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퀴네에 제작 (7)
“아이고. 이렇게까지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런걸요.”
노인은 자신의 짐을 대신 들어 준 청년을 보면서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네 집 아들인지는 몰라도. 참 부모님이 알면 든든하겠어?”
“말씀 감사합니다.”
청년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노인과 함께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얼굴에 슬픈 기색이 어렸지만, 그는 곧 다시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리고.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는 묘한 감상에 젖었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한령은 점차 멀어지는 아들을 보면서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연우의 권속이 된 이래, 하루라도 빨리 전생의 힘을 되찾겠다는 일념과 연우가 겪는 바쁜 나날들로 정신이 없던 나머지 미처 아들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물론, 그래도 연우가 이따금 약속한 대로 아들의 생활을 챙겨 주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신경을 덜 썼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간만에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약을 끊고, 지금은 탑 외 지역에 있는 어느 잡화점에 취직을 해서 소소하게나마 생활비를 벌고 있다더니.
하루 종일 뒤를 조용히 밟아 보니 정말 성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손님들에게 살갑게 대하면서 물건을 열심히 파는가 하면, 길을 지나다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기도 하는 등, 여태 한령이 알고 있던 아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아주 잠깐 동안 한령은 자신이 아들과 얼굴만 비슷한 다른 사람을 찾아온 게 아닌가 하고 착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혹시나 주변 평판 때문에 낮에만 저런 모습이고, 밤에는 다른 꿍꿍이를 벌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전혀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갱생을 한 것이다.
비록 플레이어로서 역량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사람의 몫은 다 하고 있었다.
대체 연우가 아들에게 무엇을 한 걸까?
한령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털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했던 방식들이 잘못되었던 것인지도.’
한령은 어렸을 때부터 아팠던 한빈을 위해서 모든 걸 다 해 주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막상 한빈이 필요로 할 때는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한빈을 과거에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빈이 저질렀던 것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에게 다친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고, 16층은 아예 망가지다시피 해 버렸으니.
그래도 이렇게 달라진 아들을 보고 나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어느 정도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페이스리스…….’
한령은 미후왕의 궁전에서 페이스리스와 부딪쳤을 때가 떠올랐다.
-아하하! 여기서, 너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나의 절친한 벗이여!
그건 페이스리스가 아니었다.
비록 여러 얼굴을 번갈아 쓰고 있지만, 그때 등장했던 것은 분명히 오래전에 죽거나, 살았어도 이제 재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녀석이었다.
‘검무신.’
한령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대체 그동안 어디로 숨었나 했더니…….’
페이스리스가 최근에 여섯 신성으로 부각되었다지만, 그는 사실 꽤 오랫동안 탑을 누볐던 플레이어였다.
갖가지 기행을 일삼아서 제법 유명세는 타고 있었지만, 그렇게 실력은 뛰어나지 못해 밋밋한 명성만 갖고 있던 자.
그러다가 레드 드래곤이 붕괴되고, 탑이 격변을 맞이하면서 갑자기 급부상을 하게 된 케이스였다.
그런데 검무신이 바로 그런 페이스리스가 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페이스리스로 변장해 있었다.
‘집어삼킨 것이겠지. 진짜 페이스리스를.’
검무신은 무공에만 광적으로 집착하던 무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잡기들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갖가지 법술이나 요술도 익히고 있었던 그가 궁지로 내몰리자 그중에 하나를 썼다면 말이 되었다.
탑의 곳곳에 뿌려진 여러 감시들을 피해서 활동하려면, 차라리 그렇게 신분을 위장하는 게 나을 테니.
다만, 문제가 있다면.
‘검무신, 한 명만이 아니었다는 점이야.’
영적인 존재인 데스 노블이 되었기에 알 수 있었다.
페이스리스 속에 담긴 영혼은 검무신 말고도 아주 많았다. 문제는 그것들 대부분이 한령이 아는 존재들이라는 점이었다.
‘뮤별, 케이딕, 희백설, 세이, 타일러…… 거기다 플랑까지.’
오로지 검무신을 위해서 칼을 들고, 목숨까지 던질 수 있는 그의 수족들. 한때, 8대 클랜에 꼽혔던 청화도를 있게 만든 ‘검’들이었다.
그들이 전부 검무신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고.
창무신.
플랑. 무왕의 친동생이자, 검무신과 함께 손을 잡고 청화도를 일으켜 세웠던 녀석까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곳곳에서 수집한 듯한 다른 영혼들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이 검무신을 위시한 청화도의 것들이었다.
결국 페이스리스는 홀로 움직이는 청화도, 그 자체인 셈이었다.
