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1화. 디스 플루토 (1)
우우웅-
아스트라이오스의 몸뚱이에 박힌 여의봉이 길게 울음을 토해 냈다.
그리고.
츠츠츠-
아스트라이오스가 검은 연기로 화해 확 하고 흩어지더니 여의봉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황금색 광채가 더 환하게 빛을 토해 냈다.
그러다 여의봉의 끝단에 글자가 천천히 아로새겨졌다.
στερία
아스트라이오스의 신명이 그렇게 새겨지고, 여의봉은 다시 분해 되어 연우의 손으로 떨어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몇몇은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그만큼 연우가 저지른 짓은 상상을 초월한 행동이었다.
봉신(封神)!
과거 신과 악마들이 제천대성을 가장 악랄하다고 여기게 만든 그 권능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신과 악마의 영혼을 강제로 찢어 여의봉이라는 감옥에다 봉인시키고, 권능을 강탈하여 소유주에게 전달하는 힘!
[신의 인자를 흡수합니다.]
[신의 인자를 흡수합니다.]
……
[마신룡체의 각성 작업이 재개됩니다.]
콰드득, 콰득-
연우는 아스트라이오스를 죽이고, 신살자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체내에서부터 신의 인자가 부쩍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혼이 바짝 고양되었다. 세포가 빳빳하게 일어났다. 감각이 곤두 세워졌다.
[외부의 충격에 유의하십시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섣불리 어떻게 나설 수가 없었다.
신살도 충격적이지만, 협정이 단 몇 분 사이에 결렬된 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데스와 티폰은 각각 타르타로스를 양분하고 있는 절대자들. 그들 간에 신명으로 이뤄진 협정은 자칫 신격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협정이 한낱 필멸자에게, 그것도 디스 플루토도 아닌 난입자에 의해 깨지고 말았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아스트라이오스는 티탄 중에서 가장 최약체로 분류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신격을 소지한 ‘신’이었다.
초월자가 너무나 손쉽게 당하고 말았으니.
신살은 갖가지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는 타르타로스에서도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 이벤트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여기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했던 일은 현실로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하데스의 권속들은 재빨리 하데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신격들 간에 발생한 협약이 깨졌으니, 큰 타격을 입을 하데스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데스가 정말 위중해진다면, 자칫 이 기회에 티폰이 남은 기가스들을 이끌고 재침공을 시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하하! 제천대성이나 올포원과 마찬가지로 미친놈이 있었군!”
하데스는 말과는 다르게 재미있다는 듯이 연우 쪽을 보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시니컬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 게다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설마?’
순간, 눈치가 빠른 권속들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빠르게 알아챌 수 있었다.
하데스와 티폰 사이에 체결된 협정은 크게 보면 디스 플루토와 티폰-기가스 간에 벌어진 것.
하지만 연우는 어느 소속도 아니었다.
비록 디스 플루토를 도와 싸웠다지만 하데스의 권속도 아니었고, 성역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갑자기 훼방을 놓았어도, 협정에 전혀 저촉되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이?’
‘아냐. 이건.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절묘했어.’
‘혹시 계산에 둔 행동은…… 아니겠지?’
그들은 혹시 연우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산’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했다. 그리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만약에 진짜 계산이었다면 대단한 짓이었으니까.
이건 단순히 계산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어긋났더라면. 시스템이 그를 디스 플루토의 아군으로 판단했다면, 큰 패널티가 따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간한 심산과 배짱이 아니고서야 절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다들 무엇 하느냐! 어서 놈을 보호하지 않고!”
하데스의 서슬 퍼런 명령에 디스 플루토는 일제히 정신을 차리고 연우를 보호하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협상이 결렬되었으니 다시 티탄들이 맹공을 퍼부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재밌구나…….』
티폰도 하데스와 같은 생각이라는 듯, 다시 구름 사이로 눈이 활짝 열렸다.
그 눈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아주 재미있어…….』
티폰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면서 조용히 사라졌다. 티탄들을 감싸던 빛의 기둥도 어느새 모두 사라지면서 전장에 조용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
“…….”
모두가 침묵을 지킨 채.
그들은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연우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
칸 등이 도착한 것은 모든 전투가 끝나고도 한나절이 지난 뒤였다.
브라함으로부터 명왕의 신전이 티탄들의 포위망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전력을 다해 달려서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모든 전투가 끝난, 한창 어지러워진 전장이었다.
