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차정우 (3)
그 순간, 빛무리가 터졌다.
수많은 활자들이 잘게 부서지면서 연우와 정우를 둘러싼 세계를 전부 뒤덮었다.
화아악!
* * *
삐비빅.
삐빅.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술?
잠깐. 내가 술을 마셔 본 적이 있었나? 지난번 생일에 형과 같이 몰래 소주를 한 병 사다가 마신 적은 있었지만, 입에 맞지 않는다는 형 때문에 나도 입맛만 다시고 그 뒤로 마셔 본 적이 없었는데.
아니다.
발데비히 녀석과 밤새 죽어라 마신 적이 있었지.
헤노바가 술 창고에서 맥주를 담그고 있는 걸 눈치채고, 몰래 밤중에 숨어들었었는데. 한두 잔 정도만 맛본다는 게 그만 너무 맛있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크통을 다섯 개나 비웠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다 술기운에 잠드는 바람에 다음 날 헤노바에게 들켜서 곰방대로 머리통을 두들겨 맞았었지만.
그래도 맞는 걸 감수할 만큼 너무 맛있었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까 군침이 도네. 또 어떻게 구할 수 없으려나? 헤노바가 다른 곳에다 몰래 담그는 것 같기는 하던데. 이참에 한번 뒤를 몰래 밟아 봐?
그런데 잠깐만.
헤노바? 헤노바는 또 누구지?
두서없는 생각들이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밤새 별 이상한 꿈이라도 꾼 걸까.
계속 희한한 이름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다가 사라진다. 동시에 여러 가지 기억들도.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고, 토막이 나 있어서 도저히 흐름을 알 수 없지만.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한 것들이었다.
즐겁고, 행복하고, 애틋했다가, 우울해지고, 슬퍼지다가, 끝내 비장해지는…… 뭐, 꼭 슬픈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
하지만 그런 혼재된 기억들은 금세 흐려졌다. 아무리 선명하게 꾸던 꿈이라도 눈을 뜨면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그 광경들도 모두 파도에 쓸려 가는 모래성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뭐지?”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눈을 떴다. 반듯하게 놓인 책상과 침 자국이 가득한 책들이 보였다. 옆에는 펜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노트가 하나. 밤새 공부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대체 사라진 기억들은 무엇이었을까.
분명히 중요했던 것 같은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떻게든 떠올리려 하면 떠오를 것 같아 인상을 찡그리면서 되짚어 보려는데.
삐비빅. 삐빅.
다시 알람 시계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정신을 현실 세계로 끌어 당겼다. 더불어서 머릿속을 꾹꾹 누르던 두통도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런 걸 의식할 새도 없었다.
07:32
“……엿 됐다.”
등교 시각은 오전 8시.
지각이었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꿈속의 혼탁한 기억 따윈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 * *
“후! 겨우 살았다.”
“뭐야, 너? 살아남았어?”
“당연하지. 흐흐. 날 뭘로 보고?”
“젠장. 이젠 대놓고 사람 차별이네. 공부 못하면 서럽지, 서러워.”
온통 소란스럽기만 한 고등학교 교실 안.
땀내 풀풀 나는 징그러운 남자 새끼들만 가득한 남고라서 그런지, 오늘도 교실은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우당탕탕. 한쪽에서는 말뚝박기를 하고 있었는지, 뚱땡이가 하늘을 날다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덕분에 옆에 있던 책상이며 의자들이 줄줄이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졸지에 서랍에 넣어 둔 책과 과자를 바닥에 죄다 떨어뜨리고 만 아이들은 욕을 해 대면서 뚱땡이를 발로 지근지근 밟고 있었다.
그야말로 혼돈만 가득한 짐승들의 소굴.
젠장.
이딴 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그래도 오랜만에 와서 반갑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었는데. 그런 추억들이 단박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피만 끊는 이 짐승 새끼들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응?
오랜만?
어제도 왔었던 교실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다시 떠오르는 이상한 기분을 지웠다. 이게 전부 다 아침에 있었던 편두통 때문이었다.
“왜 그래? 머리 아파?”
친구 녀석이 조금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방금 전까지 같이 즐겁게 농담 따 먹기를 하던 녀석. 고1 때부터 3년 내내 같은 반을 하면서 친해진 친구였다. 이름이…… 어? 뭐였더라?
“너 보건실 안 가도…….”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형한테는 말하지 마. 또 옆에서 잔소리나 해 낼 거 같으니까.”
나는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했던 나는 몸살로 고생할 때가 많았다.
지금은 그래도 몸이 많이 나아지면서 이따금 편두통을 앓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집안 내력 때문에 몸조심을 하는 편이었다.