다만, 하나의 몸뚱이에 너무 많은 영혼을 욱여넣은 나머지, 육체가 제 기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삐거덕대니, 주 인격도 그때그때 계속 바뀌는 형식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한령은 페이스리스가 언젠가 그런 제약을 벗어던지고, 온전한 제 실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아니, 어쩌면 소싯적의 검무신보다 더 높은 곳에 다다를지도 몰랐다.
수많은 영혼들을 담고 있는 만큼 집단 사고도 가능해지고, 여러 기억이 뒤섞이면서 무론도 그만큼 발전할 테니.
무엇보다.
한령이 알고 있던 검무신은 어떤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이겨 내면서 악착같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던 자였다.
그러니 말 못 하는 벙어리 신세에서, 아홉 왕이라는 위대한 자리까지 앉을 수 있지 않았던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보자고.
동굴이 무너지기 직전, 페이스리스는 한령에게 다음을 기약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령은 가슴이 짓눌린 것 같은 답답함을 안고 지내야만 했다.
당시로 돌아간다고 한들 선택은 번복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이 낳은 결과나 다름없으니.
이미 연우에게도 페이스리스와 관련된 사안은 모두 이야기를 해 둔 상태였다.
연우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딱 선을 긋긴 했지만. 그래도 찝찝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연우와 함께하고 있는 걸 본 이상, 페이스리스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청화도의 멸망이 누구의 손에 짜여진 각본인지 눈치를 챘을 테니.
『한령, 어디지?』
그때, 연결 고리를 통해 연우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아무래도 돌아갈 때가 된 모양이었다.
한령은 곧 돌아가겠다고 답변한 뒤, 저 멀리 사라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응?”
한빈은 길을 걷다 말고, 잠시 걸음을 멈춰서는 뒤를 돌아보며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뭔가가 느껴졌던 것 같았다. 익숙한 뭔가가.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계속 가요.”
한빈은 고개를 저으면서 노인과 함께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 * *
“삼촌! 또 일하러 가는 거야? 나빠!”
연우는 칭얼대는 세샤를 높이 들어 안아 주었다.
“이번에는 금방 다녀올게.”
“칫.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게다가 이번엔 브라함도 같이 가고.”
연우는 이게 세샤의 가벼운 투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볍게 웃었다. 자신만 아니라 평소에 같이 놀아 주는 브라함도 가 버리니 섭섭해서 그런 것이다.
“그럼 올 때 메로나!”
“뭐?”
“저번에 삼촌이 만들어 준 거 맛있었어! 그거 또 만들어 줘!”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알겠다면서 등을 두들겨 주었다. 또한,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부디 이번 여로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샤가 밝게 웃을 수 있는 소식을 가져올 수 있기를.
“세샤는 걱정 말게. 내가 돌봐 주고 있을 테니. 아니,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이 이미 마을에서 세샤를 안 돌봐 줄 사람이 없겠지만.”
대장로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세샤를 건네받았다. 이미 세샤를 둘러싼 마을 남자아이들의 신경전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중이었다.
연우는 세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헤노바는 못에 박힌 듯 우두커니 서서 세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이가…….”
“예. 정우의 딸입니다.”
“그렇…… 군.”
헤노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의 돌을 만들 때도 오고 가면서 봤었다지만, 그때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었다. 연우를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녔어도, 그냥 호칭만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안아 보시겠습니까?”
헤노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짧은 걸음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세샤를 안았다. 마치 잘못 안으면 부서질 것처럼. 다만, 영문을 모르는 세샤만이 눈을 멀뚱멀뚱하게 떴다.
“삼촌! 이 꼬마 할아버지 이상해!”
꼬마 할아버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야 했다. 다른 일행들도 하나같이 붉어진 얼굴로 슬쩍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헤노바는 짧은 팔로 세샤를 이리저리 어루만지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돌아왔다. 그러고는 도끼눈으로 연우를 째려봤다.
“너희 형제들의 말본새는 아무래도 집안 내력인가 보구나.”
“그런가 봅니다.”
연우는 일행들을 돌아봤다. 칸, 도일, 빅토리아, 크로이츠. 여기에 브라함과 갈리어드, 헤노바까지 총 8명.
어쩌다 보니 인원이 엄청 불어 난 파티였다.
처음 탑에 들어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솔로 플레잉만을 추구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달라져도 참 많이 달라진 셈이었다.
“그럼 길을 열겠네.”
브라함은 손에 들고 있던 스크롤을 찢었다. 그러자 그들의 발아래로 붉은색 포탈이 활짝 열렸다. 타르타로스를 한 번 다녀왔던 연우의 기록을 바탕으로, 좌표를 추적해서 제작한 포탈 스크롤이었다.