곳곳에 병사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하나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
사방에 마물들의 사체며 부서진 육편으로 가득해서 썩은 내가 진동을 해 댔지만. 그런 것을 치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성벽은 반쯤 부서지고, 결계도 상당수가 허물어져 있었으니
일행은 대체 여기서 어떤 격전이 벌어졌었는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때 드높은 신격이었던 브라함만이 사태를 파악하고 작 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개판인 모양이로군.”
브라함은 아무래도 타르타로스의 상황이 예상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쯤 망가지다시피 한 성역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성역은 곧 신의 의지가 강림하는 장소. 신이 하계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머물 수 있는 집이었다. 그런 곳이 이렇게까지 위태롭다면, 다른 정황이야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대들이 카인을 따라온 자들인가?”
그때, 일행들에게로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왔다.
조금 작은 체구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을 한 여인. 하지만 사자 갈기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눈이 매서웠다. 전투의 여파가 남아 있어서 그런지 풍기는 기도도 살벌했다.
하지만 일행들은 다른 이유로 조금 놀라고 말았다.
자신들과 똑같은 ‘플레이어’의 냄새가 났으니까.
이따금 타르타로스로 수행을 떠나는 플레이어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손쉽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네만.”
브라함이 대표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일행을 쓱 훑어보다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하데스 님께서 너희를 직접 데리고 오라 하셨다. 따라오도록.”
여인은 자신의 용건만 말하고 뒤로 홱 돌아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제대로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칸 등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브라함을 돌아보는데.
“따라가세. 아무래도 하데스가 자신의 사도를 보낸 듯싶으니.”
브라함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용히 여인의 뒤를 따랐다.
일행도 따라 걸으면서 조금 놀란 눈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하데스의 사도라고? 그렇다는 건, 포세이돈의 사도였던 벤티케만큼이나 뛰어난 실력자란 뜻이었다. 아니, 풍기는 기세만 본다면.
‘더 높은 것 같은데. 어느 정도인 거지? 저런 실력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칸은 여인을 위아래로 빠르게 살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갑자기 여인이 걸음을 도중에 멈추더니 칸을 노려봤다.
“경고하지.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는 그딴 짓을 하다가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거든.”
칸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짧은 순간 목 언저리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여인은 그 말만 하고 다시 길을 걸었지만. 칸은 한참 동안 식은땀을 흘리면서 서 있어야 했다.
‘어쩌면…… 아홉 왕 급.’
* * *
“오랜만이로군, 하데스.”
사방에서 사나운 눈길이 쏟아졌다.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사람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살의가 들끓었다.
하지만 브라함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역시 한때 〈데바〉를 대표하던 3주신 중 한 명이었으니. 비록 천계가 싫어 영육신으로 내려오면서 대부분의 권능을 유실하고, 끝내 아가레스에게 비참하게 당해서 한낱 플레이어의 권속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날의 성격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하데스는 폐쇄적이던 브라함과도 교류를 나누던 몇 안 되는 인사 중 한 명.
하데스 역시 브라함처럼 천계를 경멸하는 공통점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하데스는 옥좌에 앉은 채로, 손을 높이 들어 휘하 제장들의 살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한 팔로 턱을 괴면서 피식 웃었다.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장(諸將)들이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서.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이해하네.”
“그래. 하여간 아주 간만이야, 브라흐마. 아주 우스운 꼴이 되어서 왔어.”
어떻게 보면 이제 한낱 필멸자도 되지 못하는 브라함의 처지를 비웃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말투.
하지만 브라함은 하데스의 말투가 원래 시니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만큼이나 세상사를 냉소적으로 보던 인사였으니.
다만, 세샤를 만나면서 조금씩 바뀌었던 자신과 다르게, 하데스는 더 뾰족하고 날카로워진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꼴이 우습긴 하지만…… 오히려 더 즐겁다네.”
“즐거워?”
“그럼. 여태 귀찮기만 하던 것을 벗어던지니 오히려 너무 홀가분하다네.”
하데스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면서 브라함을 노려봤다. 뭔가를 캐내려는 듯. 그러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한 것을 보고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시바에게도 폭언을 퍼붓던 또라이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는군.”
