으니.

저주가 발작을 시작하며 육체를 좀먹어 갔던 것이다.

결국 이때부터는 대주교도 독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동안 저주에 씌고서도, 단 한 번도 천마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검은 새벽이 망가뜨린 교리를 바로 세우고자 밤낮으로 노력했다. 덕분에 비록 전력은 약화되었을지언정, 신도들의 생활은 한결 나아져 교단의 성세는 나날이 부쩍 커졌다.

또한, 수십 년이 되도록 한결같이 새벽 안수 기도를 올리면서, 천마께서 마음을 돌리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때에도 지금에도, 대답은 없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어차피 오랜 시간 살아온 인생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사라지고 난다면, 이후의 교단은 어찌 될 것이란 말이냐?’

곳곳에 이리 떼들이 가득한 탑에서. 대주교가 사라진 뒤, 교단의 실상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그때는 겨우 쌓아 올린 평화도 무너지고 만다. 평화란 결국 단단한 힘이라는 기반 위에만 쌓을 수 있는 누각이었으니까.

그래서 대주교는 천마가 끝까지 응답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응답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천마의 얼굴이 된다면.

그런다면 위태롭게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교단도 다시 일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계획을 진행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물론, 탑 어딘가에 미후왕의 허물 말고도 천마의 얼굴이나 다른 흔적들은 있을지 몰랐다. 마군도 위치를 전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고루 뿌려진 게 여의봉의 조각이었으니.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문제는 당장 대주교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겨우 쌓은 주교며 교구장들도 대거 쓸려 나간 이때. 대주교에게 남은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결국 이 방법밖에 없나.’

대주교는 결국 하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 패를 꺼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신을…… 버린다.’

신이 거부한다면 다른 신을 찾는 수밖에.

아니면.

‘삼키던가.’

대주교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을 발하는 가운데.

끼익-

문이 열리면서 킨드레드가 나타났다.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면서 물었다.

“킨드레드, 당장 이동할 차비를 갖춰라.”

“하지만…….”

킨드레드는 위태로운 대주교를 보면서 눈을 크게 떴지만, 곧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디로 모시나이까?”

“동주칠마왕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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