포탈 너머로 잿빛으로 물든 타르타로스의 하늘이 보였다.
그렇게 건너가려는데.
“제자님? 여기 좀 와 보시죠?”
갑자기 브라함의 오두막 지붕에서, 무왕이 가만히 앉아 이쪽으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연우는 스승이 왜 나타났는지 몰라 눈을 크게 뜨다가, 일행들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고 훌쩍 무왕에게로 다가갔다.
“왜 그러십니까?”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야지?”
“……?”
연우가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무왕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에 쥐고 있던 종이에다 내공을 담아 가볍게 던졌다.
연우는 종이를 가볍게 낚아채고 내용을 쭉 읽었다. 곧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건……”
“마군이 너에 대해 선전포고를 던졌다.”
……이에 신의 이름으로. 감히 신의 행사를 방해한 적(敵) 독식자에게 성전(聖戰)을 선언한다.
또한, 앞으로 독식자를 따르는 무뢰배들, 돕는 이교도들, 관련된 배덕자들 또한 함께 신벌을 내릴 것이다.
“보다시피 널 돕는 놈들도 죄다 모가지를 뽑아 버리겠다는데. 이거 나한테도 개지랄하는 거 맞지?”
무왕은 짜증이 단단히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거기다 식탐 새끼는 방구석에서 조용히 까까나 처먹을 것이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까만 도룡뇽들과 같이 너랑 동맹 맺고 하얀 도마뱀 놈들을 두들겨 팰 거라고 하지를 않나.”
까만 도롱뇽은 블랙 드래곤, 하얀 도마뱀은 화이트 드래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마탑 놈들은 대가리에 총을 맞았는지, 연합이니 뭐니 하면서 이상한 거 세워서 총구를 겨눈다고 하지.”
연우는 부의 손짓에 줄줄이 녹아내리던 닥터 둠과 네크로폴리 스를 떠올렸다.
“엘로힘, 이 개 같은 놈들도 여태 좀 잠잠하게 있는가 싶더니 다시 나대려 하더라고? 게다가 철사자단인지 하는 것들은 용병들도 대거 끌어모으는 중이고.”
8대 클랜 중 4곳이 움직인다. 마법 연합은 여태 파벌이 갈라져 있어서 힘을 내지 못했을 뿐, 모두 합친다면 절대 그에 못지않은 전력이었다. 철사자단도 직접 나서서 용병계를 규합한다면 그만한 세력을 충분히 일굴 수 있었다.
자칫 대전(Great war)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널 중심에 두고 돌아가고 있더란 말이지. 대체 무슨 난장판을 치고 다니는 거냐?”
무왕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그를 감도는 공기만큼은 살벌했다.
“우리 제자님 덕분에 우리 마을도 같이 귀찮은 데 말리게 생겼는데, 어쩌죠?”
하지만.
“아직 그것밖에 안 되나 봅니다.”
연우는 시큰둥했다.
무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더 무르익어야 합니다. 제가 바라는 건 그 정도가 아닙니다.”
“너…… 설마 ‘대전(Great war)’이라도 벌어지길 바라고 있는 거 냐?”
“가능하다면요.”
“하! 이 미친 새끼…….”
무왕은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치고 말았다.
대전.
그레이트 워.
탑은 수천 년의 역사만큼이나 숱하게 전쟁이 벌어졌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규모가 너무 방대해서 탑 내 인구가 절반 가까이 날아갔던 전쟁도 몇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전쟁이 지금은 전설처럼 전해지는 2차 용살대전이었다.
98층으로 가는 길을 열어 다시 초월격을 획득하고자 하는 용종들과, 77층에 머물며 이들을 막아선 올포원 간에 벌어진 대전.
그리고 결과는 당시 탑을 지배했다던 용종의 궤멸로 이어지고 말았다. 만약 어렸던 여름여왕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멸종해 버렸을 사건이었다.
그 뒤로도 대전은 몇 차례 발생했고, 그때마다 탑은 세력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는 결과를 맞았다.
그런데 연우는 그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무왕으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어차피 전쟁은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예상보다 덩치가 훨씬 비대해져서 섣불리 덤비기는커녕, 서로 눈치 보기 바쁠 테니까요. 도화선에 불이 붙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냉전 체제 아래에서 합종연횡만 바쁘게 오고 갈 겁니다.”
“그럼 그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건 너고?”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왕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비웃음처럼 보이기도, 개구진 미소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상한 웃음.
“이게 여태 네가 바라던 그림이었냐?”
“예.”
“우리 제자님, 그림 솜씨 한번 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