어머니도 많이 편찮으셨으니까. 의사들은 늘 우리 모자지간이 겪는 증세가 현대 의학으로 진단하기 힘든 희귀병이라고 했다. 학회에 따로 보고를 해야 할 정도라나? 덕분에 나온 소정의 보상으로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참 거지 같은 병이었다.
“그래도 연우에게는 말하는 게…….”
“됐다니까.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이건 좀만 참으면 돼. 그리고 교문 앞에서 빠다 맞고 있을 놈 데리고 오면 나만 욕 처먹을걸?”
툭 하면 비실대는 나와 다르게, 형은 아주 건강했다. 태어난 형질이 똑같다는 일란성 쌍둥이 형제이면서도, 별다른 희귀 증상도 없이 운동도 곧잘 했으니까. 싸움도 죽어라 해 댔고.
덕분에 문제아로 낙인찍혀서 매번 선생님들한테 맴매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우등생으로 분류되는 나와 성격이 너무 달라서, 우리 형제는 학교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허겁지겁 뛰어온다고 왔는데도 10분을 넘게 지각한 나는 선생님들의 따스한 배려(?)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지만.
나보다 5분 더 늦게 도착한 형은 그런 배려는커녕, 얄짤없이 교문 앞에서 엎드려뻗쳐 자세로 학생 주임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열심히 두들겨 맞으면서 잔뜩 이를 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각인 걸 알면서도, 방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던 걸 보고 몰래 나왔었거든.
오늘 하루는 형을 피해 몰래 도망쳐 다닐 생각이었다.
그러게 누가 어제 냉장고에 남겨 뒀던 내 망고 젤리 허락 없이 먹어 치우랬나?
복수를 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뭐, 쬐에에에금 소심한 복수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쩌겠냐고.
힘으로 안 되면 이렇게라도 해야지.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하여간 못 참겠으면 바로 이야기해. 저번처럼 또 참다가 픽 쓰러지지 말고. 씨발. 연우한테 하도 뒤통수 맞아서 이제 뒤가 납작하다고.”
친구 녀석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우리 형의 인성질에 툭 하면 당하는 피해자였지.
안타까웠다.
좀 잘 챙겨 줘야겠다.
“우리 형이 좀 그렇긴 해. 그치?”
“너네 형제들, 둘 다 똑같거든?”
친구 녀석은 내가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 말에 나도 같이 정색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형보단 낫지.
아니지. 비교할 게 아니지.
어떻게 비교를 해도 그런 인성 파탄자랑 비교를 하냐?
“형이란 놈은 심심하면 통수 치고, 동생이란 놈은 매번 주둥이로 사람 기만하고. 차이가 뭐냐?”
“잘생긴 거? 내가 더 낫잖아?”
이래 봬도 남고에 있으면서도 옆 동네 여고생들한테 고백도 몇 번 받아 본 몸이다, 이거야.
“이 개새……! 어휴! 말을 말자.”
친구 녀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때마침 1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매번 툴툴대면서도 우리 형제를 가장 옆에서 잘 챙겨 주는 고마운 놈이었다.
츤데레 같으니.
꼭 헤노바 같단 말이야.
……헤노바? 또 갑자기 이상한 이름이 떠올랐다. 뭔가 그리운 이름인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무슨 철학자 이름이었나?
어느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는 친구 녀석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쟤 이름이 뭐였지?
* * *
[우리 못난 인성 파탄자] 개새끼 야. 넌 뒤진다. 진짜.
[나] 뿌잉?
[우리 못난 인성 파탄자] 좀 깨워 주고 가면 덧나냐?
[나] 잉잉?
[우리 못난 인성 파탄자] 씨발.
[나] 뀨잉?
[우리 못난 인성 파탄자] 치워라. 욕 처먹기 전에.
[나] 뀨잉 뀨잉?
[우리 못난 인성 파탄자] 이상한 거 쓰지 말라고.
[나]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라보는 고양이 이모티콘)
[우리 못난 인성 파탄자] 오늘 진짜 참교육 좀 하자.
[나] 뀨우우?
[우리 못난 인성 파탄자] 으아아아%[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하여간. 진짜 말싸움 못 한다니까.”
나는 욕설로 도배되다시피 하는 채팅 앱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메시지가 계속 올라가는 걸 보니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숫자 1은 계속 사라지는데 답장도 하지 않으니 아마 지금쯤 속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 테지.
“으아암.”
하품이 가볍게 나올 정도로 수업 시간은 지루했다.
