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디스 플루토 (2)
일행들이 축객령에 따라 모두 떠난 자리.
거대한 홀에는 하데스와 도일만이 남아 있었다.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의 냄새가 잔뜩 풍기는 도일을 보면서 쓰게 웃고 말았다.
반면에 도일의 표정은 가면을 쓴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어려 있지 않았다.
하데스의 쓴웃음이 더 진해졌다. 슬픈 기마저 다분히 묻어나는 웃음. 결국 그가 나서서 적막을 깰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잘 지내었소, 페르세포네?”
* * *
연우의 몸은 펄펄 끓고 있었다.
육체가 재각성을 시도하면서 생기는 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전투가 끝나면서 찾아온 900여 개 채널링의 반작용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열을 다스리면서도, 각성 작업에 집중해야 하는 처지였다.
[헤르메스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당신을 지켜봅니다.]
[아레스가 남자는 힘이라며 주먹을 불끈 쥡니다.]
[혼돈이 조용히 주시합니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그깟 저급한 신의 인자 따윈 집어치우고, 내가 건네는 인자를 받……!]
[다른 신과 악마들의 권한으로 아가레스의 메시지가 잠시간 차단되었습니다.]
[아테나가 도와줄 것이 없나 싶어 발을 동동 구릅니다.]
[타나토스가 지켜봅니다.]
[네르갈이 지켜봅니다.]
[오시리스가 지켜봅니다.]
……
[비마질다라가 당신의 고행(苦行)에 길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케르눈노스가 침묵합니다.]
여러 메시지들이 계속 올라오면서 연우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연우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 강해진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여름여왕과 미후왕의 허물을 삼킨 뒤로, 도저히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깊어진 잠재력의 끝을 드디어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화아악-
연우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따라 검은 기류와 황금색 광채가 뒤섞이면서 묘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것들은 서로 한데 어울리면서 세 개의 꽃을 그리더니, 곧 붉은 뱀으로 변하면서 연우의 정수리 쪽을 파고들었다.
외뿔부족에서는 무공론에 따라 경지를 아주 세세하게 구분 짓는 편이었다.
삼화취정에 이은 적사투관(赤蛇透關).
여러 갈래로 쪼개진 내공을 하나로 묶고, 그것을 도로 삼키면서 육체와 영혼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낸다는 경지.
어렴풋하게나마 발을 들였던 명인 급의 경지가 완숙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영혼이 깊어진 만큼, 육체도 저절로 따라오면서 각성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세포 깊숙한 곳에 신의 인자가 박히고, 기존에 있던 용, 마의 인자들과 묘한 균형점을 이뤘을 때.
여태껏 어떻게든 먼저 주도권을 잡고자 서로를 잡아먹으려 들던 용, 마의 인자들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3자 대치 형상이 이뤄진 순간 모든 각성이 끝났다.
[신의 인자가 각성됩니다.]
[신의 인자가 각성됩니다.]
……
[신의 인자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와 용의 피를 따라 신혈(神血)이 더해집니다.]
[마와 용의 뼈에 신성(神性)이 단단히 새겨집니다.]
……
[신의 인자가 마와 용의 인자와 합쳐지는 데 성공했습니다.]
[성질 변환이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특성 ‘마룡체’가 ‘마신룡체(魔神龍體)’로 변경되었습니다.]
[최초로 탄생한 육체입니다. 육체가 가진 한계와 자질에 대해 밝혀진 바가 전혀 없습니다. 육체에 대한 정보는 스스로 터득하세요.]
……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위대한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신성(神聖)’과 ‘초월성(超越性)’에 대한 단서를 획득하였습니다.]
[죽음의 신들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죽음의 악마들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전쟁의 신들이 당신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전쟁의 악마들이 당신에 대한 격을 재논의 합니다. 심사에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연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몸 하나 누이면 끝인 작은 공간. 새하얀 벽면과 천장, 그리고 쇠창살이 전부였다. 각성과 신열로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주변의 방해를 받기 싫어서 하데스에게 부탁해 들어왔던 곳.