“자네도 그 버겁기만 한 짐짝을 벗어던지는 게 어떤가? 사실 매번 개판만 치고 다니던 형제들과 다르게 자네는 너무 성실해.”
“말은 고맙군. 하지만 쓸데없는 말을 삼갔으면 좋겠어.”
브라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 그도 말했던 것과 다르게, 하데스가 의무와 책임을 벗어던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만큼 하데스는 책임감이 너무 강했다.
올림포스의 맏형이라는 책임감. 언제 감옥을 뚫고 나올지 모르는 티탄과 기가스를 막아야 한다는 의무감. 저승을 제대로 통치해야 한다는 성실감.
그 모든 것들이 오늘날 하데스를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문제는 그것들이 이제 하데스를 좀먹어 가고 있다는 것인데.’
가뜩이나 막중한 책무로 괴로워하고 있는 녀석이, 티탄과 기가스의 반란까지 홀로 막아서려 하니 아무리 철인이라고 해도 무너질 수밖에.
‘그런데도 올림포스에 별다른 지원 요청을 하지 않고, 아내인 페르세포네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있다는 건…… 역시 뭔가가 있나?’
브라함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굳이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
신과 악마는 여러 사회 집단으로 묶여 있어도, 하나하나가 개인주의적 성향이 아주 강한 자들이었다. 하데스의 그런 선택에 물음을 던지는 건 결례였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브라함은 하루라도 빨리 퀴네에를 만들어 주고, 차정우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데, 내 주인은 어디로 보낸 건가?”
연우와의 연결 고리는 계속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너무 희미해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계속 말을 걸어 보아도, 무언가에 가로막혀 전달도 되지 않았다.
“브라흐마의 입에서 ‘주인’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하!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쓸데없는 서두는 붙이지 말고. 정말 어디에 있나?”
하데스는 검지로 바닥을 가리켰다.
브라함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하?”
“감옥에 있다.”
“무슨……!”
“그놈이 건방지게도 내 신명을 걸었던 협정을 너무 쉽게 깨 버렸거든.”
브라함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주인이 무슨 인성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데스 권속들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뭔가 찝찝한 표정. 그러면서도 몇몇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우리 주인께서 또 교묘한 방법으로 사고를 치셨나 보군.”
“아주 교묘하게 쳤지. 아스트라이오스를 잡았거든.”
“……!”
이번에는 브라함도 크게 놀라고 말았다. 다만, 아스트라이오스가 누군지 모르는 다른 일행들은 멀뚱한 표정을 지을 뿐.
“카인이…… 신을 잡았다는군.”
“……!”
“……!”
신살자라는 업적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전설로만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77층의 올포원이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문이 돌았던 일을 연우가 해냈다고?
“티탄이라고 하기엔 사실 많이 덜떨어지는 놈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단하군. 파하하!”
브라함은 역시 자신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면서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럴수록 칸 등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지만.
그러다 브라함은 돌연 익살맞게 웃었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메시지 마법이 하데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러다 자칫 격과 관련된 비밀이 하계에 새어 나갈 수도 있는데, 괜찮나?』
하데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브라함과 다르게 육성으로 대답했다.
“그 정도도 감당 못 할까. 당해 내지 못하는 것들이 머저리일 뿐.”
다른 권속이나 플레이어들은 무슨 대화인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말똥말똥하게 떴지만.
“역시 자네는 자네야. 쉽게 바뀌질 않는군. 좋아.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브라함은 다시 한 번 더 기분 좋게 웃으면서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우리 주인께서는 지금 밑에서 뭘 하고 계시나?”
벌써 퀴네에 제작이라도 들어간 것일까.
“모른다.”
“그게 무슨…….”
“사실 감옥에다 자신을 처박아 달라고 한 건 놈이었거든.”
-죄를 저질렀으니 죗값을 받겠습니다. 저를 가둬 주십시오.
하데스는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황망하게 서 있는 병사들 사이를 가로질러 와서 당당하게 말하던 연우를 떠올렸다.
하데스가 봤을 때, 연우는 절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자수를 할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한데.
대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걸까?
하데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실웃음을 흘렸다. 따분하기만 하던 타르타로스 생활에 처음으로 자극제가 생긴 것 같았다.
* * *
그 시각. 지하 감옥에서는.
[마신룡체의 각성이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구성 작업을 시작합니다.]
콰드득, 콰득-
연우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육체를 재조립해 나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