으레 대부분 그렇듯이 고3 수험생의 수업 내용은 이미 다들 학습해 둔 것들투성이였다. 수업도 내신을 위해서 가끔 할 뿐이지, 그마저도 수능이 다가오는 지금은 대부분 자습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선생님도 학생들이 대놓고 다른 문제집을 꺼내 놓고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터치를 일절 하지 않는 중이었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물론, 선생님의 눈에 너무 띄면 바로 압수였지만. 그것도 적당히 핑계를 대면 금방 돌려주시곤 했다.
이래서 모범생이란 신분이 중요하단 말이지.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벌써부터 이 작은 사회에서 체득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문제집을 꺼내서 공부라도 할까 싶었지만. 이상하게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이랬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
대체 뭘 놓치고 있는 걸까?
중요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이렇다 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기분도 싱숭생숭하고, 여태 공부도 많이 했으니. 오늘 하루는 조금 농땡이를 피워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물론,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면 머릿속을 비우고 다시 펜을 들 생각이었지만.
웅, 우웅-
그때,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 갑자기 울어 댔다. 게임이나 하나 다운받을까 싶어서 만지던 차였는데.
(광고) 오벨리스크의 끝에 오르면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참여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또 이거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스팸 문자였다.
매번 차단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번호를 바꿔서 오는 게 짜증이 났었는데. 한 달이 넘도록 같은 시간에, 같은 내용으로, 꼬박꼬박 찾아오니 이제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오벨리스크.’
신에 대한 찬사나 승전의 내용을 기록하는 기념비.
다만, 여기서는 어떤 의미의 ‘탑’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전형적인 게임 광고인데.
문제는 ‘Yes or No’라고 적힌 부분에도, 다른 어디에도 따로 링 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심심해서 한번 플레이를 해 보려 마음을 먹어도 다운을 받을 수 있는 버튼이 딱히 없다. 대체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는 문자였다.
웅, 우웅-
때마침 스마트폰이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도 문자였다. 그러다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
나는 문자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곧바로 삭제했다. 보지 않아도 어차피 내용이야 뻔했다.
게다가 이 사람과 연락을 하고 있는 사실을 형한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게 분명했다.
평상시 내가 짓궂은 장난을 쳐서 화를 내는 형과, 정말 화가 단단히 난 형은 차이가 엄청 컸으니까.
그때는 너무 싸늘해져서 딴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질 일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괜히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할 게 없나.
쓸데없이 SNS까지 전부 뒤적거리고 나니 정말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은 싱숭생숭했지만. 오전보다는 낫다 싶어 스마트폰을 놓고 다시 펜을 들었다.
뭘 하더라도 난 공부를 해야만 했다.
내신도 수능도 포기할 수 없었다. 4년 특례 장학금으로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 그래서 곧바로 군 복무 대신에 방위 산업체에 들어가서 돈을 벌어 집에다 가져다주고, 병역 기간이 끝나면 스트레이트로 졸업해서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
내가 꿈꾸는 미래였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돌봐 드리고, 집안까지 일으키는 게 내 꿈이었다. 거기 어디에도 휴식은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문제집을 풀어 나가려 하는데.
다시 스마트폰이 울렸다.
문자나 채팅이겠거니 싶어 아예 전원을 끄려는데, 전화였다.
화면에 적힌 발신자의 이름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이고 말았다.
병원
* * *
“병환이 차차 나아지는가 싶던 차에 이런 일이 갑자기 발생해서…… 하아.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차차 경과를 지켜보도록 합시다.”
담당의가 간 뒤, 나는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봐야만 했다.
뚜-
뚜-
산소마스크에 의지한 채 가쁘게 숨을 쉬는 어머니. 어제까지만 해도 즐겁게 이야기를 하시던 분이 맞나 싶을 정도로, 큰 홍역을 치른 단 몇 시간 사이에 초췌해져 계셨다.
“나 잠시만 바람 좀 쐬고 올게.”
나는 형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병실에서 나와 벽에다 등을 기댔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왜 이렇게 어지럽기만 한 걸까.
웅, 우웅-
그때. 다시 뒷주머니가 울렸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스마트폰을 꺼내 손에 쥐었다.
(광고) 오벨리스크의 끝에 오르면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참여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언제나 보던 스팸 문자인데도 불구하고.
평소 오던 시각과 다르게 도착한 문자를 보니, 오늘따라 유달리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특히 한 단어가 눈에 밟혔다.
소원.
이게 단순한 게임 광고가 아닌, 정말 영화나 소설책에 등장하는 그런 것이라면 좋을 텐데.
그래서 정말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저 정체도 알 수 없는 어머니의 병을 낫게만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멍하니 문자를 보다가 엄지로 화면을 두들겼다. 이렇게라도 하면 속이 좀 진정될까 싶어서.
그때, 한순간 ‘Yes or No’ 부분이 푸른색으로 변했다. 링크가 걸 린 것이다.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Yes’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