다행히 타인의 방해는 전혀 없었고, 각성은 완료되었다.
연우는 망막을 가득 채운 메시지 중에서 ‘최초’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밟혔다.
마룡이 된 용종은 있을지언정, 여기에 신과도 거래했던 존재는 여태껏 없었다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었다.
‘달라진 게 있나?’
마룡체를 처음 이뤘을 때에는 몸이 터져 나갈 것 같은 힘에 취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덕분에 육체의 임계점을 단번에 돌파하면서 3차 각성까지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신룡체는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분명히 시스템 메시지는 많은 게 달라졌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연우는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평상시 몸 상태 그대로였다.
‘아냐. 신열이 가라앉았어.’
그러다 뒤늦게 몸을 익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었던 신열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채널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연우는 자신을 둘러싼 900여 개의 시선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어떤 존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지.
“여기가 헤르메스, 여기가 아테나, 여기가 케르눈노스. 그리고 여기가…… 비마질다라.”
연우는 차례대로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중얼거렸다.
[헤르메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테나가 감동해하며 눈물을 글썽거립니다.]
[케르눈노스가 조용히 당신을 바라봅니다.]
[비마질다라가 고행의 성취를 이룬 당신에게 축복을 전달합니다.]
[아가레스가 자신을 지명하지 않은 일에 불만을 가집니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난 왜 안 불……!]
[다른 신과 악마들의 권한으로 아가레스의 메시지가 잠시간 차단되었습니다.]
[아가레스가 자신의 권한으로 차단을 해제하였습니다.]
[아가레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이것들이 미……!]
[다른 신과 악마들의 권한으로 아가레스의 메시지가 잠시간 차단되었습니다.]
연우는 오늘도 길길이 날뛰는 아가레스를 무시하면서 채널링을 하나하나씩 짚어 나갔다. 권능과 연결된 초월적 존재들 각각이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다. 바로 옆에 존재하는 것처럼.
‘권능이 가진 특징이 조금씩 달라. 이것이 신성인가?’
여태껏 연우는 권능을 즐겨 사용하면서도 각 특성과 효과에만 치중했을 뿐이었다. 오로지 도구로만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더 세세한 감지가 가능해지자, 권능이 가진 깊이는 그것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권능이 지닌 깊이는 도저히 끝이 없었다.
각 신과 악마들이 가진 대략적인 신위뿐만 아니라, 그 속을 가득 채우는 신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음’을 다루는 같은 신이라고 해도, 타나토스와 네르갈이 서로 다르듯이.
각 권능들을 이루는 카테고리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담긴 세부적인 내용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런 것을 이제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 권능을 더 깊게 다룰 수 있는 건 당연했다.
어쩌면 신의 인자를 대거 보유하게 되면서 생긴 현상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육체가 더 단단해지면서 그릇이 저 많은 것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거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직까지 900여 개의 권능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건 아니었다. 여전히 삐거덕대는 부분은 있었지만, 이전처럼 권능을 전면으로 개방한다고 해서 쓰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것만 해도 아주 큰 발전인 셈.
연우는 더 자세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정보창을 열었다.
[특성: 마신룡체]
설명: 용종과 악마와 신은 아득하게 먼 옛날부터 초월을 이루며 세상의 정점에 섰던 지고의 종족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인자를 한꺼번에 보유한 존재는 여태껏 전례가 없었기에 가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최초’의 업을 이룬 당신이 걸을 길이 곧 앞으로 태어날 마신룡의 길일 것이다.
* 골드 드래곤
용종과 악마와 신의 권능을 조금씩 개화할 수 있다.
* 용과 마와 신의 영역
자격 여부에 따라 일정한 범위에 걸쳐 가진 권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 ‘비나’를 선포할 수 있게 된다.
* 용과 마와 신의 지식
자격 여부에 따라 용종이 탐구한 ‘호크마’와 악마가 구성한 ‘네차흐’, 신이 성립한 ‘예소드’를 열람할 수 있다.
* 용과 마와 신의 권능
자격 여부에 따라 용종이 터득한 ‘케테르’와 악마가 통달한 ‘티페레트’, 신이 구축한 ‘헤세드’를 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대개 ‘최초’라는 업적이니 네가 해내는 것이 곧 한계라는 듯.
연우는 정보창을 닫으면서 가부좌를 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참이었다.
‘게다가 신성과 초월성이라는 것도 확인할 필요가 있고.’
연우는 모든 의식을 아래로 깊게 가라앉혔다.
* * *
그 날 밤.
하데스는 연우에게 내린 근신 처분을 회수하고, 곧바로 퀴네에를 제작할 것을 명령했다.
연우가 협약을 깨 버린 이상, 티폰이 언제 티탄과 기가스를 이끌고 재침공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전에 대신물을 완성시키고, 군을 재정비해서 곧 있을 전투에 대비코자 했다.
성역은 여전히 강한 전운이 맴도는 중이었다.
“이곳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다시 부르도록.”
람은 일행을 대장간까지 안내해 주었다. 만약 하데스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란 태도가 가득 묻어났다. 돌아가기 전에는 연우를 한 번 노려보고 갈 정도였다.
연우는 람이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현재 디스 플루토 내에서 그를 보는 시선은 극과 극이었다. 노려보거나, 응원하거나.
전자는 하데스의 협정을 가볍게 깨 버린 것에 화를 내는 입장이었고, 후자는 티탄을 사살한 것에 즐거워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연우는 둘 다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퀴네에를 빨리 제작하고, 회중시계의 봉인을 풀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곳도 정말 오랜만이로군.』
『아아! 이렇게 다시 돌아오게 될 날이 있을 줄이야!』
키클롭스 브론테스와 스테로페스는 넓은 대장간을 둘러보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막내인 아르게스는 울컥했던지 손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3형제가 이렇게 다시 망치를 쥘 수 있는 날이 오게 될 거라고는 여태 생각도 해 보지 못했으니까. 꿈속에서나 그리던 일이었다.
하지만 감동에 젖은 그들과 다르게.
“손을 써야 할 곳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이런 곳에서 여태 어떻게 무기를 제련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만큼 디스 플루토가 처한 상황이 많이 열악했단 뜻이겠지. 티탄과의 싸움에서 버틴 것이 용할 정도야.”
브라함과 빅토리아, 헤노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훑어보기에도 모든 게 엉망이었다.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화로는 몇 개 되어 보이지도 않았고, 모루며 망치 등은 낡아서 금방 깨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창고에도 쇠는 거의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나마 있는 것들도 다 망가져 가는 창칼이 전부. 수리는 생각도 못 하는 수준인 것 같았다.
차라리 하계의 거대 클랜들이 보유하고 있는 창고가 훨씬 부유해 보일 지경.
하데스는 한때 모든 신과 악마들을 통틀어 가장 부유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모두 동나 버리면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아르게스도 할 말이 없던지 씁쓸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한때 〈올림포스〉의 헤파이스토스도 아래로 본다고 하던 대장장이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이 불길은 다른 것 같습니다만.”
연우는 화로 속에 남아 있는 불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불길. 하지만 용마안으로 바라보는 세상 속에는 결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아르게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태초에 우주가 어둠에 잠겨 있을 적, 처음으로 밝혀졌다는 빛에서 가져온 ‘최초의 불’이니까. 프로메테우스가 애지중지하던 것이기도 하지. 모든 게 망가진 이 대장간에 유일하게 남은 자랑거리이기도 해.”
순간, 연우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말뜻을 깨달은 다른 일행들도 놀란 눈이 되었다.
“그럼 이건……?”
아르게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루시엘의 빛. 영혼석에서 뽑아 낸 불일세.”
“……!”
“……!”
연우는 반사적으로 품속에 넣어 둔 회중시계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째각, 째각-
손끝에서 회중시계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바람에 살랑이는 불꽃처럼.
『그럼 이제 퀴네에를 만들어 보세.』
맏이인 브론테스가 소매를 걷으면서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